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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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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28

"이사님은 제가 정희 친군데 꼬박꼬박 경어를 쓰셔서 정희 같이 만나면 참 웃기겠어요."

"내가 반말을 하면 이수아씨도 저한테 오빠라고 부르는 겁니까?"

"헉...오빠요? 또 본전도 못찾을 얘기를 했네요. 하하...그래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성이라도 빼고 부르세요. 어쨌든 동생 친군데..."

"습관이 되어서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진영도 수아를 편하게 부르고 싶었다.

동생이 아닌 자신의 여자에게 하듯...

수아는 창 밖에서 낯익은 여자를 발견했다.

아침에 호텔에 진영과 앉아있던 그 여자.

남자에게 안기다시피 하고는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다.

진영은 등을 돌리고 있어 보지 못했다.

말해야 하나...아까 진영의 표정을 봐서는 썩 반가운 여자는 아닌 듯 한데...술집 마담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 때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고 두 사람의 가벼운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남자는 여자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듯 마구 휘두르는 팔을 잡으려고 했고 여자는 악을 쓰는 지 닫힌 창문을 통해서도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사님...혹시 아까 호텔에서 만난 여자분...잘 아시는 분이세요?"

역시나 표정이 굳어진다.

"갑자기 그 여자 얘기는 왜 물어요?"

수아의 입에서 그 여자가 얘기가 나오자 진영은 술기운이 확 달아난다.

"...저기..."

수아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킨다.

진영이 뒤돌아 본다.

서서히 굳어지는 진영의 표정.

혼자 여행을 왔다고 하더니 저 남자는 누구지?

여자의 악다구니가 진영의 귀에 까지 들려왔다.

패악질은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남자가 그녀의 뺨을 때린다.

돌아서는 남자에게 달겨드는 그녀.

밀쳐지기를 수차례...화가 난 남자의 몸 짓이 격해진다.


"어떻게 좀 말려보세요. 저러다 큰일 나겠어요."

걱정스러운 수아.

진영이 벌떡 일어난다.

"나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참, 주인한테 말해서 택시 좀 불러달라고 해요."

 

"야, 이거 좋게 봐줄라고 했는데 완전히 또라이아냐? 엉? 혼자 술 먹고 있는 거 불쌍해서 좀 놀아줄려고 했더니 이게 어디서 패악질이야."

남자의 올라간 팔이 진영의 손에 잡힌다.

"넌 또 뭐야."

"모르는 사이였으면 그냥 갑시다. 지금 신고 들어갔어요."

"이런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디서 저런 또라이한테 걸려서..."

남자는 여자를 향해 침을 뱉고는 거칠게 돌아선다.

"진영씨?"

여자는 몸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쓰러진다.

"파출소 가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

진영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가 피식 웃는다.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있다는 건, 아직도 날 못 잊어설까? 도대체 뭐야? 10년도 지난 일을 가지고 날 이렇게 벌레보듯 하는 거야? 우리가 이런 사이 밖에 안되니? 그 때 너가 한 잘못은? 나만 나쁜 년으로 몰지 말란 말야.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 때문에 날 외롭게 해놓구선 나만 잘못했다? 웃기는 일이지."

진영은 여자를 일으킨다.

"나랑 술 한 잔해. 나 아직 멀쩡하다구."

"택시 불렀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호텔로 들어가."

"야, 강진영. 그래, 나 지금 니가 알다시피 추락했어. 어때, 이런 나 보니까 이제야 속이 다 후련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지? 아까 그 기집애는 누구야? 니 애인이야? 이제야 여자랑 연애할 여유가 생겼나 보지?"

진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래? 너도 날 때리려고? 때려, 나야 맞고 사는 거 이골이 난 여자니까."

순간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맞고 살다니...선배한테 맞고 산다는 얘긴가...

"너..."

진영은 말끝을 흐린다.

"그래, 강진영.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 우리 집안 보고 나랑 결혼한 사람이야. 죽어라 뒷바라지 해놨더니 지 무능력은 몰라라하고, 돈 줄 끊은 우리 아버지 덕에 나 맞고 살아. 이혼? 해야지...그래 나 이혼할꺼야. 우리 부모님 돌아가시면 나 꼭 이혼할 꺼라구."

예전에도 부모님 생각이 끔찍했던 여자다.

부모 뜻을 거스른 적이 없던 그녀...연애할 때도 밤늦게 까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진영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동안의 증오는 사라지고, 정체모를 연민이 생겨났다.

택시가 도착했다.

그녀가 안 타겠다며 버티자 진영이 힘으로 뒷좌석에 태운다.

"롯데호텔까지 부탁합니다. 중간에 내리지 못하게 해주십시요."

기사는 출발하지 않은 채, 악다구니를 쓰며 창문을 두르리는 여자를 못마땅히 쳐다 보고는 저 여자를 어떻게 태우냐는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본다.

하는 수 없이 진영이 따라 탄다.

여자는 차가 출발하자 이내 진영에게 쓰러져 잠에 빠져든다.

수아는 진영이 따라 타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진영은 호텔 카운터 여직원에게 여자를 인계했다.

방까지 따라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호텔을 나와 진영은 한 참을 서 있었다.

선배 사업이 계속 실패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 몰랐다.

