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잠을 자기 위해 비운 포도주 한 병은 고스란히 변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위의 산과 뒤틀림이 출근 준비를 하는 시간을 괴로움 그 자체로 바꿔 버렸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루라도 쉴 수 없는 직장인이 된지 이제 6개월인지라 가끔은 결혼해서 살림만하던 가정주부의 아침이 그리울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나이들어 시작한 직장생활은 삶의 활력과 경제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젊은 감각에 뒤지는 말단 인테리어 디자이너, 속된 말로 노가다인 나에게는 열받는 일이기도 했다.
이혼녀이고 실무경험이 없는 나를 받아준 회사가 고맙긴 하지만 동네 북처럼 치이는 매일이 오늘처럼 컨디션 제로인 날은 학교가기 싫어했던 어린 시절처럼 정말 가기 싫기도 했다.
회사에서 한꺼번에 대공사를 2개나 따내다보니 회사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실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살얼음판 같을 뿐이다. 그래도 밤새고 일하고 목수아저씨 저리 가라 열심히 일하는걸 보면 어지간히 나도 나를 사랑하는 거겠지.
새로운 공사를 위한 회의가 오늘 시작되고 그 중 한쪽에 일하게 될텐데 나는 과학연구소 프로젝트보다는 빌라의 신축 공사일에 속하기를 기도하며 출근했다.
예상대로 현장에서 죽도록 일만하다 자수성가한 사장은 벌써부터 큰 공사에 대해 흥분되어서 앞에 앉은 직원들의 얼굴에 마구 소나기를 쏟으며 이번 공사를 잘 끝내면 보너스와 휴가를 주겠다는 말과 어떻게든 인건비, 자재비를 아끼고 럭셔리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라고 연설에 연설을 거듭했다.
하지만 나는 사장을 참 좋아한다.
그의 적당한 무식함 뒤에는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의리와 자수성가한 사람의 안하 무인격인 나뿐 점을 그리 찾아볼 수 없었다.
다소 업무를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그의 이면에 숨어있는 인간미에 항상 감동되곤 했다. 그는 회사직원들의 어려운 점을 남 몰래 도와주는 의리의 돌쇠형같은 사람이었다.
사장의 연설이 끝나고 우리 회사의 다크 호스인 디자인실장의 팀 배치와 실무지시가 이어졌다.
칼날... 실장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사장과 10년을 넘게 일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는 정말 보기만해도 깐깐, 완벽 그 자체였다.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희한하게 그의 옷에는 티끌하나가 붙지 않았다. 회사가 지금처럼 인정받게 된 것도 그의 공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장과 반대로 그는 말도 없고, 웃음도 없고, 겸손함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로지 혼자 잘난, 하지만 신경질나게도 정말 잘난 사람이기에 더욱 재수가 없는 사람. 실력은 짱짱한 사람.
내가 입사할 때도 가장 달가와 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였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실력, 완벽한 배경. 그래서 더 정 안가는 사람.
어린 여자 디자이너들에겐 선망의 대상인 사람이 그였다.
누누이 저런 사람은 결혼하면 와이프 고생시킬거라 말하는 나에게 한결같이 대답은.
"언니. 그래도 멋있잖아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밥맛'이라고 노트에 끄적 거리는 나를 그가 불렀다.
"우연우씨, 이번일에는 나와 같이 연구소 리노베이션에 붙어요. 실력을 키우려면 어려운 일을 잘 해내야 합니다. 우연우씨의 강점은 모던한 스타일에 있으니까 컨셉과도 잘 맞고 이번 기회에 일의 폭을 넓혀야 살아남습니다. 다른 질문있습니까?"
최악이다.
실장은 차라리 외과의사에나 어울릴 사람이다. 그래도 이 번 만큼은 내 주장을 펴기로 결심했다.
"저 실장님, 빌라 쪽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주부의 관점에서 이 번 빌라의 공간 수납과 편리성 쪽에 초점을 맞추어 일하고 싶습니다. 모던함만을 강조하는 일에만 그간 작업해왔고 이 번에 빌라의 공사는 럭셔리한 분위기를 내는 걸 클라이언트가 원하기 때문에 평수에 관계없이 여자들의 꿈을 대변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그런 쪽으로 오래 전부터 구상해 놓은 프로젝트들이 있습니다.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요."
