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다.
레인코트 차림의 진영이 들어선다.
"오늘 저녁에 있는 상담 확인 전화 했습니까?"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아가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다.
"아, 네. 방금 전화드렸어요."
진영은 '그'를 본 후 내내 저런 멍한 표정을 지어대는 수아가 마뜩찮다.
질퍽거리는 건 딱 질색이다.
그게 어른이건 아이건, 여자건 남자건...
그래서 요즘 진영의 말투가 곱지 않다.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 수아였다.
창가로 미끄러지듯 흐르는 비는 건조한 사무실의 공기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멍한 상태에서도 할 일은 다 해놓는 수아에게 진영은 화를 낼 수도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그것이 더 화가 난다.
여자는 동시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동물이라더니 대단하다 싶었다.
사람을 잊고 일에 몰두하던가 일을 내팽겨치고 사람에게 몰두하던가 그것이 진영의 스타일이었다.
물론 일을 내팽겨치고 사람에게 몰두했던 적은 그녀의 결혼소식을 접했던 단 몇 일 뿐이었다.
띠리리...사무실을 적막을 깨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재무설계사 강진영 사무솝니다."
.....무슨 전화인지 듣고만 있는 수아...
"...네. 그럴게요."
전화를 받은 후 수아는 더욱 멍해졌다.
업무전화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상담을 마치고 나오며 수아는 차에 오르지 않았다.
"이사님, 저는 여기서 퇴근할께요. 먼저 가세요."
또 그 녀석에게 가는 것일까..
상담이 생각보다 길어져 벌써 시계는 열 두시를 향하는 중이다.
진영은 한참을 차 안에 앉아 우산 속 수아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바라본다.
수아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다.
진영은 자신도 모르게 택시를 따라가고 있었다.
열 두시가 겨우 넘은 시각인데 bar의 간판이 꺼진다.
수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욱이 close팻말을 건다.
"문은 왜 닫으세요?"
"손님도 없고 가을비도 추적추적 오는데 그냥 둘이서 술이나 마시려고..."
정욱은 양주 한 병과 과일을 접시에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너희 사장, 잘 나가는 사람이라며?"
빈정거리는 말투다.
"저도 잘은 몰라요. 이 쪽 일은 처음 접해보던 거라서..."
"자, 한 잔 해라."
수아는 적지 않은 양의 양주를 단숨에 마셔버린다.
"너 원샷하는 버릇 여전하구나. 하하하"
정욱이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채운다.
"사장이 널 좋아하는 거 같던데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천박한 말투...낯설다.
"무슨 말이 그래요, 아녜요, 그런 거."
"그래? 내가 잘못봤나?"
정욱의 비웃음섞인 말투...
"그래, 다른 애들은 다 잘있지?"
두 사람은 동문회 사람들 근황을 얘기하다 어느 새 양주 한 병을 비운다.
정신력으로 버티던 수아의 눈에 정욱의 얼굴이 빙글빙글 돈다.
"우리 연애나 할까?"
정욱이 불쑥 수아에게 묻는다.
정신이 확 들면서 마음에 커다란 파장이 이는 수아...정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정욱이 옆자리로 다가와 앉는다.
수아의 어깨에 걸쳐진 정욱의 팔...몸이 굳어버릴 것 같다.
정욱은 수아의 머리끈을 풀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린다.
수아는 정욱의 갑작스런 행동에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타들어 가듯 욕망을 가득 담은 정욱의 눈이 수아는 무섭다.
움직이려 했지만 술에 마비되버린 몸은 맘대로 되지 않았다.
다가오는 정욱의 입술...겨우 고개를 돌려버린 수아를 정욱이 힘껏 끌어당긴다.
뺨을 잡힌 수아는 이제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파르르 떨고 있다.
"왜그래? 너도 원하고 있었잖아?"
"형...이러지 마요...대화로 해요 우리."
수아는 정욱의 거친 숨을 느끼며 겨우 말을 꺼냈다.
"대화? 수아야, 우리가 지금 어린애들이야? 우리 나이에는 이런 게 바로 대화야. 영화나 같이 보고 교외나 나가서 차 마시고, 설마 그런 걸 아직도 연애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정욱과의 입맞춤은 수아가 늘 꿈꿔왔던 것이다.
부드러운 포옹, 감미로운 입맞춤, 지긋한 눈빛...하지만 지금 수아의 눈앞에 있는 정욱은 욕망에 사로 잡힌 야수같았다.
"형, 제발...이러지 말아요."
겁먹은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눈물을 본 정욱이 그대로 입술을 덮친다.
감미로운 키스도 사랑이 담긴 손 길도 아니었다.
빠져나오려 할 수록 정욱의 팔이 더욱 강한 힘으로 수아를 끌어안는다.
쏟아지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수아는 첫사랑인 '그'에게 처음으로 입술을 빼앗겼다.
"쾅"
갑작스럽게 들리는 문소리에 정욱이 뒤돌아 본다.
퍽...고개를 돌리자 마자 날아오는 주먹...휘정거리며 의자에서 떨어지는 정욱.
진영의 등장에 수아는 수치심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뒤따라나가는 진영의 등에 정욱이 한 마디를 날린다.
"수아...사랑하죠? 끝까지 지켜주세요. 너무 약한 아입니다."
진영은 다시 돌아와 쓰러져있는 정욱의 복부에 힘껏 발길질을 날린다.
"욱.."
의자에 있던 수아의 핸드백과 우산을 들고 뛰쳐나온 진영은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수아를 향해 달려갔다.
