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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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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11


BY 이윤하 2005-11-28

저녁에 수아는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던 선 얘기를 꺼내신다.

수아의 계속되는 거절과 엄마의 설득, 협박, 애원, 넋두리....

"엄마, 나 정말 지금 선 볼 시간 없어. 이번 주말 바쁘다구"

"넌 다른 말은 잘 들으면서 선 보라는 말만 하면 이렇게 애를 먹이냐."

"그러니까 엄마가 양보해 줘야지. 다른 말은 잘 듣는 애가 이 정도 싫다고 하면 엄마도 한 번쯤 져줘야 하잖아."

"한 번쯤? 이게 한 번쯤이야? 이게 도대체 몇 년째냐. 엉? 내가 니 올케들 보기가 민망해. 너보다 어린 사람들이 들어와서 저렇게 아들 딸 낳고 사는 모습 보면 뭐 느끼는 거 없냐?"

"있지 왜 없어. 어린 나이에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잔말 말구 누굴 데려오던 지 이번 주말에 선을 보던 지 하나만 택해."

"엄마, 내가 누굴 데려가. 길거리에서 아무나 골라 데려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길거리에서 골라 데리고 올 능력도 없는 게  도대체 데려다 줘도 싫다는 건 무슨 심보냐? 결혼 안해? 평생 혼자 살거야? 너 지금은 아직 써주는 데가 있어서 그렇지 서른 살만 넘어봐라. 너같은 노처녀 누가 비서로라도 써준다니. 니가 학교 선생이길 해? 너 공무원이야? 대체 뭘 믿고 이러냐. 지금 그 나이에 선이라도 들어오니 아직 니가 한창인 줄 알지? 너 그러다 몇 년 있으면 재취자리야."

"엄마, 점점. 누가 들으면 계몬줄 알어. 제발 그렇게 말 좀 하지마."

"계모? 어떤 계모가 이렇게 전처자식 시집 못 보내 안달이라냐. 밖에 나가서 사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지. 쯧쯧...하여튼 나이 차서 결혼 안하는 것들 다 섬에다 가둬놓고 짝짓기를 시키는 법이라도 만들어야지. 너 하여튼 잔말말고 이번 주말에 올라와. 너 안올라오면 내가 니네 사장한테라도 전화해서 올려보내라고 할꺼야. 망신당하기 싫으면 알아서 해!!!"

엄마는 수아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갈수록 태산이고 사방에서 죽어라 죽어라 하는 형상이었다.

신은 견딜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수아를 너무 과대평가 하신 것 같았다.


사무실에 출근 하니 진영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수아를 바라본다.

어두운 표정의 수아가 안돼보이긴 하지만 아침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진영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수아도 진영의 묘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

"이번 주말 제주도, 취소할까요?"

"네?"

"어머니께서 이번 주말에 이수아씨 안보내 주면 큰일난다고 하시던데요?"

"어머니요? 우리 엄마 말씀이세요?"

"아침에 전화가 왔던데요?"


미친다.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

딸의 인생을 코미디처럼 만드신다.

"올라와서 선을 보게 해 주던지, 못 올려보내면 저한테 책임지고 결혼을 시켜주던지 양자택일 하라고."


-헉...설마 그랬을리가...

엄마가 아무리 급해도 이사님한테 그렇게 말했을리가 없다.

"농담...이시죠?"

"언제 내가 농담하는 거 봤습니까?"

수아는 진영의 표정에서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제가 책임지고 결혼문제를 떠맡을까요, 아니면 이번 주말에 선을 볼래요?"

수아의 곤란한 표정이 재밌다.

출근 길에 수아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사적인 문제로 부탁드리게 되서 정말 죄송하지만 자신도 거절할 수 없는 자리라 이번 주말에 꼭 좀 올라올 수 있게 선처해 달라는 정중한 전화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진영도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올려보내 드리겠다고 안심시킨 후 통화를 마친 참이었다.

수아는 하루종일 퉁퉁 부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사무실에 전화한다는 협박을 어제 오늘 한 것이 아니었지만 늘 공수표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전화를 하다니...딸을 망신시켜도 정도가 있지, 수아는 부글부글 부아가 났다.

'그'에게 받은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맞고 KO당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정말 못살아. 진짜 길거리에서 아무나 골라 데려갈까 부다.

선 한번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본 다음이다.

그 쪽에서 마음에 들어한다는 소리가 엄마 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가 바로 지옥이다.

그때부터 엄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정말 없다.

어떻게든 그 사람과 엮어야 한다.

결혼 준비에 바로 돌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아는 어떻게 해서라도 선을 보면 안된다. 어쩐다...

 

"엄마, 나야."

"......"

사장에게 전화한 것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대답이 없다.

"엄마...나 사실...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뭐? 그게 사실이야? 너 눈가리고 아옹하는 거 아냐?"

"아냐...근데 지금은 집에 데리고 갈 형편이 못돼서 그래. 아직 청혼을 받은 상태도 아니고 그렇게 편하게 데리고 갈 상황이 아니야.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잖아."

"야. 너 그 말 거짓말이기만 해봐. 그땐 정말 가만 안둬."

"거짓말 아니니까 안심해. 좀 더 진지하게 결혼얘기를 꺼내면 그 때 엄마랑 아빠한테 보여드릴께."