실장은 안경을 고쳐 썼다.
아뿔사! 저 행동은 가장 기분 나쁠 때하는 건데. 난 죽었다.
"우연우씨. 지금 주부십니까? 디자이너는 어떤 상황에든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입니다. 작은 공간을 채우는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던지 있습니다.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서 회사 내에서도 원맨쇼가 가능한 디자이너가 되야 지신도 당당하지 않습니까? 팀배치 끝났습니다. 이상"
나쁜 놈.
그래 나 이혼녀다.
실장은 내 입사를 반대한 이유중에 하나가 나의 이혼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독신이었고 자신의 선택과 결정엔 언제나 100%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결혼을 해서 잘 살겠다고 해놓고 그게 아니라고 갈라서는 나같은 이혼녀, 이혼남을 아주 경멸했다. 책임질 수 없으면 시작하지 않는 사람. 그런 칼날은 결국 노총각이다.
과학연구소에서 일하기 싫은 이유는 딱한가지였지만 사실 그 일이 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누구나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대형 프로젝트를 하고 싶을 것이다.
이번 리노베이션은 단순한 재배치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다소 어려운 이미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 창조해서 과학관과 전시실, 또 외국의 학술세미나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가장 최첨단의 디자인이 접목될 대형 프로젝트였다.
할 수 없지. 인간적인 감정을 잠시 접는 수밖에.
"후배누님,저랑 한 팀되셨네요? 아이,좋아라."
문제아 윤 명. 회사에서 날 스트레스 주는 두 번째 인물이었다. 내가 자기의 소울메이트라나 뭐라나.
실무적인 어려움을 가장 많이 도와주는 좋은 동료지만 그 녀석은 나를 자기 애인처럼 대한다.
"이봐요. 윤 명씨!"
"아이, 후배누나 왜 그래. 그렇게 째려 보니까 더 섹시하다. 이따 내가 점심 맛있는 거 사줄께요."
"야, 윤 명 너 자꾸 왜그래? 안그래도 칼날이랑 일하게 되서 온 신경이 칼날 같은 데, 왜 너까지 날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으이구~~~~ 제발 일이나 해요."
"어어, 누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사실 일은 내가 누님 보다 더 잘하자나요."
솔직히 남편감을 꼽으라면 난 명이를 들고 싶다. 명이는 정말 '밝다' 언제나 5월같은 젊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도 이제 내일모래 삼십줄을 바라보는 나이었지만 그에게는 남자의 느낌보다 순수한 아이같은 싱그러움이 있었다. 명이는 고민이 없는 사람같다. 물론 그도 일을 하면서 고심하기도 하고 스트레스 받기도 하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익혀온 그런 안정감과 사랑이 그의 본 모습이었다.
우연히 그의 부모님을 본적이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려고 로비에서 아들을 기다리시던 부모님은 차거나 모자람이 없이 광고에서 행복한 노년을 함께 하는 노부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희끗한 머리결, 다정스레 손을 포개 잡고 장성한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님. 계단을 한 걸음에 껑충거리며 내려온 윤 명은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정말 다정스럽고 사랑스러운 부모님과 자연스레 포옹을 하고 엄마를 에스코트하며 총총히 빠져나갔다.
내가 아들을 낳으면 꼭 명이 같이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삶에 일종의 그림으로의 모습이다. 이 녀석은 도통 되지도 않게 나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해댄다.
"윤 명씨. 시력 나빠요?"
"아뇨. 왜요?"
"뒤를 한 번 돌아봐요. 우리 회사에만도 각 부서에 여자 직원들이 넘쳐나요. 게다가 이쁘고 똑똑한 사람들로요. 젊기까지 한. 근데 왜 하필 일도 버벅거려서 힘든 나이 많은 이혼녀한테 자꾸 버릇없이 농담하고 그래요?"
"아이, 후배누나. 나랑 4살밖에 차이 안나요. 4살은 궁합도 안본다죠? 글구 나이가 뭔 상관이에요. 필이 통하며 되지. 일하는데 귀찮게 안할게요. 이따 나랑 밥먹을거죠? 그럼 저 가요."