손목을 잡힌 수아가 맹렬한 힘으로 뿌리친다.
"이수아!"
빗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수아의 얼굴.
진영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진영이 수아를 끌어안는다.
맥이 풀린 수아, 그대로 진영의 품에서 기운을 잃고 쓰러진다.
몇 차례, 먹은 술을 개워 낸 수아가 평온한 얼굴로 잠들었다.
진영은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수아...사랑하죠? 끝까지 지켜주세요. 너무 약한 아입니다.'
정욱의 말이 머리속에 맴돈다.
알만한 정황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에게 저렇게 상처를 주다니...진영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신경질 적으로 담배를 비벼껐다.
수아는 자면서 꿈을 꾸는가 눈에 자꾸 눈물이 흐른다.
진영은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준다.
사랑스럽다.
아무도 이 여자에게 손 대는 것이 싫다.
이 여자를 울리는 것도 이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다.
영원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수아를 숨겨두고 싶은 진영이다.
협탁 위에 올려진 수아의 가방에서 mp3 이어폰이 보인다.
진영은 mp3를 꺼내 이어폰을 꽂았다.
버튼을 누르자 수아가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
.
.
.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준
좋은사람 생기더라 음-오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보여
후회는 없는걸
그 웃음을 믿어봐
믿으며 흘러가
가수의 허스키하고도 상대를 다독이는 듯 한 보이스가 진영의 마음을 달래준다.
수아는 자신의 사랑을 잊게 만들었다.
진영이 거부하려 했지만 수아를 향한 마음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지켜주고 싶다...
진영은 수아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깨질 듯한 두통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어제의 기억과, 추스릴 수 조차 없는 몸...이대로 시간이 정지해 버렸으면 좋겠다.
하늘이라도 무너져 버렸으면...아니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다.
꿈이기를 바라며 눈을 뜨기 싫었다.
10년 가까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보여주다니, 그 사람 때문에 자살까지 기도하려 했었다.
10년 세월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든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고 되돌리고 싶었다.
억울함...모욕...분노...증오...무슨 단어로도 지금 수아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수아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몇 시쯤 되었을까.
-아...출근해야 하는데...오전 상담!
띠리리...1분 간격으로 울리는 메시지 도착음을 이제야 듣게 된 수아가 놀라서 시계를 본다.
11시다. 상담 약속시간이었다.
겨우 눈을 뜬 수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8시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오전 상담은 혼자 갈테니까 쉬고 있어요]
휴...어제 진영의 품에서 쓰러졌던 것이 기억난다.
진영이 갑자기 bar로 들어서더니 '그'의 얼굴을 쳤고 수아는 뛰쳐나왔다.
진영이 그 곳에 왜 왔는지 수아로서는 알 수 없지만, 진영이 아니었으면 더 극한 상황까지 끌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근 걱정으로 잠시 정신이 들었던 수아는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아악~~~"
악몽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 장소...물가...허우적대는 여학생...
뛰어들어가 여학생을 구하는 남자...
물을 토해내며 간신히 눈을 뜬 여학생에게 무자비하게 입을 맞추는 남자...얼굴이 일그러지며 흉하게 변해버리는 남자...
"이수아씨, 정신차려요. 이수아씨."
거칠게 어깨를 흔드는 손. 수아는 눈을 번쩍 뜬다. 온 몸이 땀 투성이다.
"괜찮아요?"
진영이 애잔한 얼굴로 수아를 바라본다.
"이사님..."
겨우 몸을 일으킨다.
그제야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진영의 방이었다.
수아는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일단 약이라도 먹어봅시다. 속 불편한 거랑 두통은 좀 가라앉을 겁니다."
수아는 진영이 건네준 약을 먹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수아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어지러워 휘청거리려는 몸을 정신력으로 일으켜 세웠다. 협탁에 있는 가방을 들었다.
"좀 씻어야 겠어요."
수아는 최대한 등을 세우고 문 가로 걸어갔다.
진영은 수아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지금 감정을 배려해야 했다.
수아는 손잡이를 잡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고마웠어요."
직장 상사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수아는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얼굴을 어떻게 쳐다볼지 걱정이었다.
샤워를 마친 수아는 출근 준비를 했다.
약기운이 아직 돌지 않아서인지 두통이 심했다.
띠리리...
[샤워 끝나면 전화하세요]
수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를 했다.
"나갈 수 있게 준비해요. 편하게 입어요."
수아는 정장을 입었다.
눈이 퉁퉁 부어 얼굴이 가관이었다.
핼쑥해진 볼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묶지 않았다.
수아가 현관을 나서니 진영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수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뒤를 따랐다.
창피하다고 안 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진영이 데리고 간 곳은 해장국 집이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속이 편해지니까 반 이상은 먹도록 노력해봐요."
수아는 자신이 동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 착잡했다.
말을 하기도 창피한 수아는 꾸역꾸역 밥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먹네요."
진영이 다행이라는 듯 말한다.
수아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번 주말에 제주도에서 협회세미나가 열려요. 제주도 여행 제대로 해 본 적 있어요?"
"그냥 두어번 갔었어요."
"같이 갑시다."
"제가요? 제가 거길 따라가서 뭐하게요. 협회 회원들 모임에..."
"그냥 일년에 한 번 있는 형식적인 모임이니까 괜찮아요. 끝나고 제주도나 한바퀴 돌고 옵시다. 거절하지 말아요."
진영이 거절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니 수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기분으로 직장 상사와 제주도를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