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같이 오피스텔을 나선 수아는 클랙숀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의 차였다.
-공항에 데려다 주러 나오셨나?
수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진영에게 다가갔다.
"타요."
"어머 이사님, 괜찮아요. 저 택시타고 갈 테니까 들어가서 더 주무세요."
"어서 타요. 비행기 놓치겠어요. 지금 택시 잡기도 어렵습니다."
수아는 부담스러웠지만 이 시간에 부하직원을 데려다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진영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진영의 차가 미끄러지 듯 출발했다.
"어서 들어가서 티켓팅 해요."
수아는 가방을 내리고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이사님, 정말 감사해요. 잘 다녀 올께요."
진영은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급하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진영이 뒷좌석에서 트렁크를 꺼내 국내선 청사를 향해 급하게 걸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은 수아는 비지니스 석으로 예약을 해놓은 진영의 배려를 고마워하며 눈을 감았다.
잠을 설친 탓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갖는 여유에 몸의 긴장이 풀렸다.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은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주도 공항의 도착을 알리는 기내방송에 수아는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로 풀어본다.
"잘 잤어요?"
수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수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영.
"이사님."
"그럼 혼자만 휴가 즐기려고 했습니까?"
수아는 멍하게 진영을 바라본다.
늘 동행하던 사이라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2박 3일간 함께 휴가를 보내야 한 다고 생각하니 수아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진영이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직원들과 함께 가는 것도 아니고 단 둘 만의 여행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영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수아는 오늘에야 자신이 진영을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이사님이랑 이렇게 오니까...왠지 일하러 온 기분이 들어서 자꾸 불안해요. 이사님은 안그러세요?"
수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는다.
"글쎄...난 잘 모르겠습니다."
깔깔깔...수아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
뜬금없다는 표정의 진영.
"이사님의 그 말투 때문에 더 그래요. 이렇게 사적으로 있을 때는 제발 뭐뭐 합니까? 뭐뭐 합시다, 이러지 마세요. 저 휴가 보내주셨으면 맘 편하게 보내도록 해 주시라구요. 맨날 딱딱한 그 말투, 그러니까 여자들이 어려워 하잖아요."
"이수아씨가 날 어려워 해요? 하하, 어려운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안 어려운 척 하는 거라구요. 이사님 상처받으실까봐."
진영은 수아와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수아의 저런 말투, 표정, 행동...일 할때는 볼 수가 없었다.
진영은 일하는 동안은 한 가지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그녀를 느껴보고 싶었다.
진영 역시 이런 자리에서는 그녀에게 좀 더 따듯하고 살뜰하게 대해주고 싶지만 이미 굳어버린 말투까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노력해 보죠. 그게 소원이라는데.."
진영의 미소가 부드럽다.
"이사님, 캐주얼 복장도 잘 어울리시네요. 음...좀 더 젊어보이시고...뭐랄까 밝아보이세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배시시 웃는 그녀를 진영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다.
"참, 이사님. 저 뭐 두고 온 게 있어요. 잠시만요."
수아는 프론트에서 키를 찾아 룸으로 향했다.
"진영씨 맞구나."
진영이 고개를 든다.
"혹시나 했어."
진영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
대꾸없는 그의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잠깐 앉아도 될까?"
진영이 굳은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왠일이야? 일 때문에 왔어? 이게 얼마만이지? 벌써 10년이 됐구나."
"......"
"난 여행중이야...여기서 묵고 있는 거야? 난 내일 올라가. 진영씨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얘기하고 있는 여자. 많이 야위었다.
선배가 하는 일마다 틀어진다는 소문을 늘 듣고 있었다.
처가에서 계속 밀어주다가 그마저도 지원이 끊긴 상태라고 들었다.
"진영씨는 언제 올라가? 참, 지금 부산에 있다며?"
그녀는 진영의 소식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밖에 없다.
동창들과는 만날테니까...
