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 강의실 입구는 뒷 쪽에도 있었기 때문에 수아는 뒷 문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수아는 앞 좌석 부터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서 남자와 여자만 구분이 되었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그 때, 뒷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원들이 들어온다. 그 들 역시 뒷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수아는 찾는 일을 멈추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옆 좌석 사원들이 사복을 입은 수아를 힐끗 쳐다본다.
수아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성호가 있었다.
성호는 놀란 눈으로 수아를 바라본다.
-대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거지? 설마 나를 찾아온 건 아니겠지?
수아는 무표정하다.
성호가 다니는 회사라는 건 알텐데, 플래카드에도 신입사원 연수라고 적혀 있으니 이 강당에 성호가 있으리라는 것도 알 것이다.
하지만 수아는 무언가를 적는 것에 열중이다.
강의가 끝날 때 까지 성호는 수아를 바라보며 추억을 더듬었다.
같은 영어학원 수강생끼리 만든 모임이었다.
원어민 강사를 하나 두고 일주일에 두 번 만나 회화 위주로 스터디를 했다.
성호는 그 곳에서 수아를 처음 만났다.
예쁘지는 않지만 발랄하고 귀여웠던 첫 인상에 호감이 갔다.
수아는 다른 여자와 달랐다.
발랄했지만 대화할 때는 항상 들어주는 쪽이었고 진심으로 상대를 걱정해서 위로해주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번도 듣는 일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들어주는 그녀였지만 정작 자기 상황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아 본인 말로는 특별한 얘기거리가 없다고 했다.
구김살이 없었고 부지런했고 무엇보다 성호에게 편한 존재였다.
그 날, 수아의 고백에 성호는 무척 당황했다.
자신이 편해서 한 행동이 수아의 오해를 산 것이다.
오해...사실 오해는 아니었다.
성호 역시 수아를 좋아했고 정식으로 사귀어 보려 수아에게 고백하려는 날, '10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성호는 수아의 그 해바라기같은 짝사랑에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지만 정작 수아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성호에게 연애와 결혼은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바람피우는 사람은 그 이유가 어쨌던 혐오하던 성호였다.
그 결벽증에 다른 남자를 10년 간 마음에 간직해 온 여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일 수 있었다.
결혼하기는 싫어도 항상 옆에 있고 싶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자신을 떠날 때 까지 성호는 다른 여자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 날, 수아의 새로운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면...성호는 겉으로는 웃었겠지만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었다.
수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병적인 결벽증을 밤마다 자책하며 연수원에 들어오는 날까지 술독에 빠져있었다.
지금 수아가 성호의 옆에 앉아있다.
"식사하시고 가시죠. 저희 연수원 밥 맛 유명합니다."
담당자는 진영과 수아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진영은 정중히 사양했다.
"다음 스케줄이 급해서 빨리 출발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꼭 먹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스케줄은 없었다.
불편해 보이는 수아를 이 곳에서 점심까지 먹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진영은 서둘러 출발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수아야..."
진영을 뒤따라겄던 수아가 멈칫한다. 성호의 목소리...
"수아야..."
성호가 수아의 손목을 잡는다. 찌르르 전류가 흐른다.
"여기서 보네?"
수아는 표정관리를 하기 힘들었지만 애써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취직했구나. 좋아 보인다."
"응, 너도 좋아 보인다. 난 다음 스케줄 때문에 빨리 출발해야해. 그럼 다음에 보자."
"자..잠깐만, 지금 출장중이야?"
"응"
"언제까지니?"
"잘 모르겠어. 일주일 정도는 강의가 밀려있으셔서..."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래?"
-나한테 아직 할말이 남았니?
"그래, 담에 보자."
수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빠른 걸음으로 차를 향해 걸었다.
"수아야 꼭 연락해."
"이수아씨가 운전하세요."
"네?"
진영은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얼떨결에 운전석에 탄 수아는 조작법이 낯설어 어쩔 줄 몰랐다.
진영이 간단하게 조작법을 알려준다.
수아는 모르는 길을 진영의 설명으로 찾아가느라, 손에 낯선 차를 모느라 성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진영의 설명으로 간 곳은 작은 시골이었다.
논에 피사리를 하는 농부들이 보였다.
"이런 곳에도 연수원이 있나요?"
수아가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쪽 파란 지붕 보입니까? 그 곳에 세워요."
차를 세운 곳은 파란 슬레트 지붕의 제법 넓은 집이었다.
개들이 진영과 수아를 보자 경계하 듯 짖어대기 시작했다.
외양간에는 소 한마리가 꿈벅꿈벅 두 사람을 바라본다.
집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개가 짖는데 사람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진영은 양복 윗도리를 벗고 밖으로 나섰다.
수아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어졌다.
