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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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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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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17

마음이 답답했다.

진영의 냉소적인 성격과 독설, 무표정하고 여자에게 무신경했던 이유가 여자에게 받은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생각이 맞다면 지고지순한 순정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에게 받은 상처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남자.

자신이 겪었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받고 일에 올인한 남자.

수아는 차라리 자신도 진영같이 독한 사람이길 바랬다.

시골의 밤은 적막하고 칠흙같았다.

 


진영과 수아는 일요일 오전강의를 위해 새벽밥을 먹고 출발했다.

어제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은 후 수아는 진영의 냉소와 독설을 이해하기로 했다.

같은 처지까지는 아니어도 자신 역시 슬픈 실연의 기억이 있으니까...

"이사님, 신회장님 건은 어떻게 하실지 여쭤봐도 돼요?"

"원칙데로 해야겠지요."

"이사님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분 같던데..."

"눈앞에 이익을 쫒다보면 결국 큰 것을 잃어요. 소탐대실...지금 당장에야 영향을 받겠지만 원칙을 놓치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게되요."

"...네."

 


진영과 수아는 일주일간의 동행으로 둘 사이의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오늘 돌아가면 이틀 간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푹 쉬면서 시험 준비하세요."

 

수아는 샤워를 한 후 오래 참아왔던 담배를 피웠다.

새로 시작한 일이 정신없게 돌아가며 피곤을 누적했지만 상사에게 점점 신뢰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상하지는 않지만 직원을 든든하게 울타리 안에서 지켜줄 것 같은 예감, 지금 껏 모셔왔던 다른 상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수아는 진영에게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싫다는 생각에 피곤한 몸을 추스리고 공부에 열중하기로 했다.

 


열흘 만에 출근한 사무실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무실에 무슨 일 있었어?"

지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신회장쪽에서 안좋은 움직임이 있으신가봐요. 이사님 뿐 아니고 다른 설계사분들  VIP까지 다른 사무실로 이적하시는 눈치에요. 난리도 아닌가 봐요."

일은 수아가 상상했던 것 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수아는 호출을 받고 진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부는 잘 되고 있습니까?"

진영은 의외로 여유로워 보인다.

"...네"

"음..당분간 강의스케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VIP고객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있고 설계를 의뢰했던 가망고객들도 약속을 미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힘들겠지만 지방 출장이 당분간 잦을 겁니다."

"......"

"내일부터 대구와 부산쪽에 강의가 있습니다. 3일이 될 지, 일주일이 될 지 그 쪽에도 상담이 들어와 있으니 넉넉하게 준비해서 떠납시다."


장기전이 끝나자마자 다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 수아는 성호에게 연락을 해야 할 지 고민스러웠다.

꼭 연락하라는 성호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하지만 더 이상 성호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성호가 급하면 먼저 연락을 할 것이지만 그마저도 받고 싶지 않았다.


대구 쪽 상담이 연기되면서 이틀이라는 시간이 나게 되었다.

이틀 후 부산에서 오전 강의가 잡혀 있는 상황이라 진영은 부산에서 이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진영이 개인적으로 친구들을 만나거나 사무를 볼 때는 수아 혼자 공부도 하고 해운대에 나가 인파를 구경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진영의 친구 초대로 식사를 대접받았다.

수아의 발랄하고 싹싹한 성격에 식사자리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수아씨 덕분에 진영이 녀석 성격개조좀 하겠어요. 여자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 부터가 일단 장족의 발전입니다."

"제가 무슨 여잔가요? 그냥 고용인인데요 뭐."

"색깔이 확연히 다른 사람과 다니니 아마 염색좀 되겠죠. 하하하."

진영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식사는 자연스레 술자리가 되고 있었다.

"진영이 너 당분간 이 쪽에서 일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곳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어. 니 직업을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고. 지금 위쪽 상황이 그렇다면 이곳에 출장소처럼 내는 게 어때?"

"나도 생각중이다. 이쪽 업계에서도 부산이나 대구쪽으로 진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탐색중이지. 니가 사무실 하나 빌려준다면 생각해보지."

