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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 여부를 감지하는 센서 설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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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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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14

책을 묶고 있던 노끈을 풀며 수아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 나이에 다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생판 모르는 분야다.

투자? 세금? 부동산? 상속? 머리가 지끈지끈한 것이 무언가가 뇌를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비서한테 이런 공부를 시키는 상사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까짓 것 천천히 할 수 있다.

근데 시험이라니...정확히 여덟권이다.

평균 3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일주일안에 정독하고 3개월 안에 시험을 보라니...

게다가 상사는 일곱시까지 출근한다니 비서 역시 일곱시에 출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곱시에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와 하루에 한권씩 정독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아는 여덟권중에 가장 두께가 얇은 책을 폈다.

상속과 사업승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사례로 들어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수아는 내일 출근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5시30분. 새벽잠이 없게 키워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열흘간 잠을 설친 탓에 얼굴이 많이 푸석거렸다.

옅게 색조화장을 하고 머리는 단정히 묶었다.

다행이 사무실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일찍 서두른 탓에 20분 전에 도착을 했다.

 

사무실은 잠겨 있었다.

육중한 유리문 안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진영이 내렸다.

 

두사람은 가볍게 목례를 나누었다.

아이디카드로 문을 연 진영은 수아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곧장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는 진영을 보며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수아는 무슨 일 부터 해야 할 지 몰라 잠시동안 서있었다.

 

"차 한잔 할까요?"

진영이 방에서 나오며 멀뚱하게 서있는 수아를 보았다.

"탕비실은 저쪽입니다."

진영이 가르키는 곳은 진영의 방 맞은편에 있었다.

탕비실에 들어가니 여러가지 종류의 차가 있었다.

"뭘로 드릴까요?"

"같은 걸로 합시다."

"전 커피믹스 진하게 타서 먹는데요?"

수아의 생뚱맞은 대답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진영이 피식 웃는다.

"같은 걸로 하자니까요."

수아는 작은 커피잔에 믹스 두개를 넣고 물을 가득 부었다.

어색한 티타임이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이고 잘됐군

"거의 출장상담이 많은데 이수아씨를 항상 대동하게 될겁니다."

-헉...

"내가 고객들과 나누는 대화를 항상 보이스 레코더로 녹음하세요. 고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별로 묶어놓은 서류철을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될 거고, 스케줄 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객은 철저한 비밀유지를 해줘야 합니다. 밖에서 쓸데없이 고객들 얘기를 하고 다니는 일 없도록 하고...개인적으로 기사를 고용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수아씨가 운전해야 할 경우가 많이 생길겁니다. 고객들과 저녁에 만나게 되면 술한잔이라도 해야 되니까...그리고 주말에는 기업체 연수나 금융회사 직원들 상대로 강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지방에서 저녁에 강의를 하는 날은 늦게 돌아오거나 그곳에서 자야 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알아두세요. 이수아씨는 제 비서로 채용되었으니 이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다른 직원들의 업무는 돕지 않아도 됩니다. 차타는 일이나 복사 등도 제가 부탁할 때만 하면 됩니다."

"호칭은..."

"그냥 남들처럼 부르세요. 사무실에서는 모두 이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아, 네."

"오늘 책상이 들어올 겁니다. 업무야 차차 익히게 되겠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오늘은 우선 VIP고객과 D급 고객들의 프로필을 보게 될 겁니다. 될 수 있으면 오늘 하루에 명단과 간단한 프로필은 암기하도록 하세요."

"고객이 몇 분이세요?"

"오늘 신규 상담건까지 합해서 187명입니다."

-헉...187명의 이름과 프로필을 오늘 하루에 암기하라니, 이사람 지금 제정신이야?

"사진이 있으니 얼굴과 이름 혼동하는 일 없도록 합시다. 자 더 질문할 사항 있습니까?"

"아..아뇨."

진영이 남기고 간 커피잔에는 커피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무실의 책상은 모두 다섯 개였다.

여직원 책상을 제외한  네 개의 책상에는 CFP000 라고 새겨진 크리스탈 삼각명패가 놓여있었다.

여덟 시가 되자 한 명씩 출근을 했고 수아는 고객 이름 외우랴 인사하랴 종종거려야 했다.

수아는 오전 내내 고객의 이름과 프로필을 외우느라 뇌의 시냅스가 엉켜버릴 지경이었다.  


"오늘 점심에 외부약속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없으면 다 같이 나갑시다. 신입사원 환영회 겸 간단하게 먹고 들어오죠."


진영이 데리고 간 곳은 일식집이었다.

식사가 나올때 까지 사람들은 수아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진영을 제외한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고 특히 여직원은 수아의 대학 후배라며 반가워했다.

 

양치를 하고 들어오니 진영이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수아씨, 나갈 준비 합시다. 이건 앞으로 이수아씨가 가지고 다녀야 할 물품들입니다."

진영이 건네주는 상자안에는 소형 노트북과 보이스 레코더, 만년필등이 들어있었다.