눈 깜작 할새 그는 날 꼭 끌어안았다가 예의 단번에 뛰어서 현관을 지나가고 있었다.
막상 공사의 청사진이 떨어지고 자재구입과 현장 스케치가 끝나가면서 다른 생각을 할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처음에 이유있는 나의 거부감도 서서히 줄어들고 하루에 한 번 집에 갈 여유도 없이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칼날 실장은 내벽 공사가 마무리되자 연구실의 로비부터 먼저 이미지 작업을 시작하라고 다그쳤다. 아무래도 왕래가 많은 곳의 일을 먼저 처리하고 다른 공간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 시너지 효과를 고려한 처사였다.
현장공사는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힘든 일이었지만 연구하고 있는 연구소의 모든 직원들은 그 스트레스가 더했다. 하루종일 울리는 굉음과 먼지. 이미 연구가 시작되었기에 장소를 옮길 수도 없는 많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느라 우리만큼 그들도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 곳 구내 식당의 점심은 유명하기로 이름이 난 곳이라 우리 공사팀도 거의 그 곳에서 밥을 때우기 십상이었다.
어느 정도 예민한 부분에서 벗어난 점심에 명도 자재문제로 외근을 나가고 실장은 연구소 회장과의 점심약속으로 나가 버리고 인부아저씨들에게 점심 후 작업을 지시한 후 썰렁하게도 식당에 혼자 앉아 늦은 식사를 먹게 되었다.
"우연우. 맞지?"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화학연구소 팀장 박 이삭.
언제가 그를 마주칠 수 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후줄근하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혼자 밥을 먹을 때 그를 맞닥뜨리기를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오랜만이네."
"정말 오랜만이다. 이번 리노베이션 공사 맡은 회사가 네가 있는 회사인줄 몰랐다. 널 어제 우연히 보기 전까지는... 점심이 늦었네."
"조금.."
"나 여기있는거 몰랐구나?"
속으로야 알고 있었지만 8년만에 만난 첫사랑에게 알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싫었다. 그는 우리나라 화학 전문 연구원으로서 촉망받는 인재인데다가 과학에 관련된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 안될 터였다.
"응.신문에 이삭씨 자주 나니까 알고는 있었는데 뭐 특별히 연락할 일이 없잖아."
"이삭씨? 네가 그렇게 부르니까 정말 이상하다. 8년만인가? 너 결혼했다는 건 동창회게시판에서 봤어. 결혼한지 이제5년차인가? 어때 재미있어?"
"그렇지뭐. 이삭씨, 아니 그 쪽은 어때? 나도 그 쪽 결혼했다는 건 게시판에서 봤어. 사진도 올려 놔서 봤고.딸 사진도."
"그랬구나. 우리 딸 이제6살이다. 귀여워.. ... 너 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난 그를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많이 가슴이 떨릴거라고 생각했다. 이런게 나이탓일까?
난 그의 얼굴을 코앞에 마주 대하고 있는데도 전혀 어떤 맘의 떨림이 없이 너무나도 차분한 거였다.
성공한 사람. 신앙적으로 충만한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그의 모습. 아마 그의 일상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단정한 옷차림. 적당한 무게있는 행동. 언제나 주의를 의식하는 사람. 내가 처음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창인 그와 나는 서로 동창인지도 모르고 우연히 만났었다. 나이들어서 만난 동창에게 이름 부리기가 그래서 언제나 난 그를 '그 쪽'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았을까? 청춘의 한 기억처럼 열병처럼 앓아 버린 사랑의 단편. 그와 나랑은 꼭 18개월을 사귀었었고.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날로
부터 정확히 18개월만에 그는 결혼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은 정말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고 사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렇게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에게 나는 첫사랑, 아니 엄밀히 말해서 첫여자였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위해서 자신의 동정을 간직해 왔노라고 우리가 함께 한 날 나에게 수줍게 고백했었다.
이런게 책임감 이었을까? 난 그의 동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말 그를 사랑했다. 그는 학구파였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자란 터라 어딘가 나와는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항상 밤을 세우고도 모자랄 만큼 우린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와 나는 배경이나 분위기가 천지 차 이었지만 인생을 사랑하고 삶의 목표가 같은 동지같은 사이었다.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으니 너무 어색해져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쪽도 바쁘겠다. 나도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지."