"뭐 나야 임대료만 받으면 그만인데 그게 뭐 어렵냐. 하하하"

친구 중 하나가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고 수아는 더 이상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사양했다.

"아니 여자없이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십니까? 수아씨 때문에 오늘 자리로 이렇게 길어진 거에요. 저 녀석이랑 마시는 거면 아까 끝냈죠."

"아니에요. 전 이만 들어가서 쉴께요.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저 없이 편하게 보내세요."

"수아씨가 있어야 편하다 아입니꺼. 서울말 쓰는 아가씨 보이까 내 억수로 좋다 아입니꺼. 같이 가소. 서울 여자들 다 이렇게 튕깁니꺼."

진영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수아는 난처해서 진영에게 도와달라는 눈 짓을 했다.


"그냥 같이 갑시다."

진영은 한 마디 툭 던지며 먼저 일어났다.

친구들은 무대뽀로 수아의 등을 떠밀었다.

 

 

"자 우리 수아씨 노래 한 번 해보이소. 얼굴 만큼 노래도 잘 하나 함 봅시다."

-아이고 올 것이 왔네

노는 건 빠지지 않는 수아였지만 처음 보는 남자들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건 큰 곤욕이었다.

말 들만 신나게 논다했지 다들 조용조용 점잖게 노는 사람들이었다.

-뭐 나이가 있으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댄스곡을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수아는 자신의 애창곡을 불렀다.

노래 실력은 별로 없었지만 노래방에서 워낙 갈고 닦은 곡이라 이 노래만큼은 자신있게 부를 수 있었다.

 

언젠가 마주칠거란 생각은 했어 한 눈에 그냥 알아 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 변한게 없는 너

가끔 서운하니 예전 그 마음 사라졌단게

예전 뜨겁던 약속 버린게 무색해 진데도

자연스런 일이야

그-만 미안해 하자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준

좋은사람 생기더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보여 후회는 없는걸

그 웃음을 믿어봐  믿으며 흘러가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 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남은 너

잠신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준 좋은사람 생기더라 ~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보여 후회는 없는걸

그 웃음을 믿어봐


먼훗날 또 다시 이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

그때도 알아볼 수 있을까

라라라 라라라

이대로 좋아보여  이대로 흘러가

니가 알던 나는 이젠 나도 몰라

라라라 라라라~


"이야, 무슨 노래가 그렇게 애절합니까?"

"그러게요, 노래 차암 좋네요."

친구들 박수 소리에 수아는 으쓱했다.

"제가 노래 좀 하죠?"

하하하...

진영이 노래 중간에 계속해서  양주를  들이키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일행들과 헤어진 두 사람은 숙소를 잡기 위해 폭죽이 터지는 해운대 백사장을 걸었다.

새벽이 되어도 해운대는 잠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친구들이 집에서 자고 가라는 것을 진영이 극구 마다했다.

친구들은 둘이 좋은 시간 보내라는 둥 짖궂은 농담을 날리며 돌아갔다.

진영은 해운대가 소란스럽다는 이유로 대리운전을 불러 송도쪽으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송도는 해운대에 비해 조용했다.  

바다를 바라보던 진영이 그제야 말문을 연다.

"아까 했던 노래 한 번 불러줄 수 있어요?"

"네? 여기서요?"

가까이 보니 진영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어려운 부탁이면 됐어요."

무반주로 그 노래를 부르다니...부르는 사람 보다 듣는 사람이 괴로울 것 같았다.

"mp3에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아니 이수아씨가 그냥 조용히 불러줬으면 좋겠군요."

수아는 잔잔한 밤바다를 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바다에서 수아의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진영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다.

 

수아는 자신의 감정에 취해 노래를 부르다 눈물이 흘렀다.

또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진영이 볼새라 얼른 손가락으로 닦아낸다.


"이수아씨는...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질 수 있다고 믿나요?"

진영에게 처음 받아보는 사적인 질문이었다.

아니 저런 정서의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진 않지만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왜 믿고 싶지 않지요?"

"음...그걸 말씀드리려면 제 아픈 과거를 들춰내야 해서...좀 곤란한걸요?"