"노트북에는 사적인 파일 올리지 않도록 하고, 만년필은 혹시 내가 분실할 경우 그것을 챙겨줘야 합니다. 자 나갑시다."

수아는 화장도 고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진영을 따라나섰다.


"길눈 밝습니까?"

시동을 걸며 진영이 묻는다.

"어두운 편은 아닌데요."

"이제부터 나와 함께 가는 곳은 잘 기억해 둬야 할 겁니다. 고객의 사무실, 음식점, 기업들 연수원 등...혹시라도 이수아씨 혼자서 찾아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수아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저 이사님..."

"말하세요."

"제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외우고 공부해야 하니 잘 할 수 있을지 많이 부담이 되거든요."

"입사할 때 그런 부담 안가지고 편하게 놀러나오는 사람 있습니까?"

-허억...시베리아 얼음공장이야...재수없어...재수없어...아니 어릴 적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는거야?

아니면 부모 잘 만나 어려서 부터 재수없게 큰거야? 은근히 잘난 척하고 어줍잖게 있는 척 해서 재수없던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밥맛이야.


"원래 그렇게 차가우세요?"

수아는 자신의 생각속에서 이어지던 말이 튀어나와 당황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진영도 황당한 표정으로 수아를 힐끗 바라보다 툭 내뱉는다.

"내가 이수아씨에게 부드러워야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런...말을 말아야지. 되로 주고 말로 받게 생겼잖아? 그래, 여자가 너보다 훨씬 더 차가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그래봤자 수아는 진영에게 고용된 직원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기업체 회장실이었다.

"강진영이라고 합니다. 네시에 회장님과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비서는 회장실로 두사람을 안내했다.

"하하, 어서오게 강군."

-크크크 강군이라니...수아는 졸지에 이사에서 강군이 되버린 진영이 고소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퇴원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뭐 노인네 건강이야 늘 그렇지, 작은 놈이 속을 썩여서 혈압이 좀 오른 것 뿐이야. 그래 요즘 하는 일은 다 잘되는가?"

"회장님 덕분에 많은 분들이 모자란 저에게 상담을 의뢰해 주셨습니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언제라도 필드에 나가실 일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껄껄껄...이 사람도, 내가 뭘 해줬다고. 자네가 나에게 하는 거에 비하면 그냥 작은 성의 표시일 뿐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늘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내가 고맙지, 그런데 저 아가씨는 누군가? 좋은 소식있어 소개시켜 주러 온거라면 아주 잘했어."

-할아버지, 지금 누구랑 엮으시는 거에요?

진영도 황당한 웃음을 터뜨리며 수아를 소개했다. 처음보는 웃음이었다.

"혼자 다니다 보니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 새로 채용한 사람입니다. 인사드려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수아라고 합니다."

"젊고 예쁜 아가씨랑 다니니 보기 좋구만. 여자라면 경끼를 하던 사람이 왠일인가?"

"하하, 제가 워낙 세심하고 꼼꼼한 것과 거리가 멀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아니 자네가 세심하지를 않아? 이 사람아, 양심 좀 있어보게. 자네한테 상담받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른다네. 자넨 덜 꼼꼼해도 돼."

두 사람은 잠시 담소를 나누더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번에 얘기했던 김회장 말인데, 오늘 만나기로 했다면서?"

"예, 회장님."

"음...사실 우리 막내가 그 집 아들과 만나고 있다는군."

"몇 째 아들 말씀이십니까? 6남매 중에 밑에 두 자제 분이 아직 미혼이라 들었습니다." 

"김회장이 얘기하겠지만...그 녀석도 우리 막내와 같은 처지라네..."

"회장님..."

"그래, 내가 우리 윤경이를 생각하면...후...믿을 만한 녀석하나 빨리 짝지어줘야 하는데, 그 녀석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형편이니..."

"......"

"윤경이도 그렇지...어떻게 만나도 꼭 저같은 처지에 있는 놈을 만나서...어쨌든 김회장을 만나거든 호적에 올릴 계획이 있는지, 인지한 자식으로 상속인에 포함할 건지 자네가 잘 듣고 오게. 그런 것 까지 얘기할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진영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스친다.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지만 회장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알고 있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한 비밀유지를 원칙으로 한다는 거, 아니까 이렇게 자네를 불러 얘기하는 거 아닌가."

"회장님..."

"난 자네가 누구에게 빡빡하게 굴던지 관심이 없네. 하지만 나에게까지 그런다면 좀 실망스럽구만. 사업에 관한 정보도 아니고 그 정도는 해줄수 있지 않나. 나에게 윤경이가 어떤 자식인지 자네도 알지 않아. 그것만 알아다 주면 고맙겠네."

회장은 부탁조로 명령을 하고 있었다.

수아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진영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말대로 사업에 관한 정보도 아닌데...

"일단 김회장님 부터 만나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두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진영의 얼굴은 태풍의 눈 같았다.

수아는 입사 첫 날부터 진영을 따라 너무 큰 배에 올라 탄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