"연우야. 나 어제 정신없이 일하는 너를 처음 봤다. 얘기하고 싶었어. 정말 반가워서 하루 종일 일을 못했어. 우리 한 번 만날 수 있겠니?"
"그게... 그렇네.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딱히 할 얘기도 없잖아."
"아니야. 꼭 할 말이 있다. 한 번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니? 내가 전화할께. 명함있니?"
"아니. 안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반가웠어."
꿀맛같던 구내식당의 밥은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쏟아져 내렸다. 유달리 가슴 떨리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들이란 다 그런걸까?
지나간 옛사랑을 우연히 만난다면 시헌도 그 쪽처럼 할 말이 생각날까?
어쩌면 한 번은 치뤘어야할 통과의례처럼 박이삭을 만난 것은 일간 나의 마음을 편하게도 했다. 뻔히 그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인 그를 공사기간내에 한 번도 안만난다는 것이 도리어 해괴한 일일 수도 있기에 차라리 이정도 수준에서 그와의 어색한 만남이 이루어졌던게 홀가분했다.
닷새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는 돌아가자마자 할 일들이 영화 돌아가듯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가방 한 가득의 빨래며 사람이 한 동안 안 들어왔던 집의 고유한 답답한 공기를 환기시킬 거며, 뜨거운 목욕을 하고 간만에 늘어져라 잘 생각까지.
냉장고 안에 아직도 먹을 만한 게 남아 있을런지. 하지만 시장까지 들러서 집에 갈 만한 체력은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트렁크에서 내려지는 나의 빨래가방과 서류가방은 정말 한 무게를 했다. 끙끙거리며 가방을 들고 있는데 순식간에 가방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시헌의 넓은 등이 나의 시야를 채우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뭐해? 빨리 가서 문 열어."
"지금 뭐 하는 거야?"
"힘들다, 빨리 가서 문 열어."
이상하게 열쇠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어서 인지 열쇠가 헛도는 기분이었다.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딱 오일만에 집에 오는구나? 어디서 잤니?"
"왠일이야? 다시는 안보는게 나을거라고 했잖아."
"어디서 잤냐니까?"
"이혼한 전 부인이 어디서 자고 오던 무슨 상관인데?"
"그래. 네 말이 맞다. 들어온거 봤으니 나 갈께."
"오빠, 도대체 왜 그래? 왜 자꾸 내 주변에서 맴돌아? 정말 돌아 버리겠어. 나 집에 오나 안오나 5일이나 여기로 퇴근했어? 오빠 스토커야? 우린 이혼한 사이라구!! 잊었어?"
손잡이를 잡은 채 그가 말했다.
"알아. 네가 말 안해도 우리 이혼한 사인거 나도 잘 안다고..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가 . 며칠쨰 계속 안들어오던 네가 걱정되서 들른 거고 별 일 없는거 알았으니 간다고. 그럼 된거지?"
"할 얘기가 뭔데?"
"됐어. 오늘은 때가 안 좋은 거 같아. 다음에 얘기하자."
"다음에? 누구 맘대로 다음에야? 다음에 난 당신 안만나. 그러니까 지금 얘기해."
"그럼 .. 얘기 안할께. 나 간다, 그리고 얼굴이 그게 뭐냐? 잘 먹고 잘 자고 지내."
쾅하고 문을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한 칸 아래고 덜컹 대며 내려앉았다.
우리의 5년의 결혼 생활을 종지부지의며 다시는 서로의 인생에 어른거리지 말기로 해놓고 그는 번번이 그 약속을 깨고 있엇다.
결혼은 두 사람 다에게 행복한 시작을 주는 거 같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혼녀와 이혼남 승자가 없는 상처 투성이의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은 누어있을 수 없는 때에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얄미우리만큼 날씨좋은 휴일이 오히려 더 괴로운 건 이혼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 테지...
전화기에는 아까부터 4통의 메시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미선이었다.
'언니 저 미선이에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한 번만 만나주세요.'
궁상맞게 미선이까지 아주 날 미치게 하고 있었다. 녹음을 지우는데 또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언니. 저 미선이에요."
"근데."
"언니 괜찮으시면 뵙고 싶어요."
