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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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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17

수아를 바라보는 진영의 표정이 마뜩찮다.

수아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이유를 모르니 또 왜 저러나 하는 마음이다.

저녁을 먹고 친구 한 명이 새로 생긴 bar에 가보자며 일행을 몰고 갔다.

수아는 정말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 중에 제일 괄괄한 '부산남자'가 옆에 딱 붙어 놓아주질 않았다.


"생긴 지 얼마 안됐는데 아는 놈 후배가 하는 곳이야. 분위기도 독특하고 골때리는 사장녀석 얼굴 보는 재미도 있다. 피어싱을 얼마나 해댔는지 얼굴이 벌집이야. 그래도 그 녀석이 음악듣는 안목이 있어서 음악만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오셨어요? 형님 지금까지 있다가 나갔습니다."

남자들의 어깨너머로 사장의 옆모습이 보였다.

말마따나 귀에 몇 개인지 모르는 귀걸이가 달려있었다.

남자들이 움직이자 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수아가 흠칫 놀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남자들이 구석 창가에 앉을 때까지 수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 할 수 없었다.

"수아씨 뭐 합니꺼. 빨리 오이소."

사장이 메뉴판을 펴서 내려놓다 말고 뒤를 돌아본다.

놀란 눈으로 수아를 바라보는 '그'

소금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서 있는 수아.

"뭐야, 두 사람 아는 사이야?"

bar로 데리고 온 친구가 '그'에게 묻는다.

"예, 대학후배에요."

'그'가 수아에게 다가온다. 코에도 피어싱을 한 '그'.

수아의 기억속에 '그'가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갑작스런 만남에 준비해 놓은 말이 없었다.

수아는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로 겨우 말한다.

"언제 한국에 왔어요?"

"두 달 쯤...잘 지냈어?"

"네...난 아직도 일본에 있는 줄 알았어요."

"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까. 부모님도 아직 일본에 있는 줄 아시거든. 형님 저 수아랑 잠깐 얘기 좀 나누겠습니다."

'그'는 빈 자리를 가르키며 수아에게 앉으라는 손 짓을 한다.

"부산에는 왠일이야? 놀러왔니?"

"아뇨...이곳에서 일해요."

"그래? 어떻게 부산까지 내려오게 됐어?"

"지사에요. 서울서 근무하다가 이곳에 지사가 생겨 내려왔어요."

"넌 임마 편지 한 통이 없더라."

'그'는 자신에게 실연당한 여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한다.

"......형이 이렇게 매어있는 일을 한다니...좀 의외에요."

'그'의 말에 화가 난 수아가 겨우 받아치는 소리다.

"그래? 하하하...종종 술 마시러 와라. 오랜만에 후배보니까 반갑다."

진영은 '그'의 웃음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남자와는 달이 수아는 미동이 없다.

침울해 보이기 까지 하는 그녀...

편안한 표정의 남자와 굳은 표정의 여자...

진영의 눈에는 '그'가 상처입은 새를 가지고 장난치는 짖궂은 사내녀석으로 보였다. 

친구들이 소근거린다.


뭐 있는 사이 같지? 

수아씨 얼굴 좀 봐라. 눈을 못 쳐다보고 있잖아.

수아씨가 좋아하는 녀석인가본데?

 

진영이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수아씨, 그만 갑시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아가 놀란 눈으로 진영을 바라본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정쩡한 수아를 손목을 잡고 화난 듯 나서는 진영을 '그'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본다.

어이없이 바라보는 친구들...


"처리해야 할 일이라뇨?"

얼떨결에 끌려나온 수아가 아직도 손목을 잡힌 채 진영에게 묻는다.

"그런 일 없어요."

화난 듯한 진영의 눈매가 이해할 수 없는 수아다.

"그런데 왜..."

"갑시다."

진영은 수아의 손목을 잡은 채 택시를 잡았다.

진영이 아까부터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는 수아는 멀뚱하게 차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슬며시 손목을 빼려는데 진영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준다.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사님...저 손목이...너무 아파요."

수아는 손목을 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바보같다.

"이수아씨."

어둑해진 사무실에 창 밖의 가로등 불 빛이 새어 들어왔다.

"네."

수아는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하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진영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그렇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입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그 사람, 수아씨가 말했던 사람입니까? 그 상상통?"

수아가 놀란 눈으로 진영을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을까...수아는 머리가 혼란스럽다.

"남들이 딱 봐도 알겠던데?"

갑자기 반말이다. 수아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오른다.


"이사님,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구요, 어쨌거나 제 사적인 문제로 이사님이 이렇게 행동하시는 거 저 불쾌해요. 얘기하고 있는 사람 이렇게 맘대로 끌고 나와서 지금 저랑 장난치세요?"


수아가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진영을 쏘아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수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다.

자신이 그곳에서 수아를 끌고 나온 것이나 이렇게 화내는 것을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

수아는 '그'를 만난 것도 주체하지 못해 놀라 쓰러질 판인데 진영까지 자신한테 황당하게 구는 것이 어이없었다.

하지만 지금 더 이상 화낼 기운이 없었다.

'그'를 만난 후 부터 심장이 울렁거려 서있을 힘조차 없었다.

수아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한다.

왜 우는 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냥 모든 것에 화가 났다.

