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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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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28

택시 안에서 진영은 내내 수아의 손을 잡고 있다.

호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진영은 수아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여행 내내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많이 피곤해요?"

부드러운 말투...

"아뇨...정신이 너무 맑아져서 잠이 안올 것 같아요."

"샤워하고도 잠이 안오면 전화해요."

진영은 차라리 진탕 술이라도 먹고 잠들고 싶었다.

술이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면 잠들기는 틀렸다.

 

수아는 방에 들어와 오래도록 샤워를 했다.

황홀했던 진영과의 키스를 생각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입술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도 냉정했던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니...놀랍기도 하고...고마웠다.

늘 바라보는 사랑만 했던 수아. 이제 그녀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진영의 고백이 아직도 꿈만 같다.

 

[혹시 잠이 안오면 지하bar로 와요. 나도 잠이 안와서 한 잔 하는 중이니까]


맨 얼굴에 젖은 머리를 하고 수아가 들어선다.

진영은 벌써 반 병이나 마신 상태였다.

맨 얼굴의 수아...처음 본다.

평소에도 화장이 진하지 않아 낯선 얼굴은 아니지만...더 사랑스럽다.

젖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수아가 옆에 앉았다.

바텐더가 잔을 건넨다.

"전...그냥 맥주 주실래요?"

진영은 말없이 계속해서 수아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 진영.

수아는 또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내일 하루 밖에 안남았는데 신나게 놀려면 일찍 일어나셔야죠."

수아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킬새라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한다.

진영은 또 말이 없다.

"큰일났군..."

".......?"

"사진이라도 들고 다녀야 겠어. 잠깐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수아가 픽 웃는다.

"이사님이 그런 말 하시니까 너무 안어울리세요. 정말 어색해요."

"이사님...언제까지 그렇게 부를꺼지? 왠지 여사원한테 추근거리는 늙은 간부가 된 기분이야."

"이사님이 이사님이셔서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데 왜 이사님이라 부르냐고 물으시면 그저 이사님이 이사님이라 이사님이라고 부른 다 대답할 수 밖에요."

수아는 드라마의 대사를 흉내내며 말했는데 진영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드라마는 통 안보시나봐요. 그 드라마 남자들이 더 좋아한 건데..."

민망해진 수아가 입술을 삐죽인다.

진영이 푸하하 웃는다.

시간이 벌써 새벽1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영은 벌써 한 병을 비운 상태였다.

"이사님..."

"......?"

"저 사실 너무 자신없어요. 저에겐 너무 과분한 사랑인걸요. 이사님 마음은 너무 감사하지만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운 사람이세요, 이사님은..."

진심이었다. 누가봐도 일등 신랑감이지만 수아는 자신이 없었다.

감당하기엔 너무 커다란 존재...

갑자기 일어서는 진영,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이다 언더락 잔을 떨어뜨리고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넘어진다.

손바닥에 박힌 유리조각...수아가 놀라 진영의 손을 잡는다.

체중을 실어 넘어진 상태라 유리가 제법 깊게 박혔다.

진영은 대수롭지 않게 유리조각을 빼내고는 휘청거리며 문을 향해 걷는다.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흐른다.

수아는 프론트에 응급약품을 부탁하고 진영을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직원이 금새 따라올라왔다.

수아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진영을 침대에 눕히고 솜으로 대강 소독을 하고 지혈제를 뿌린 후 붕대를 감는다.

붕대 위로 피가 스민다.

한 참동안 진영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내며 잠 든 얼굴...

수아는 진영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 일어선다.

"가지마, 이수아!"

잠꼬대를 하듯 진영이 소리친다.

손목을 움켜 쥔 힘이 술기운 때문인지 너무나 강해, 수아는 그 자리에 섰다.

"가지말라고...가지마라, 수아야."


깨질 듯한 두통에 진영이 눈을 뜬다.

오른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

수아의 손목...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잠든 수아...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진영이 손을 놓자 벌겋게 부어오른 수아의 손목이  보인다.

'바보같이...'

진영이 손목을 어루만진다.

진영은 일어나 수아를 안아 침대에 눕힌다.

곤하게 잠든 수아...

수줍던 그녀의 키스가 떠오른다.

꼭 다문 입술에 진영은 입맞춤을 한다.

아련한 장미향...샴푸향기...비누향기...또 다시 머리가 아찔해진다.

진영의 입맞춤은 진한 키스가 되어 잠든 수아를 일으켰다.


제주도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개운한 정신이다.

진영은 눈을 감은 채 수아의 손을 찾았다.

그러나 침대에는 진영 혼자 뿐이었다.

꿈 같던 밤...

수아는 장미꽃 한 잎을 떨군 채, 사라졌다.


하얀 시트위에 살포시 얹힌 꽃잎을 진영은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곳에서 수아를 안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다.

그저 그녀와 함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을 뿐...

자신의 섣부른 행동이 수아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거부조차 하지 못하던 그녀를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하다.

거부를 했다면...멈출 수 있었을까...그것도 자신할 수 없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니 수아에게 미안할 뿐이다.


진영은 샤워를 하고 수아의 방으로 갔다.

계속되는 벨소리에도 수아는 기척이 없다.


"306호실 1시간 전에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진영은 급하게 짐을 챙겨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데스크에 알아보니 수아는 이미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한 걸로 나와 있었다.

이렇게 가버리다니...진영은 수아가 걱정되기도 하고  한 편으로 화가 났다.

다음 비행기로 곧 서울에 도착한 진영은 수아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 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토요일...

어디로 간 것일까...제발 전화라도 받길 바라는 심정으로 계속 전화를 걸어본다.

 

"아니 얘가 연락도 없이..."

엄마는 수아의 뒤를 계속해서 살핀다.