폭력까지 쓰다니...정황을 다 알 수 없지만 아내를 때리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쩌다 두 사람이 저렇게 망가진 것일까...진영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연달아 두 개피의 담배를 피고는 그제서야 수아를 생각했다.

서둘러 택시를 잡고 bar로 향했다.

 

"여자분 괜찮으세요?"

"미안해요. 전화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진영은 단숨에 언더락 한 잔을 들이킨다.

쓰린 속을 훑으며 온 몸에 기운이 빠져나간다.

수아는 택시를 타고 함께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혹시 예전에 바닷가에서 진영이 얘기했던 그녀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사님은 괜찮으세요? 안색이...그만 들어가서 쉴까봐요"

"난 괜찮아요. 수아씨 피곤하지 않으면 그냥 있어도 되요."

진영이 처음으로 수아씨라 부른다.

아까같은 분위기였으면 농담이라도 할텐데 도저히 진영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다.

무표정하게 밤바다를 바라보는 진영.

처음으로 진영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쌍커풀없이 커다란 눈, 곧게 뻗은 콧날, 적당한 크기로 끝이 야문 입술, 깔끔하게 면도되어 있는 단단한 턱...매력적인 얼굴이라 생각하는 순간 수아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얼굴을 가졌음에도 늘 차가운 표정에 가려졌던 진영의 얼굴.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킬까 싶어 수아는 얼른 언더락 한 잔을 비운다.


두 사람은 깊어가는 밤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양주 한 병을 비운 두 사람은 술을 깨기 위해 바닷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벌써 이사님과 바닷가를 세 번이나 왔어요. 한 번은 이사님 얘기 듣고, 한 번은 내 얘기하고...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요?"

"글쎄...우리 얘기를 해야하나?"

진영이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마음이 편치 않다.

오로지 수아와의 시간을 위해 제주도 행을 결심했다.

이곳에서 그 여자를 보게 될 줄이야.

그녀가 가족과 단란한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아는 공허한 진영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삼킨다.


"그 여자 분...그 때 이사님께서 말하셨던 분이죠?"

진영은 대답 대신 담배를 꺼낸다.

"수아씨도?"

담배를 건네는 진영, 수아가 고개를 흔든다.

"끊어보려구요. 이제 피울 일도 없어요."

담배...'그'가 군대간 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중독까지는 아니었지만 끊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와의 악몽을 겪은 날부터 몸이 담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 모두...첫사랑을 만나 실망을 하는 군요."

진영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저야 뭐...혼자 좋아했던 거니까...하지만 이사님은..."

"그날 밤 일...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말아요...지금 와서 말하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지만...그 사람, 진심으로 했던 행동이 아닙니다."

"...?"

"이수아씨가 혼란스러워 할까봐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 수아씨를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아끼는 마음은 클 꺼에요."

"위로하실 필요 없어요. 마음에서 지워버렸는 걸요."

진영이 수아의 옆모습을 바라 본다.

"사랑은 함께 한 추억이 있어야 아름답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두 사람...함께 간직할 추억 따위...만들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에게 있어 저란 여자...그저...자신을 10년이나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바보같은 후배였을 뿐이니까요."

"이수아씨는..."

진영이 숨을 고른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정말 모르고 있네요."

수아의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오른다.

"그 사람도 그 때 연수원에서 만났던 사람도...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이겠지요."

"그야 이사님이 절 잘 봐주신 거겠죠."

진영은 수아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이수아, 당신은 누굴 사랑할 줄만 알았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는 눈치없는 여잔가?"

수아는 진영의 갑작스런 태도와 말투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진영의 눈이 수아의 양쪽 눈을 번갈아 바라본다.

다가오는 진영의 얼굴...순간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거부하지 않는 자신...단지 취기때문일까...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진영의 입술이 닿는다.

단순한 진영의 위로? 아...모르겠다.

온 몸에 힘이 풀려나간다.

진영은 축 늘어지는 수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지탱하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담배냄새와 술냄새...금새 진영의 입에서 달큰한 흥분의 냄새가 수아의 코를 자극했다.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모든 시간들, 모든 얼굴들...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

어쩌지...어쩌면 좋아...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거부할 수 없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진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폭풍처럼 일어나는 환희...

입술을 거둔 진영은 파르르 떨고 있는 수아를 안아준다.


"나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당신에게 가려는 마음을 몇 번이고 멈추려고 했지만 결국 이렇게 오고야 말았군."

"......"

진영은 수아의 수줍은 눈을 바라본다.

"당신의 마음까지 바라진 않겠어. 그냥...지금처럼...내 옆에 있어 줄 수는 있겠지?"

수아의 고개가 떨궈진다. 모르겠다.

지금 떨리는 이 마음이 이유가 있어서인지...

바람이 지나가며 수아의 등을 쓰다듬는다.

수아야...괜찮아...괜찮아...

니 마음을 숨기지마...

"함께 있는 게 편하고 좋아서...저는 그냥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서 편해지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수아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당신한테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내가 사랑하면 돼. 당신이 다가올 필요는 없어. 내가 다가가는 것만 막지마."


밤바다가 그들의 사랑을 훔쳐보다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바람이 만족스러운 듯 두 사람 주위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