하지만 진영은 불쾌하다.
마치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다.
그녀가 악마같이 보였을 때가 있었다.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여기 까지야"하며 냉정하게 돌아섰던 그녀.
다시는 이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우연으로라도 한 번 쯤은 만나겠지 싶었다.
묻는 말에 대답이 없는 진영을 바라보던 그녀가 창밖을 바라본다.
"진영씨, 아직도 나한테 화나 있는 거니?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진영씨 원래 그렇게 냉정한 사람이었어?"
그 때 수아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이걸 빼먹었잖아요."
수아가 그제서야 여자를 인식한다.
"어머...손님이 계셨네요."
여자가 수아를 한 번 훑어 본다.
"진영씨 일행이니?"
진영은 대답 대신 일어선다.
"가지."
진영은 수아의 손목을 잡고 커피숍을 나왔다.
"그 분 누구세요?"
미처 진영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수아가 눈치 없이 물었다.
"그냥 아는 여자."
짧게 내뱉는 퉁명스러운 말투에 수아가 그제서야 진영의 표정을 살핀다.
- 별로 기분좋은 만남은 아니었나보네..
진영은 수아와의 휴가를 생각해 애써 마음을 추스렸다.
마음속에 이는 동요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이곳에서 여자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갔으면 더 잘 살았어야 했다.
그래야 진영의 마음이 편했을 테니까...
10년 만에 옛사랑의 야윈 얼굴을 본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왠지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상대가 제 풀에 꺾여 쓰러지는 허무함...그 이상이었다.
"전 겨울 제주도는 처음인데요, 음...바람이 많이 불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날씨가 여자들 마음 같아서 변덕이 심해요. 기온이 영상이어도 북서풍이나 북동풍이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하면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니까요."
수아가 혀를 삐죽내민다.
"남자들 마음은 일편단심 민들레란 말씀이세요? 제 주위는 변덕 심한 남자들이 많아서 별로 호응이 안가는 말이네요."
사실이었다.
이상하게도 수아 주변은 실연당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친구들 쪽에서 남자를 차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경우가 드물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어쩌면 친구들이 하나같이 수아같은 일편단심 들이었다.
"바람 안 불때 성산봉에나 다녀오죠. 춥기는 해도 전 거기가 제일 좋아요."
"내일 일출 보려 했는데 지금 갈까요?"
"어머...휴가와서 누가 새벽에 일어나요. 전 일출 보는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래요? 그럼 지금 갑시다. 바람이 안분다고는 해도 그 곳 바람 만만치 않을 거에요. 방풍 될 만한 옷 가져왔어요?"
"아뇨..."
"할 수 없이 제 옷 뺏기게 생겼군요."
"바람쐬러 왔는데 그냥 맞죠 뭐."
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제주도 바람들이 오늘 모임이 있나봐요. 에취...아이고...조금만 말랐어도 날라갈 뻔 했어요."
"이거 입어요. 감기 들어요."
진영이 자신의 방풍점퍼를 건네주고 트렁크에서 다른 점퍼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입을께요."
수아는 배시시 웃으며 점퍼를 입었다.
바람에 머리가 심하게 날린다.
"완전히 미친 여자 꽃다발 같아지겠어요. 잠깐만요."
수아는 머리를 질끈 동여맨다.
"사진찍어야 되는데 스타일 안나오겠어요."
3만평이 넘는다는 푸르른 초원...빙벽(氷壁)같이 날카롭게 깍아내린 절벽...
무엇보다 수아는 거대한 왕관을 연상케 하는 기암절벽이 있는 분화구를 좋아했다.
끝없이 펼쳐진 깊고 푸른 바다...모든 스트레스와 피곤이 확 풀리는 듯 했다.
수아는 한 참을 그곳에 있었다.
"겨울 바닷바람에 얼굴 동상 걸리겠군요."
수아는 그제서야 진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선다.