"야, 나 안 괜찮거든? 너랑 나랑 만나는거 우스운거 아니니? 다시는 전화 걸지마."
"언니, 미안해요. 딱 이 번 한 번 만이요? 네?"
미선이는 언제봐도 여자냄새가 폴폴 나는 아이었다. 셋팅을 해서 적당히 컬진 머리에 살짝 레이스달린 블라우스와 무릎길이의 스커트 , 적당한 굽의 스트랩 구두를 신은 하얀 얼굴에 핑크계열의 맆스틱.어딘지 촌스러워 보였지만 웬만한 남자들은 대개 미선이의 여성스러움과 그녀의 애교 넘치는 말투에 한 큐에 넘어가고는 했다.
유일한 예외는 내 남편이었지만 어떻게 된건지 그가 그녀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 것을 나는 친구를 통해서 알고 있었고 그것도 미선이가 다 정보를 나에게 들려주려고 일부러 솔희에게 울며 불며 얘기한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있을까? 그와 난 이미 이혼했고. 남의 사생활은 내 알바아닌것을.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도사가 된다나?
난 미선이가 날 왜 만나자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울며 내 전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고 나에게 도와 달라고 할 것이다. 나의 도움이라는 건 그가 날 더 이상 찾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일거고 그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자기에게 올 수 있도록 밀어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왔을 것이다. 미친년...
나도 별 수 없는 여자인지라 한 번 만나서 그녀를 함부로 대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과거의 내 남편주위를 얼쩡거리는 미선이의 머리채를 붙들고 욕이라도 퍼부으면 마음 한 구석의 공허함이 줄어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졌다. 운 나쁘게도 그게 미선이가 되었지만.
걔의 가중스러운 연극을 보고 싶지도 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앉자마자 테이블을 살짝 내려쳤다.
"뭔데? 할 얘기가?"
"언니 , 차라도 시키세요."
동그랗게 두 눈을 깜박거리며 미선이는 종알거렸다.
"차시키기 전에, 남편, 아니 전남편 얘기니?"
"네. 언니 그게..."
"나 너가 그 사람이랑 하루 잔거 알거든. 나랑은 상관도 관심도 없는 일이고. 너가 하고싶은 대로 해. 난 이미 이혼했으니까 아무런 권리도 의무도 그사람과는 없어. 됬지?"
종업원은 주문을 받으러 왔다가 슬그머니 대화 내용을 듣더니 사라졌다.
"언니, 가지 마세요. 잠깐이면 되요. 언니 미안해요. 그 날 사실은 언니랑 오빠랑 결혼 기념일이었던거 알아요. 오빠가 언니 찾아갔었고 언니는 오빠를 받아주지 않은 것도요. 오빠네 집 앞에서 내내 오빠를 기다렸어요. 자정이 넘어서야 오빠가 술에 취해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서 집에 왔죠. 오빠는 날 보더니 아는 채도 안하고 지나쳤어요. 하지만 비틀거리는 오빠를 나는 부축해서 아파트로 올라갔던 거에요. 열쇠를 자꾸 떨어뜨려서 제가 문을 열어 주었구요. 근데 한동안 오빠가 자다가 반쯤 잠이 깨서 언니 이름을 부르는 거에요.연우야, 연우야.그래서... 제가 오빠 곁에 언니인척하고 앉았어요.... 오빠는 절 안았고 입 맞추더니 이내 절 뿌리쳤죠. 너 누구야.. 연우가 아니잖아... 비틀거리는 오빠는 곧 잠에 취했고...전 결심했죠... 이
번에 오빠를 못잡으면 다시 언니에게로 갈 것같아서.. 오빠옆에 누웠어요. 아침에 잠을 깬오빠는 깜짝 놀랬고... 제가 거짓말했어요..오빠가 절 가졌다고요...."
미선이의 눈물방울이 커피 테이블위로 떨어졌다.