"뭐하는 사람이야. 몇 살인데?"

"좋은 회사 다니는 사람이니까 먼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이도 적당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너 왠지 수상해. 하여튼 다음 달까지야. 그때까지 안데려오면 너 내가 하라는 데로 다 해야돼. 알았어?"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제발 사무실에 전화해서 나 망신 좀 주지마. 나 쪽팔려서 회사 못 다녀."

"내가 무슨 망신을 줬다고 그래. 엄마가 그런 말도 못해?"

"알았어, 알았다구. 어쨌든 다신 사무실로 전화하지마."

"너나 잘해 이 기집애야. 하여튼 다음달이야. 이번만 두고 볼 꺼니까."

어쨌든 급한 불은 껐다.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 선을 본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꼴 밖에 안된다.

 

오랜만에 갖는 휴식이다.

진영에겐 서울로 간다 말하고 모처럼 혼자 주말을 맞았다.

서울로 올라가 비어있는 아파트로 갈까 했지만 그냥 부산에 남아 있기로 했다.

움직이는 것도 피곤했다.

진영이 제주도로 떠나면서 생각이 있으면 마지막 비행기라도 타고 내려오라고 했지만 사양했다.

사람들 목소리도, 차 소리도, 하물며 바람소리도 귀에 거슬리는 수아였다.


이렇게 조용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주말을 즐기고 싶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진영에게 뜻밖의 호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에서 알아주는 자산가로부터 컨설팅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진영이 계속 접촉을 시도하려 했던 자산가였으나 쉽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던 그는 진영의 서울에서의 평판, 회사의 신용도, 자문위원의 경력 등 진영과 사무실의 모든 정보를 자체적으로 조사한 뒤 진영에게 컨설팅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번 업무의 중요성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회사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었다.

고객으로 확보한다면 그가 지닌 부산에서의 영향력으로 볼 때, 많은 VIP를 확보할 가능성이 컸다.

서울과 부산이 공동 작업에 들어갔다.

한 달 가량 고객과 면담을 통한 자료수집과 분석, 방대한 분량의 솔루션을 제작했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 자문위원과의 회의가 이어졌다.

자산 포트폴리오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방대하지만 효율적이고 세밀한 솔루션을 제공받은 고객은 만족해 했다.

한 달하고도 보름 동안 진영과 수아에게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최대한 위탁 강의를 잡지 않았고 어지간히 급하지 않은 상담 건은 연기해 놓은 상태였다.

서울과 부산의 온 직원이 사활을 걸고 준비한 이번 프로젝트는 고객이 자산 관리를 정식으로 맡기면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

고객에게 정식으로 자산 관리를 맡기겠다는 연락을 받은 날, 모처럼 서울에 모인 동료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날 모두는 그 간의 공들을 서로 치하하며 모처럼 만의 화끈한 술자리를 가졌다.

 

계절은 이미 초겨울로 접어 들었고 해는 더욱 짧아졌다.

"이수아씨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입사한 지 반 년도 안되서 이런 큰 프로젝트를 잘 감당해 줘서 고마워요."

진영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수아는 실수없이 많은 일을 처리해 줬고, 진영이 놓칠 뻔한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관리까지 해 준 수아였다.

수아는 한 달 보름동안 체력이 많이 소진된 것 같았다.

이어지는 밤 샘 작업과 서울과 부산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왕래했다.

몸무게가 2kg이나 줄었고 잠을 자도 피로가 회복되지 않았다.

"한 3일 휴가 줄테니 부모님께라도 가서 쉬다 오겠습니까?"

수아는 부모님이라는 말에 그제서야 엄마의 전화가 떠오른다.

벌써 보름 째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시다.

다행이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아서 핸드폰에 걸려 온 전화만 겨우 한 통화씩 골라받는 수아에게 엄마는 성화가 대단했다.

지금 집에 간다면 아마 수아는 말라 죽을 것이었다.

"휴가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나저나 이사님께서도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이사님이야 말로 몇 일 쉬셔야 할 것 같네요."

수아가 내내 느꼈왔던 거지만 진영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진영과는 사적인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지만 그의 능력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긴 수아였다.

오늘 자세히 진영을 보니 많이 야윈 것 같았다.

수아는 자신보다 진영이 걱정이었다.

"그럼 우리 저 번에 못갔던 휴가나 다녀 옵시다."

이 직업을 갖게 되면서 한 번도 사적인 휴가를 다녀온 적 없는 진영이었다.

일이 곧 휴가였고 활력소였다.

그러나 진영도 많이 지쳐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해외여행이라도 보내주고 싶지만 이번엔 간단하게 제주도 한 번 다녀와요. 호텔 예약해 줄 테니까 경비걱정은 말고."

진영의 호의에 수아는 날아갈 것 같았다.

혼자하는 제주도 여행이라...수아의 마음은 벌써 제주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여름에 갔으면 좋았겠지만 뭐 지금도 상관없었다.

원래 해수욕에 취미가 없는 수아였기에 그냥 눈으로 하는 관광만 하면 되었다.

한가지 불편한 점은 여름보다야 짐이 좀 무겁다는 거였다.

수아는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떠날 것이다.

진영의 마음 씀에 고마움을 느끼며 흥분되는 마음으로 밤을 설치는 수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