태종대에 가서 진영의 친구들에게 끌려간 것 부터 '그'를 만나 허둥대던 자신의 바보같음,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진영에게 끌려나온 것 까지 모두가 화가 났다.

이 사람 저 사람 장단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한참을 운 수아가 벌떡 일어난다.

휘청거리는 수아를 부축하고 싶지만 그냥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진영.

수아는 그런 진영을 지나쳐 사무실을 나왔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밤까지 있을 생각으로 나오지 않아서 반팔 차림이었다.

수아는 한 참을 걸어가다 멈춰 섰다. 뒤를 돌자 진영이 서있다.

수아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바다 보러 가실래요?"

 


모래사장에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바다만 바라봤다.

진영이 양복 저고리를 벗어 수아를 덮어준다.

"이사님...저 담배 한 대만 주실래요?"

진영은 담배를 꺼내 수아에게 건내고는 불을 붙여줬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수아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

"대체 한양그룹 연수원에서 만난 사람은 누구고, 아까 그 사람은 누굽니까?"

"......"

"두 사람 모두 이수아씨가 사랑했던 사람들입니까?"

진영은 왜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화가 난다.

수아는 대답이 없었다.

말없는 그녀가 진영에게는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제가 너무 바보같아서 안 겪어도 되는 고통을 겪는 것 같아요."

수아 목소리가 건조했다.

"싫다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잊지도 못해서 힘들어 하고...이사님처럼 독하게 증오할 줄도 모르고...이렇게 만나도 다시 마음이 흔들리고...또 상처받고..."

"아까 그 사람...아직도 사랑합니까?"

"...아니요...이젠 사랑이라고 말할 자신도 없어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한테 너무 어려운 사람이었나봐요. 거위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대상이 어미로 각인되는 것처럼 그 사람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냥...사랑이라고 각인되었나 봐요.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었어요."

진영은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질투와 적의를 느꼈다.

언제까지 수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참아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열병...수아는 일요일 하루를 꼬박 앓았다.

'그'의 갑작스런 귀국, 우연한 만남, 낯설게 변해버린 '그'

상대적인 추억이 있어야 사랑은 아름다운 법이다.

수아는 실연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생각했고 실행했고...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20대의 사랑을 모두 소진했다.

그러나 '그'는 수아의 사랑에 아무런 추억이 없어 보인다.

'그'는 수아의 마음을 받지 않았고,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그 만큼 수아의 사랑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목숨까지 걸고 싶었던 사랑을...그 사랑은... 모른다한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수아 마음속에 거대한 탑이다.

길들여 진다는 것...감정의 습관화...수아에게는 너무 커다란 형벌이었다.


진영은 일주일 내내 퇴근하자마자 최면에 걸린 듯 어디론가 사라지는 수아를 생각했다.

그녀의 행선지는 뻔할 것이었다.

그녀의 성격에 bar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위만 맴돌것이다.

그 날 밤 진영이 보았던 '그'는 무질서해 보였고 무책임해 보였고 한 번도 목표를 세워 땀과 눈물을 흘려본 적 없는 인생의 방관자였다.

그의 시니컬하고 보헤미안적인 겉모습에 정석대로만 살아왔던 순진한 여학생이 걸려든 꼴이었다.

진영은 차라리 수아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여자이길 바랬다.

그렇다면 스스로 저렇게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되고...진영 역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bar에 가까워지자 수아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또 오고야 말았다.

창문 안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돌아서기위해 한 시간 되는 거리를 일주일째 걸었다.

-바보...들어가지도 못할 곳에 이렇게 와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수아의 눈은 이내 테이블에 비스듬히 서있는 '그'에게 꽂혀있었다.

그동안 한번도 자세히 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수아는 원이라도 풀 듯 하염없이 바라본다.

또 다시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은 머리카락, 공허한 눈 빛, 한번도 자신에게 건네준 적 없던 가늘고 긴 손가락...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커다란 선물가게에 수아가 갖고 싶어하던 인형이 있었다.

아이에게 사주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라 알뜰했던 엄마의 지출사항에서 삭제되어버린 그 인형은, 등하교하는 수아의 발목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어릴 적에도 조르는 일이 별로 없었던 수아는 가격을 들은 엄마의 안된다는 한마디에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쇼윈도의 인형이 사라지던 날, 수아는 그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 후에 부모님이 사주는 어떤 인형에도 눈 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찮은 인형에도 마음을 주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이 수아였다.

하물며...첫 사랑이다.

 


오늘도 수아가 bar코너에 서서 안을 바라보고 있다.

답답한 녀석.

정욱은 일주일 째 저렇게 얼굴만 보고 사라지는 수아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사랑스럽던 수아...10년 전 물 속에서 건져진 후 하얗게 질려있는 수아를 본 순간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보호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갓 태어나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는 강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늘 사랑스럽게만 생각했던 후배가 어느 날 뜻밖의 고백을 해왔을 때, 정욱은 장난처럼 받아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정욱의 애인...잠시 수아에게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정욱은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아는 자신의 냉정한 태도에도 쉽게 포기할 줄 몰랐다.

그렇다고 자신을 귀찮게 하거나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냥 저렇게 늘 바라만 볼 뿐이다.

그게 정욱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실을 말해줄 것인지...극단의 다른 조치를 취할 것인지...저렇게 매일 찾아오는 수아를 보며 정욱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