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우석>
서류나 책 등 몇 가지 중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나니 나머지 물건들은 그냥 이삿짐 센타에 맡겨 두어도 괜찮을 것처럼 보였다. 혼자 사는 살림이라 책 이외에는 크게 짐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신혼 집으로 옮겨질 몇 가지 짐만 제외하면 웬만한 것들은 모두 버려질 것들이었다. 아파트 문을 잠그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우석은 잠시 선주를 떠 올렸다.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직접 마주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서로가 누군지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하는 고역은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인사 한 마디라도 건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우석에겐 더 크게 느껴졌다.
우석은 선주와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이는 선주 남편을 보면서 자꾸 쓸쓸한 감정이 들었었다. 졸지에 좋아 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함께 맛 본 같은 처지의 선주였기에 우석은 그녀가 좀 더 행복하게 살아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선주의 밝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상처 받은 자신의 아픈 눈으로 본 까닭인지 선주에게서도 그런 어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련과의 어이 없는 이별 후 한 동안 우석은 방황 속에서 고통스런 세월을 보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뼈 아프게 반성했다. 결혼 허락을 받은 날의 기쁨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부모님께 그만큼 자신이 인정 받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스스로를 경멸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런 반성은 아련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분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련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석의 생각은 달라졌다. 자신을 괴롭히던 도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뜬 구름 같은 이야기로 생각되었다. 우석은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 해 아련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련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도 느꼈다. 그 소리없이 웃는 눈 웃음과 조용히 속삭이는 말투, 그리고 아이처럼 자신을 따르던 그녀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를 언제나처럼 곁에 두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우석은 미칠 것만 같았다. 비록 순간적인 실수로 잠시 아련을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진실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키워 온 사랑이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 보내야 했는지, 자신의 서투른 감정처리 하나가 그렇게 엄청난 결과를 감당해야 할 만큼 잘못된 것이었는지 우석은 아무리 자신의 탓으로 돌리려고 애를 써도 너무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마음을 돌린 아련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우석은 도준이 늘어 놓던 장황한 사랑 강의에 자신이 형편없이 놀아 난 것만 같았다. 왜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형편없이 짓밟는 데도 제대로 한 번 항변조차 못했을까 하는 자괴심에 몹시 분한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 버린 사랑에만 미련을 두고 연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자신의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우석은 다시 자신 만만한 옛날로 돌아 가리라 생각 했다.
우석은 선주로 인해 다시 그 옛날이 떠 올랐지만 더 이상 아련으로 인한 아픔은 없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길이 오직 약혼녀만을 향해 뻗어 있음을 느꼈다. 그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이 비록 도준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쓰라린 마음으로 인정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