잠도 설친 상태에서 성호까지 만났고, 처음 몰아보는 고급차에 대한 부담감으로 몸의 근육이 단단히 굳은 것 같았다.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쬐는 여름 햇살을 맞으니 자기도 모르게 스스르 눈이 감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 닿는 손 길을 느끼며 잠이 깼다.
진영이 손수건으로 수아의 이마를 닦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데서 자면 더위 먹어요.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눈 좀 붙여요."
자는 모습을 들킨 것도 부끄러운데 진영이 땀까지 닦아 주며, 말투까지 부드러워 졌다. 잠은 확 달아났다.
그 때 할머니 한 분이 수건으로 몸을 탁탁 털며 들어왔다.
"아니 진영이 니가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할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걸어와 진영의 손을 덥썩 잡는다.
"근처에 강의가 있어서요. 아버지는요."
"논에 안계시냐? 새벽부터 나갔는데...요즘 니 아버지랑 나랑 얼굴 보기 힘들다. 난 과수원서 니 아버진 논에서...그래 점심은 먹었냐?"
"아뇨, 밥 좀 주세요. 먹고 와야 하는데 오는 길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집에 오는 사람이 왜 밖에서 밥을 먹어. 집이 코 앞인데.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냐?"
진영 어머니는 내심 기대하는 눈으로 수아를 쳐다보여 묻는다.
"안녕하세요. 이수아라고 합니다."
"사무실 직원이에요. 일이 많아 같이 다녀요."
어머니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래? 난 또...괜히 좋아했구나."
진영도 멋적게 웃는다.
수아가 부엌에 들어가서 점심차리는 일을 도우려 하자 어머니가 한사코 말린다.
"됐어요. 우리 진영이 따라 일하러 다니느라고 피곤할텐데 가서 앉아있어, 금방 차려 내갈테니..."
좌불안석인 수아를 진영이 부른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부엌에 들어오는 거 싫어하세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 말을 들으니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시골밥상이 다 이래요, 그냥 요기만 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요."
"아니에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먹고 왔어야 하는데...잘 먹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어서 들어요. 난 또 과수원에 나가봐야 하니까 먹고 상은 부엌에 그냥 나둬라."
"먹고 저도 과수원에 나가볼께요."
"됐다. 그냥 쉬어."
어머니는 주전자와 광주리를 이고 대문을 나섰다.
"그 밥 다 먹어야 합니다. 남기면 어머니가 싫어하세요."
시골 분 답게 밥을 수북히 담으셨다.
잠깐 잠든 사이에 체증이 내려갔는지 수아는 밥냄새를 맡자 심한 허기를 느꼈다.
밥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진영이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과수원에 같이 가볼래요? 아니면 나 혼자 다녀올테니 저 쪽 작은 방에 들어가 좀 누워있던지..."
"아녜요, 저도 같이 갈께요. 밥값은 해야죠."
배시시 웃는 얼굴이 연수원을 나올 때와는 딴 판이었다.
수아가 밥을 다 먹은 후 설겆이하는 모습까지 지켜 본다.
"커피나 한 잔 하고 나갑시다. 찬장 찾아보면 아마 커피믹스 있을 겁니다."
수아는 자기식대로 커피를 타서 내왔다.
"무슨 과수원이에요?"
"복숭아, 혹시 알러지 없어요? 있으면 일 못합니다."
"아니 없어요, 저 복숭아 굉장히 좋아하는데 잘됐다."
참 알 수 없는 여자다.
오전까지만 해도 세상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밥도 못넘기던 여자가 시골밥 한 그릇을 뚝딱 헤치우고 먹는 얘기에 신나하다니...
커피를 마시던 수아가 실없이 킥킥 웃는다.
"이사님, 집에 오시자마자 말투가 바뀌신거 아세요?"
"무슨 소리에요?"
"뭐뭐 합시다. 뭐뭐 할껍니까? 하시다가 뭐뭐 괜찮아요? 뭐뭐 할까요? 하시잖아요."
"이수아씨 표정 바뀐 것만 하겠습니까?"
-또 한 방 먹었네.
수아가 또 배시시 웃는다.
"하여튼 늘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얼마나 좋아요, 듣는 사람 기분 좋고 말하는 사람 기분 좋고."
"이수아씨 기분은 완전히 물레방아군요. 다 마셨으면 나갑시다"
-또 말투가 딱딱해지네. 아휴, 정말 독설가야...
수아는 과수원에서 인부들이 따서 나른 복숭아를 크기별로 분류하고 상처난 것이 있으면 따로 상자에 담았다.
"어머니, 복숭아가 제 얼굴만해요. 이렇게 탐스럽고 예쁜 백도는 처음 봐요."
"1등급 복숭아지. 거기 상처난 복숭아들은 어차피 시장에 싼 값에 내다 팔 거니까 먹으면서 일해요."
"우와, 정말요? 먹고 싶은 만큼 먹어요?"