"바다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여름에 데려올 걸 그랬군요."
"보는 것만 좋아하지 물에 못들어가요. 일곱살 때 오빠가 수영가르쳐 준다고 하다가 실수로 절 2m 넘는 풀에 빠트렸거든요. 그때부터 물에 들어가는 건 무서워 했어요."
"그런 사람이 바다는 어떻게 좋아해요?"
"그냥 보는 게 좋은 거죠 뭐.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지 않아요? 음...부드러운 카리스마...음...앉아서 이렇게 깊은 바다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막 빨려드는 것 같아서 무섭지만 멀리 바라보고 있으면...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요, 바다한테서..."
여자들은 항상 이렇게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나 보다.
진영은 그런 수아가 메마른 자신과 달라 색다른 느낌이 든다.
여자와 이렇게 여행하는 것도 10년만에 처음이고 이런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10년 세월은 진영을 워커홀릭으로 만들었고,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진영은 수아의 말에 바다를 바라본다.
언제쯤 자신의 마음에도 예전처럼 작은 감흥이 찾아 올 것인가.
어쩌면 수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변하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진영의 마음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섭지코지까지 들려서 호텔로 돌아왔다.
"이사님, 오늘 저녁은 제가 사 드릴께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내 입맛에 맞추려면 이수아씨 한 달 월급 가지고도 어림없을 텐데요?"
"까짓 것, 한 번 쏘죠 뭐."
진영은 웃으면서 회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무슨 회 좋아해요?"
"이사님 좋아하는 거 시키세요. 전 회는 뭐, 다 잘 먹으니까."
두 사람은 주인에게 물어 오늘 들어온 회 중에서 추천해 달라 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사님이 소주드시는 거 첨 보네요."
"그랬나요? 하긴 소주 먹을 기회가 없었군요."
"이사님 따라 다니면서 양주만 먹다보니 소주 쓴 걸 모르겠어요."
수아는 또 배시시 웃는다.
이 여자...한 남자에게 사랑만 쏟을 줄 알았지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 지 스스로는 모르고 있다.
아니...자신에게만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까?
수아는 진영의 그런 눈 빛을 느끼지 못한 채, 회 먹는 일에만 열중이었다.
"그 때, 서울가서 선은 잘 봤어요?"
생뚱맞은 진영의 질문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회가 딱 걸린다.
"켁켁...제발 선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이사님이 안하셔도 엄마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니까요."
"왜 그렇게 선 보는 걸 싫어해요?"
"선 보는 게 싫은 게 아니구요, 우리 집은 선 보는 날이 그냥 결혼 날짜 잡는 날이거든요. 오빠 둘 다 서른도 되기 전에 결혼을 해서 엄마는 저 하나 결혼시키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과업이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그래도 그렇지 사무실까지 전화해서는..."
"어머니 마지막 과업이신데 소원 좀 들어드리지 그래요. 이수아씨도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그런 건 아닌데...그렇다고 선 봐서 가고 싶지는 않아요. 꼭 시장에 내놓아지는 기분이 들잖아요. 결혼에 목숨 건 여자 같기도 하고...자연스럽게 만나서 좋아지면 몰라도 그렇게 만나는 건 싫거든요. 제가 아직 안 급한가봐요, 엄마말대로...뭐 급해지면 제가 먼저 서두를 지도 모르죠."
매운탕이 나오자 수아는 숟가락을 놓는다.
"전 배 불러서 더는 못먹겠어요. 여기까지 찼어요."
수아는 손바닥 날을 목에 가져다 대며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진영도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진영이 계산을 하려하자 수아가 손사래를 친다.
"이사님, 진짜 제가 낼께요."
"됐어요. 다음에 사주세요."
"싫어요, 오늘 저녁은 제가 낼래요. 맨날 얻어만 먹고..."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2차 사든지."
두 사람은 바다가 잘 보이는 작은 bar를 찾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