수아는 너무 진지해진 진영을 생각해서 장난기섞인 대답을 했다.

"후웃...그래요? 이수아씨도 아픈 과거가 있었나요?  전에 차안에서 sea of heartbreak를 해맑게 따라부르길래 실연의 아픔같은 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헉...내가 따라불렀나?

"제가 노래에 감정이입이 잘 안되나봐요."

진영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선배 한 명이 이런 말을 해준 기억이 나요. 실연의 아픔을  오래동안 느끼는 사람은 일종의 상상통을 겪는거라구...왜 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한동안 없어진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잖아요?"

"상상통이라...그럴 듯한 표현이군요...이수아씨도 지금 상상통을 앓고 있나요?"

"전...모르겠어요. 완전히 잘려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아픈 걸 보면 아마 저도 상상통이 의심되네요. 후후.."

수아가 자조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수아씨같은 사람을 버리다니 그 남자 바보같군요."

수아는 귀를 의심했다.

"이사님께서 제게 점수를 후하게 주셨나봐요. 남자들이 저 같은 여잘 별로 좋아하지 않는걸요."

"저 같은 여자?"

"그냥 친구처럼 동생처럼 편한 여자요.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 여자...후후...너무 잔인한 말이죠?"

진영이 갑자기 수아의 머리카락을 묶은 끈을 풀었다.

수아가 놀라서 진영을 바라본다.

장난스런 눈빛의 진영이 수아의 놀란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풀고 다녀요, 여자처럼 느껴지게..."

다른 사람이 했으면 수작거는 불쾌한 행동으로 느껴질 행동이었다.

그러나 늘 진지하던 진영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자 수아도 그냥 배시시 웃어 넘긴다.


"이사님 술주정 귀여우세요"

무안한 수아가 한마디한다.

"하하하"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는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대학때부터 사귀는 여자가 있었어요. 유학도 함께 갔구요. 7년간 떨어져 본 적이 없었어요. 돌아와서 밤낮없이 일에 빠지면서 여자에게 당연히 소홀하게 되더군요. 그때는 소홀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애요. 보름가까이 전화만 하고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는 유지될 거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애요.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되던 해 그녀가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단순히 여자의 불평 정도라 생각했어요. 친하게 지내던 선배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미친 듯이 달려간 내게 그녀가 던진 한 마디가...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여기까지야...였어요. 나와의 헤어짐에 일말의 후회도 없는 표정...악마를 보는 듯 했어요...그녀와 함께 한모든 날들이 사라졌고 계획한 미래가 사라졌어요...그때부터...그녀를 증오하는 힘으로 살게 되더군요...그러고 보니 이수아씨가 친구처럼 동생처럼 편하다는 말이 틀린 말 같지는 않군요. 내가 이런 말 까지 하다니..."

수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수아씨에게 냉정하게 대했다면 아마 이수아씨를 여자로 봤기 때문일 겁니다. 왜 처음부터 이수아씨를 그렇게 봤는지...몇 일을 앓다 나온 사람이라 보호본능이 생겼는지도 모르겠군요. 그 본능을 억누르느라 더 차갑게 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자에게 제 자신도 모르게 적의를 느끼는게 실연의 후유증인가 보군요."

"냉정한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존경할 점도 많으시구, 무엇보다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니까..."

"고맙군요. 자 일어납시다. 방을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진영의 걱정대로 방을 잡는 일은 어려웠다.

휴가철이 막바지다 보니 방이 있어도 한 개 이상 내주려 하지 않았다.

진영이 전화로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쉽게 잡을 수 없었다.

결국 방 하나를 잡고 수아를 들여보낸 뒤 진영은 차에서 눈을 붙였다.

 

바닷가에서 몇번이고 수아를 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와 서둘러 자리를 뜬 진영이다.

옛 여자와 헤어진 후 처음 느낀 욕망이었다.

노래부르던 그 입에 입맞추고 싶었고 머리끈을 푼 것은 자신도 자제할 수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와 동행한 첫 출장부터 지금까지 몸이 피곤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걸 보면...어쩌면...그녀와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 또한 다른 여자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억지로 마음에서 밀어내려는 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