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재란은 서둘러 진수네 집으로 향했다. 오징어 회꺼리를 들고.
그가 재란을 맞았다.
[진수는요?]
[아직이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든데?]
[쟤, 술만 보면 끝장을 보는 애거든요. 아침 아직이죠? 오징어 회 드실래요?]
[대강 먹었으니깐 됐어. 커피 한 잔 하자]
그들은 버스를 타고 사동에서 내렸다.
거기가 그래도 출발하기엔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성인봉은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산의 모양이 성스럽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해발 984미터.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있으며 희귀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정상부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등산로로는 조금 험준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오르는 그 길 주변의 경치가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독도가 보인다. 극히 드물지만...
재란은 조금의 뒤처짐없이 따라붙는 영이 대견하면서도 놀라웠다.
될수있음 재란은 걸음을 천천히 했다.
휴식 공간이 나오면 빠지지 않고 쉬기도 하고...
정상에 오르자 등산 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볼 것이리곤 확 터인 바다뿐이지만 매번 올라올때마다 재란은 벅차 오르는 감동을 받곤 했다.
[어때요?]
[좋구나...]
산들 바람에 땀을 말리며 그가 말했다. 깊은 눈으로 발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 보는 그이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있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에 재란은 그곳에서 벗어나 나무 벤치에 앉았다.
재란은 깨달았다.
아니 확인을 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 마음속에서 숨쉬고 있었다는 걸...
힘들지만 이제는...인정하고 싶었다.
반쪽만의 사랑도 사랑이고 미완성의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다만 표현의 자유가 없을 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숨 소리가 심상치 않은데 무슨 고민있어, 꼬맹이?]
어느새 그가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너무 가까이 그가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재란은 피식 웃었다.
[점심 먹을래요? 일사천리로 제가 준비한건데...]
재란은 재빨리 베낭을 열고 도시락을 꺼냈다. 김밥이었다.
그리고 보온병에서 따듯한 국물을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 그 짧은 시간에 김밥을...?]
[마침 엄마가 김밥을 생각하고 계시더라구요. 제가 김밥을 좋아하잖아요]
재란은 김밥 한 개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 주며 웃었다.
사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족들 아침밥을 나꿔채,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부랴부랴 만 김밥이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다시 밥을 해서 먹어야 하겠지만...
[왜...그동안 울릉도에 오지 않았나요? 많이 바빴어요?]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먼저 질문을 했다.
[...꼬맹이 넌 이곳이 좋아?]
되려 그가 질문을 했다.
[네. 전 울릉도가 좋아요. 마음이 편하잖아요. 왠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난 반대였다. 늘 답답하고 불편하고...말많은 동네잖아]
[시골쪽은 원래가 그렇잖아요. 말도 많고 소문도 무성하고...아마 오빠랑 제가 이렇게 둘이 있는 거 동네 누군가가 봤다면 또 소문이 돌걸요?]
[신경 쓰이니?]
[제가요? 전 누가 뭐라든 신경 안써요. 얼굴이 두껍거든요]
하면서 재란은 소리내어 웃었다.
[오빠가 걱정이네요. 괜히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그게 신경쓰였다면 같이 오지도 않았어]
[하지만...오빤 ...]
[...오빤, 뭐?]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오빠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잖아요. 괜히 소문나면.....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목에 걸렸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교사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왜 여기 있는거냐?]
그의 말에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관뒀니?]
[...예...자신이 없어서 사표 냈어요]
영은 그렇게 말하는 재란의 표정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걸...!
[꼬맹이 너...!]
[이제 서서히 내려가 볼까요?]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내려갈래요? 도동? 사동? 천부로?]
채 영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녀가 울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천부로 길을 잡았다.
이왕 나선김에 나리분지를 지나고 싶었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
주변이 온통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으며
개척민들의 주거 양식인 투막집과 섬백리향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 나오기도 한다.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온지 1시간 가량 지났을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풍온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다니!]
재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가야겠네요]
[서둘지마. 일기 예보엔 한 때 비라고 그랬으니깐]
[아니,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요? ]
그녀가 따지자 그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 태평이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어디 잠시 피해야 되겠어요. 빨랑 와요!]
재란은 그의 소매를 잡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나리분지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야영장이 있다. 화장실도 있고 음수대도 있고
대피소도 있다는 걸 그녀는 기억해 냈다.
10분이면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피소를 찾아 들어서자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큰일났네, 큰일났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걱정도 팔자군...꼬맹이 넌 기다림도 몰라? 느긋하게 기다려봐. 언젠간 거치겠지...]
그가 수건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거치겠지요?....하긴...기다림은 제 전문이죠...]
[뭐라고?]
[아, 아니에요. 혼자 말이네요]
빗소리외엔 모든게 조용했다.
그리고 재란과 그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재란은 어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둘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듯 가까이 있는데 정작 그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람인 것이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재란은 무슨 말이건 할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말문이 그대로 닫혔다.
그가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조용히...그윽하게...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더니 그 손이 그녀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꼬맹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그는 자신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그의 입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뜨겁고 따스한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포개어지자
차라리 재란은 눈을 감아 버렸다. 기절할 것 같았다.
가슴이 그대로 터져버릴 듯 부풀어 올랐다.
꿈이라면 ... 정녕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움직여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러자 그의 한손이 허리로 와 그녀를 그에게로 더욱 더 끌어당겼고
키스는 그만큼 깊어지고 있었다.
채 영이 주는 달콤함 외에
재란은 다른 모든것은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