"혼자 온거야?"

"응"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버지는?"

"개들 데리고 산책 나가셨다. 너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전화를 해도 안받고."

"일단 들어가, 들어가서 얘기하자."

수아는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방으로 들어 간다.

전기장판의 다이얼을 최고에 맞춰 놓고 두꺼운 솜이불을 덮었다.

땅 속으로 꺼지 듯 마음도 정신도 까무룩 해진다.

"어머...얘가 왜 이래, 너 어디 아픈거야?"

"엄마...나 조금만 누워 있을께..."

기운이 없는 수아의 말투에 엄마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얼마나 잔 걸까...수아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일으켰다.

창 밖이 이미 어둑어둑 해졌다.


부엌에 가보니 엄마는 수아가 좋아하는 육계장을 끓이고 계신다.

등 뒤에서 엄마를 안는 수아...

"다 잔거야? 어디 아팠니? 이 땀 좀 봐...빨리 밥 먹고 약 좀 먹어야 겠다. 흑염소 부탁해놨으니 아마 내일이면 올꺼야. 급하니까 빨리 해달라고 했다. 시집도 안가는 딸년한테 정말 내가 정성이 지랄이다."

"엄마...나 안 아퍼. 그냥 피곤해서 그랬어. 요즘 잠을 통 못 잤거든."

"살도 쑥 빠지고 눈에 총기도 하나없이 들어와서는...쯧쯧...부산 간다고 할 때 말렸어야 한 건 아닌지."

"아냐..일은 힘들지 않어."

"그럼, 그 사귄다는 녀석이랑 안좋은 거야?"

고개만 흔드는 수아.

엄마를 생각해서 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엄마, 우리 커피 마시자."

수아는 커피를 두 잔 들고 마루로 나왔다.


"엄마...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어?"

"왜 결혼하다니, 할 때 되니까 한거지."

"그런 말이 어딨어, 할 때 됐다구 그냥 하나?"

"그럼 안하면 뾰족한 수 있냐? 집에서 정해준 니 아버지 한 번 만나구 몇 번 데이트 하다가 그냥 결혼 한거지."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 시절에 사랑만 갖고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나? 다 나 처럼 만나서 결혼한거지. 사랑해서 결혼한 애들보다 훨씬 잘살고 있잖냐. 진화나 숙경이 봐라. 죽자살자 집에서 반대한 결혼 해가지고 아직도 그 나이에 월세방 전세방 옮겨 다니면서 자식들 등이나 치고 살잖아."

"꼭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그렇게 사나 뭐?"

"사랑이 아니더라두 잘 산다는 얘기야. 좀 새겨 들어. 근데...그 남자랑은 잘 안돼? 왜 갑자기 사랑타령이야."

"잘 모르겠어...그냥 내가 너무 부족한 것 같구...자꾸 과분하다는 생각도 들고..."

"얼마나 대단한 놈이길래 그런 생각을 해? 니가 연애를 처음 해보니까 괜히 겁먹은 거 아냐?"

"그런가?..."

"대단한 집 아들이야?"

"아냐...부모님은 그냥 농사지으셔.."

"미친년...니 아부지도 농사지으신다."

"사람이 어렵다구...나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구 그런 거 말구...사랑한다는 마음보다는 뭐라고 해야하지...존경한다는 말이 맞을까?"

"야, 그럼 된거야. 남자가 자고로 여자한테 존경받고 살 정도는 돼야지. 맥없이 친구같고 편한 남자는 살다보면 다 니가 고생인거야. 뭐 능력도 있고 니가 존경까지 한다니까 더 이상 걱정은 안되는데, 언제 데리고 올꺼야. 있긴 있나보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그래 결혼 얘기는 해봤어?"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무슨 말이 또 그래?"

"이번 일은 나한테 좀 맡겨줘, 나도 생각할 게 많아."

"결혼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사랑하던 사이라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더라. 주영이 아줌마 딸도 안그랬냐. 날짜 받아놓고는 없어져 가지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었잖어. 그래도 지금 봐라. 아들래미 둘 딱 놔놓고 저렇게 잘 살고 있다.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이니까 너도 편하게 생각해. 근데 몇 살이야? 몇 남 몇 녀래?"

"서른 여덟...막내아들인데 누나랑 형은 다 결혼하고..."

"뭐? 서른 여덟? 총각이야?"

"응."

"아이고...결국 고르다 고르다 늙은 놈 만나서 결혼하는 구나. 모자란 년. 니 오빠들이 좋아라 하겠다. 지들보다 나이많은 매제 생긴다구. 근데 그 나이 먹도록 왜 장가를 못갔데? 문제 있는 사람 아냐?"

"군대갔다가 유학갔다가 직장생활하느라 그랬겠지 뭐."

"근데 니가 뭐가 아까워. 너 그 남자 나이가 많아서 어려운 거 아니야?"

"모르겠어, 같이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잘 모르겠어..."

"아이고 잘났다. 그래 어렵다 어려워. 너도 적은 나이 아니니까 내가 나이 가지고는 반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조만간에 데려와. 나도 봐야 알겠다."

엄마는 궁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저렇게 심란해하는 수아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다.

 

수아는 부모님이 주무시러 들어가자 밖으로 나왔다.

진영에게 말도 없이 올라왔다.

지금쯤 얼마나 황당해 할까...

하지만 수아는 도저히 진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아직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는데...어젯밤...진영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용서가 안된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오만가지 생각들...

진영은 아직까지는 수아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놓고는...

너무 쉽게 그를 받아들인 자신이 헤퍼보이기도 했고, 기다려주지 않은 진영이 밉기도 했다.


- 나를 쉽게 본 건 아닐까...

수아는 앞으로 진영을 볼 일이 막막했다.


진영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이 정희가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