"너 왜울어? 영화찍니, 오늘?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난 네가 그 사람이랑 잤다고 하더라고 아무렇지도 않아. 왜냐구? 첫째는 우린 이혼을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난 네가 남자랑 한 번 잤다고 해서 널 동정하거나 그 사람이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안해. 난 너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네가 무슨 열녀도 아니고 숫처녀도 아니고 막말로 네가 같이 잔 사람이 한둘이니? 너 있는 내숭 없는 내숭 다 떨면서 남자한테 꼬리치는 애잖아 . 차마 전남편한테는 그런 일로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더라. 그 사람은 책임감이 있고 착하니까 혹시라도 너랑 결혼하게 된다면 아내의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구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어. 셋째로 정말 같은 여자로서 얘기하는 데 제발 정신좀 차려라. 널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
랑 결혼해. 네가 사랑하는 남자말고. 너 그렇게 쉽게 구니까 매일 남자들이 널 홀랑 집어먹고 재미 없어지니까 널 떠나는거 아직도 모르겠니? 네 부모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밖에서 헛짓하고 돌아다니니? 응? 그리고 말조심해. 다 너 손해나는 짓이야. 정말 이해가 안되는 건 너 이 얘기를 지금 나한테 왜 하냐? 내가 누군데? 난 그사람의 전부인이에요. 너 그사람하고 결혼하고싶다며? 근데 왜 날 찾아오고 난리야? 알 수가 없다. 넌 기본적인 머리도 안도니?"
"언니... 알아요. 제가 자격이 안되는거.. 하지만 알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오빠의 사랑을 얻을 수 잇는지... 오빤 다른 남자들이랑 틀려요. 제가 어떻게 해도 눈 하나 꿈쩍 안하니까요... 저도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언니라면 오빠 마음 알거 같아서... 미친 짓인지 알면서도 찾아왔어요... 미안해요."
청춘이 아까왔다.
저 미모에 왜 저러고 다니는지...난 학생때부터 그녀의 남성편력에 대해서 익히 알아왔다. 얼굴만 보면 절대 아무도 저 청순한 외모에서 그런 색기가 있다는걸 짐작도 못할 것이다. 본인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고 은근히 즐기는 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나 내 친구만이 그녀의 본색을 알 뿐이었다. 그렇기에 전남편이 그녀와 관계가 있다고 했을 때 하필이면 왜 그런. ..를 하는 마음이었다. 암튼 실제적으로 그와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건 은근히 기분이 가벼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미선아. 내가 아무리 인간성이 좋아도 이혼한 남편에게 너를 붙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이유는? 난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와 관련된 어떤 일도 생기는 걸 원치않기 때문이지. 게다가 만약 내가 네 생각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컨트롤할 수 있거나 알 수 있었다면 우리가 이혼했을거라고 생각해? 네가 누구와 만나던,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던 오늘 이시간 이후로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널 보고 싶지 않아. 그게 날 도와주는 거고 네가 원하는대로 모든 일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오빠는 내 말 들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절대 아니야. 알겠니? 가."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심리가 있는 듯하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처럼 자신이 선택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선택해서 잘 길들여 놓은 것들에 더 욕심을 내니 말이다.
남편의 경우도 그랬다.
오빠는 결혼 전에는 부모님들에게 환영받는 듬직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또래나 다른 여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나와 결혼을 하고 남편알기를 하늘같이 알려고 노력한 나로서는 그를 챙겨주는 재미에 참으로 즐거웠다.
3년만에 라면을 끓이던 식당강아지처럼 그도 결혼한지 3년차가 되면서 밖에 나가면 꽤나 멋있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로 변해있었다.
그 때부터 미선이가 남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잘 다듬어진 유난히 부담없는 남자. 그래서인지 아가씨들도 그를 좋아했다. 포근하고 다정한 듬직한 남자.... 한 가지 비밀이라면 그에게는 약간의 창조력이 결여되서인지 한번 코디해준 옷 스타일을 고수한다.
카키색 골덴 바지에는 베이지색 남방과 톤다운된 베스트를. 핀스트라이프가 있는 감색 수트에는 하늘색 셔츠와 블루와 그레이가 믹스된 타이를. 암튼 결과적으로는 항상 좋은 느낌을 주는 남자가 되있었다.
다 결혼 잘한 덕분이지.
혼자 이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결국 그 결혼은 이렇게 이혼으로 끝났으니 말이다.
문득 이제부터는 나 역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일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는게 사실이었다. 그저 물 흐르는대로 나에게 또 사랑이라는게 준비되어있다면 구지 도망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