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아련>
아련은 선주가 우석을 미움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선주가 우석을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이유가 아련을 배신했다는 그 단 한가지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석을 대신해서 어떠한 변명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굳이 배신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끄집어 내자면 우석보다는 아련 쪽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할 일이었다. 선주가 생각하듯 아련이 우석에게 배신 당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하는 편이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련은 선주에게 그것을 사실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선주가 도준과 아련을 어느 정도 이해의 눈길로 바라 볼 수 있게 된 데는 아련이 우석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갖게 된 연민의 마음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선주는 그 동안 아련이 자신을 속여 왔다는 생각으로 또 한 번의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아련은 그것이 두려웠다.
아련은 늘 선주에게 빚진 마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주가 딸 하나를 둔 이혼남인 거래처 사장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나 놀랍고 당황한 마음에 선주와 연락이 끊겼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주네 집을 직접 찾아 갔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결혼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련으로서는 선주가 행복하지 못하면 자신도 늘 그늘진 마음으로 살게 되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 선주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때 먼저 연락 하겠다며 그 전에는 절대로 도준과 아련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얼마간 서로의 인연을 끊으려 했었다.
역시 선주는 자신의 집을 찾아 온 아련을 만나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아련을 만나러 나온 선주의 새어머니는 더 이상 선주의 결혼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자신이 대성통곡 하며 그렇게 결혼을 말렸지만 워낙 선주의 결심이 확고부동 했다는 것이다. 남의 자식 키우는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라 선주를 차마 그 길로 보낼 수 없는 마음이었으나 선주는 엄마가 베푼 그대로만 베풀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라 해도 얼마든지 진심이 전해질 수 있다면서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걱정시키며 결혼한 선주는 뜻 밖에도 정말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련과 도준에게도 밝은 음성으로 연락을 해 준 것이다. 남편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 주는 자상한 사람이고 딸 아이 또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깊어 오히려 선주보다 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배려해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 엄마에게 늘 냉정했던 자신을 돌아 보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는 말까지 해 주었다.
선주는 이제 자신의 아이만 갖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주변 사람들의 생각일 뿐 오히려 당사자인 선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밝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선주의 모습은 아련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 되어 주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묵직한 짐 하나를 덜어 줄만큼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련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 하나가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동안 아련의 가슴 속에는 우석이 떠나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우석과 함께 듣던 음악, 함께 걷던 길, 함께 보던 영화, 그리고 함께 읊조리던 싯귀까지 하나도 낡지 않고 생생한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련이 우석을 떠 올릴 때 도준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신의 행복을 지켜 주는 도준을 생각하면 그런 자신이 결코 떳떳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함께 한 두 사람이었기에 우석은 생각처럼 쉽게 떠나 보낼 수 있는 그런 기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때 자신이 조금만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석을 받아 들였다면 우석을 향해 그렇게까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당당한 모습으로 우석에게 다가 서려고 했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우석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아련은 참으로 고단하고 지친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어린 사람의 어리석음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우석을 그렇게 한 순간의 감정으로 어이없게 밀쳐 낼 만큼 성숙되지 못한 설익은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우석의 분노와 무관심, 그리고 냉랭함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던 자신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추위를 감당 못한 채 그렇게 초라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상처 입은 영혼으로 아파 했던 것이다. 그 때 도준은 작은 불쏘시개 하나를 가져와서 얼어 붙은 아련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펴 주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아련이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따뜻하게 타 올랐다.
누구나 지나간 추억은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또한 가지 못한 길은 아름다움으로 그려 보고 싶어 한다. 추억 속에는 이루지 못한 미완의 꿈이 숨 쉬고 있고 가지 못한 길에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소망의 꿈이 유혹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련은 오늘도 한 쪽 가슴에 우석을 품게 된다. 추억 속에도, 가지 못한 길에도 그 중심에 바로 우석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오래도록 아름답게 간직되는 묘한 힘을 갖고 있기에 아직도 자신을 그리며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우석을 아련은 차마 떠나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