"여기 복숭아는 처음 먹는 사람은 한 개 이상 못먹어요. 욕심내고 먹다가 탈 나지 말고 한 두개만 먹어요."
언제 왔는지 양 손에 복숭아가 담긴 양동이를 든 진영이 서있었다.
-아이고 저 남자, 나 없으면 입에 곰팡이 피겠어...
진영이 복숭아를 쌓아놓고 다시 나가자 수아가 얼른 복숭아 하나를 들어 껍질을 깐다.
"이야,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고 커다란 복숭아를 겨우 손톱만한 흠이 있다고 시장에 싸게 파세요?"
"그럼, 백화점에 들어가는 복숭아라 조금도 흠집이 있으면 안돼, 잘 보고 담아요. 그래 아가씬 올해 몇인가?"
"...저, 노처녀에요. 스물아홉이요."
"요즘 스물아홉이 뭐 노처녀야, 다 직장생활 하느라 결혼들을 늦게 하더구만. 그래 부모님은 다 살아계시고? 몇 째 딸인가?"
"세째 딸이에요, 위로 오빠 둘은 장가 갔구요, 부모님은 정년퇴직하신 후에 저희 대학 졸업 시키시고 바로 시골에 땅 사서 들어가셨어요. 뭐 크게 농사지으시는 건 아닌데 쌀 빼고는 거의 다 지으시는 것 같더라구요. 채소, 사과, 배, 감, 포도 등등 내다 팔 정도 규모는 아니구 조금씩 다 지으세요."
"막내딸이네. 그래서 이렇게 싹싹하가봐. 부모님이 농사지으시니 이런 일도 돕겠다고 나오고...우리 진영이도 빨리 장가를 가야 하는데 저렇게 일에 미쳐 있으니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 선도 싫다하고...지 누나들이 내노라 하는 집 처자들 들이밀어도 만나야 말이지. 누구 사귀는 눈치 없지?"
"글쎄요, 제가 입사한 지도 얼마 안되구, 이사님이 워낙 사적인 얘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집에 오시니까 말투도 부드러워 지신 거에요. 무서운 상사님이거든요."
수아는 비밀이라도 말하 듯 뒷 얘기는 귀에다 속닥거렸다.
"하하하...그러게 우리 진영이가 예전에는 안그랬는데...고등학교때 부터 기숙사있는 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말수가 적어지더라구. 무슨 오기로 그렇게 공부를 하는지 대학교도 장학금 받아서 들어가고 유학도 국비로 다녀왔자너. 그렇게 공부만 해대니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나 애가 말수도 적어지고...늦게 본 아들이라 애교도 부리고 그러면 좋으련만 영 파이야."
"와, 그래도 장학금으로 다녔으면 부모님께 효도 한 거네요. 전 좋은 대학도 아닌 학교 들어가서 4년 내내 장학금 한 번 못받은걸요, 참, 저 정희 대학동창이에요."
"아니 그래?"
"네, 그냥 조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대하세요."
"아휴...아가씨가 딱 우리 집 막내며느리였으면 좋겠네."
-헉...어머니...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저런 시베리아 얼음공장 사장과 살다가는 동상 걸려 죽어요
"하긴, 우리 진영이가 나이가 많으니 아가씨가 아깝네. 그치? 하하하.."
수아와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과수원을 울린다.
저녁을 먹은 후 진영은 수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책이 없으니 그냥 동영상 강의라도 들어요. 모르는 건 메모해 두었다가 이동할 때나 식사할때 나한테 물어보고."
"저 꼭 지금 봐야 하나요? 소화도 안됐는데..."
"그렇게 식사시간에 말을 많이 하고도 소화가 안됐어요? 듣는 사람이 다 소화될 지경인데. 하루하루 미루다 보면 더 어려워요. 매일 세시간은 공부에 투자하세요. 꾸준히 해야 맥을 놓치지 않아요."
진영은 수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나가버렸다.
-휴...정말 돌겠다. 사람이 쉴 틈을 안주네. 월급을 얼마나 많이 주나 두고 보겠어.
수아는 동영상 강의 파일을 열었다. 진영이 강의한 동영상이었다.
-웩...뭐야...
동영상 강의도 보고 진영이 정리해 놓은 자료를 읽다보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수아는 바람도 쐴 겸 문을 열었다.
평상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진영과 아버지였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린 상태라 수아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그 애를 못잊고 있다는 소리냐?"
"......"
"벌써 10년이 다 되가는 얘기 아니냐?"
"못 잊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남자 녀석이 그깐 일로 여자가 싫어져서 여태 결혼생각이 없다니 하는 말 아니냐."
"......"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사람밖에 치료해줄 수 없다. 니가 그렇게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상처가 그대로 썩는 거야.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니다. 그리고 사람...다 거기서 거긴거야."
수아는 두 사람의 얘기를 듣다가 살며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