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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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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1


BY 선물 2003-10-04


<선주 - 1>

선주는 그 남자를 알고 있다. 그 남자의 신 우석이라는 이름도 알고 있고 상아 빛 와이셔츠만을 고집하는 독특한 기호도 알고 있고 남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깊은 볼우물이 패인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선주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정말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선주에게는 다행인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다만 가끔씩 마주칠 때면 몰래 그 사람을 훔쳐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고 어색한 긴장감이 들어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끝까지 그 사람이 선주를 모르는 것으로 내 버려 두고 싶은 마음은 확고하다.


선주가 이 아파트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의 즐거운 외식을 끝내고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잠깐만요!" 선주는 그 남자가 기다려 주기를 청하고는 뒤에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따라오는 남편을 향해 빨리 오기를 재촉했다. 그제서야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을 안 남편은 투박스런 구두소리를 내며 어정쩡한 모습으로 뛰어 오는 것이었다. 남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기다려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려고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리던 순간 선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그 남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사실을 채 알지 못 했을 때라 그저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호들갑스런 아는 체를 하고 말았다. 우석은 잠시 흠칫하는 듯 하였으나 이내 낯선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되어 선주에게 가벼운 목례만을 건네었다. 그제서야 그가 우석임을 인지한 선주는 우석처럼 그렇게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서 멈추었고 아직 몇 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선주는 9층에서 내리는 우석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석의 몸이 왼 쪽으로 돌려지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902호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야, 왜 그렇게 반색하며 반가운 인사를 해?"
"알기는요. 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인사를 나누고 그래야죠."
선주는 애써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우석에게 보였던 행동이 그렇게 예의상 나누는 예사로운 인사는 아니었음을 남편도 알아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약간은 짜증을 묻힌 목소리로 한 마디를 툭 내뱉고 만다.
"당신은 아무 남자에게나 그렇게 호들갑스런 인사를 나누고 그러나?"
"어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당신답지 않게 웬 트집이래요. 얼른 들어가서 과일이나 먹자구요."
선주는 그러면서 말 끝을 흐리고 만다.

며칠 뒤 앞 집 아주머니가 부침개를 했다며 갖고 왔다. 이사 올 때부터 선주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찾아와서 인사를 건네던 그 아주머니가 왠지 선주는 거북스럽다. 자꾸만 탐색하는 듯이 보이는 그 눈빛도 싫었지만 이웃들의 이야기를 너무 가볍게 함부로 하는 모습에서 신뢰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몇 호 집 여자는 옛날에 다방 종업원이었는데 돈 많은 노인네랑 결혼해서 지금 친정도 살리고 자기도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고 간호사 출신인 몇 호 집 여자는 출장이 잦은 남편 몰래 양평 쪽 까페에서 노래 부르는 무명가수랑 어울리는데 보통 사이가 아니란 말도 해 주었다. 선주는 이 아주머니한테는 정말 말조심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아주머니 입에서 우석의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도 하지 않은 노총각인데 가끔씩 그의 어머니가 와서 한참을 머물렀다 가시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와의 대화 중에 꺼질 듯한 한 숨을 내 쉬며 하는 말이 총각 때 죽어라고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때 자신의 심한 반대로 결혼을 포기한 뒤로는 선도 보지 않고 저렇게 혼자서 살겠다며 고집 부린다는 말과 함께 웬만하면 자식 결혼은 져 주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여 했다고 한다.

`우석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련이 때문에...'
선주는 속으로 콧방귀를 뀐다. 우석은 부모님께서 그렇게도 반대하시던 아련과의 결혼을 어렵사리 허락 받은 뒤 인사 드릴 날을 잡으려고 하던 중에 느닷없이 아련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선주는 그 어이 없는 일을 알고 있기에 앞 집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실소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 두 사람 간의 사랑이 무너지는 바람에 선주도 그렇게 공들이고 있었던 도준과의 사랑이 깨어졌고 그 때문에 선주는 아련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우석에 대한 원망도 깊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주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우석과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는 것을 훨씬 편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석 - 1>

우석은 얼마 전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우연히 선주를 보게 되었다. 제법 먼 발치에서 보았지만 한 눈에 선주임을 알 수 있었다. 10년 전과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고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석의 머리 속에는 갖가지 상념이 다 떠올랐다. 꼭 10년 전의 일이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 우석의 마음에도 바람이 스미는 것 같은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구 도준으로 부터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전화가 왔었다. 우석과 도준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술이 약한 편이었고 마음도 잘 맞아서 둘이서만 어울리는 것을 좋아 했었다. 외아들인 도준은 군 복무 때 부모님 두 분을 모두 교통사고로 잃고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 뒤 우석을 찾아 그 쓸쓸함을 달래려고 할 때가 많았다. 군을 제대하고 학교로 복학하면서 한참을 어지러이 방황하던 도준에게 한 여자가 생겼는데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까닭에 남녀 관계를 항상 잠깐 스치는 바람 같은 것으로 알고 몸과 마음을 함부로 하던 여자였다. 그러나 도준은 그 때 몹시 외롭게 생활하고 있을 때라 그녀를 너무나 깊이 받아 들이게 되었고 그 때문에 나비처럼 잠깐 나풀대며 날아 왔던 그녀가 또 그렇게 쉽게 떠나 버리자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 뒤 한동안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다가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 제 생활로 돌아 온 경험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도준은 여자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도준과 약속한 호프 집으로 들어선 우석은 금방 도준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석이 자리에 앉자 마자 도준은 우석에게 눈짓으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여자를 가리키더니 합석을 시도해 보자는 뜻 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석을 기다리는 동안에 도준이 눈 여겨 보았던 여자들인 것 같았다. 옆을 힐끔 쳐다 본 우석의 눈에도 한 여자의 뽀얀 얼굴이 눈부시게 느껴졌는데 아마도 도준도 그녀를 맘에 두었던 것 같았다.
약간은 끼가 발동했는지 도준은 혼자서 망설임 없이 그녀들이 앉은 테이블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을 자신들의 테이블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발을 까딱거리는 그녀들을 쳐다 보던 우석은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조그만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그녀들은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등이 아직도 소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고 그 순수하고 맑은 모습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린 우석의 눈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뽀얀 얼굴 빛을 하고 있는 아련이라는 한 여자에게 고정되어 거둘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우석의 주변에는 도준도 사라지고 또 다른 한 여자인 선주도 사라지고 음악소리까지 사라진 채 아련의 까만 눈동자만이 우석의 마음을 환히 밝혀 주는 어떤 존재감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야, 임마, 정신차려." 몽롱한 꿈길을 헤매는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우석의 귀에는 도준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고 그 뒤에야 다른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련은 우석의 그 집요한 눈길에 당황하고 민망하여 차마 몸 둘 곳을 모르고 있다가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의자 깊숙이 어깨를 파 묻으며 편한 자세로 앉는 것이었다. 우석도 순간적으로 혼이 빠진 것처럼 행동한 자신이 쑥스러웠고 아련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한참 만에 정말 힘들게 할 수 있었다. 그런 우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도준의 눈빛에도 잠깐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어색해진 네 사람은 금방 그 곳을 빠져 나왔고 도준은 우석에게 살짝 다가와서 "잘해 봐!"란 말만 남기고 자신은 선주만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근사한 저녁이나 먹겠다며 우석과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