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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라면을 먹는 사람들..


BY 김 연 2003-06-30

과일...

수박반덩이와 사과다섯알.

야채..

콩나물과 무우.

우유..

요구르트와 두유 작은 것 하나.

 

아.. 이정도면 되었나?

더 살게 뭐가 있었던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않는다..에이 제기럴..

 

아무래도 밤중에 또다시 장을 보러 나와야 할것같다.

쇼핑카트를 끌고서 계산대 앞에 선다.

 

두부부가 계산을 하고 있다.

뭐를 샀는지 카트가 그득그득 한것이 넘치기 일보직전이다.

수박을 한덩이 샀군..

그렇지. 저것이 정상이야.

우유도 큰걸루 하나를 샀군.

 

그다지 다정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는 여기저기 쳐다보며 안정되지 않은 눈으로 딴청을 하고 있고

아내인듯 보이는 여자는 캐셔가 가져다 대면 삐이 소리를 내며

돈이 올라가는 디지털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캐셔가 마치 십원이라도 거짓으로 올리려고 하면 머리끄댕이라도 잡을 기세다..

 

나는.. 언제나 혼자다.

남편? 물론 있다.

그러나 장은 언제나 혼자 보러 나온다.

 

역시 남편도 혼자 장을 보러간다.

그가 장을 보러 갈때면 나는 집에서 다른 일을 하거나 퇴근전이고

내가 장을 보러 나올 때면 그가 퇴근전이거나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장봐온 것을 정리해서 넣는다.

 

냉장고 안에는 같은 종류의 것들이 각각 두개씩 있다.

유제품은 요구르트와 두유.

그는 요구르트를 절대 먹지 않고 나는 비린내 나는 두유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과일? 그는 여름과일은 손도 안대고 나는 여름과일만 있으면 밥이 없어도 산다.

야채? 그는 콩나물은 싸구려라고 상종도 않으며 나는 무를 싫어한다.

 

하다 못해 수건..

나는 순백색  흰 수건만 쓰고 그는 부담스럽다고 흰색 수건은 손도 안댄다.

나는 침대위가 아니면 잠을 못자고 그는 바닥이 아니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는 야채를 좋아하고 채식을 즐기지만 그는 고기를 유난히 좋아하고  육식을 즐긴다.

나는 게임을 죽어라고 싫어하고 그는 죽자살자 좋아한다.

 

그러나...그와 나는 부부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결혼한지 이제 일년 남짓이다.

지금은 그를 내가 사랑하는지 사실 자신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도 자신이 없다.

 

그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나는 절대 구걸하지 않을것이다.

그도 나에게 사랑을 달라고 아기처럼 조르지 않을것이다,

 

이미 그도 나도.. 결혼이란 그렇고 그런것임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와 나는 <우리> 라는 단어로 묶여 뭔가 하는 일은 아마 없을것이다.

그와 나...라는 각각의 단어로 각각 살아갈 것이다.

 

그는 오늘 늦는다. 회식이라고 며칠전부터 말했었다.

그정도 매너는 지킬줄 아는 남자다.

 

아쉬울것도 별로 없다. 저녁을 안먹고 와도 그와 나는 각각 밥을 먹어야 한다.

 

그가 즐겨 먹는 햄이며 삼겹살을 굽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지 못하고

구역질이 나오는 일이 많아서 차라리 따로 먹는 편이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합리적인 방법이기에..

 

혼자 저녁을 먹는 날이면 나는 있는 솜씨를 다 발휘해서 김치찌게를 끓이고

야채샐러드를 만들고  콩나물을 무친다.

 

그가 먹는 삼겹살구이 냄새에 코를 막지 않아도 되고 나오는 구역질을 참느라고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지 않아도 되니  해방된 기분마저 든다...

행복한 저녁을 먹는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푸른 저녁이 검은 밤으로 걸어들어갈 무렵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왔다.

 

그는 역시나 술을 좋아하고 즐기며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즐기지도 못한다.

 

" 늦었지? 미안해...꺼억!"

그는 들어서며 나에게 쓰러지듯 가볍게 내몸에 기대왔다.

아마 술기운이겠지. 그는 이렇게 스킨쉽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부부관계는 아이를 원할 때만 , 임신이 가능한 날만 이루어진다.

 

아...

그러고보니 그와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다지 부부관계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대의 행운인지 모른다.

어느 한쪽이 성생활에 재미를 느끼는 경우라면?  문제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와 그는 가장 다행스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휴우... 안도의 한숨마저 나온다.

 

" 씻어..씻구 자야지"

나는 그를 부축해서 그의 몸을 안으로 들여 놓는데 성공한다.

 

그가 정신없이 잠이 들고... 나도 얼마간의 잡무를 마치고  잠을 청한다.

 

윗층에서 쿠당탕 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죽여!!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역시나...

저 윗집은 거의 매일을 저렇게 싸운다.  그때마다 들리는 여자의 째지는 목소리..날 죽여!!!

저렇게 사는건 또 어떤 삶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본 그 아줌마는 남편하고 뭐가 좋은지 낄낄 웃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었을까..

 

아침이 밝는다.  역시나 해는 나에게도 뜨는구나.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남편이 깨어나서 부시시한 모습으로 거실로 나온다.

 

" 커피줄까?"

그가 아침 식전에는 커피를 안마시는걸 알지만 그냥 한번 물어본다.

딱히 할말도 없고..

 

" 아니...나 라면좀.." 하면서 배를 손으로 쓸어내린다.

속이 아프겠지..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안아플리가 있나..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올린다.

물이 끓으면 스프를 넣고  면을 넣고 딱 일분만 기다렸다가 불을끈다.

 

" 다 됐어. 와서 먹어."

나도 아침생각이 없던 참에 라면 스프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밥생각이 동한다.

그참에 라면을 두개를 삶는다.

 

" 맛있다. 라면은 이맛이지.."

그는 후후 불면서 면을 건져먹고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나도 국물을 떠 먹는다.

 

아...

그와 나...

우리...

 

둘모두 거의 생라면에 가까운 라면을 먹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걸 라면이라고 먹느냐고 하지만 나는 익지 않은 꼬들꼬들한 면발과 미처 맹물에 푹 퍼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듯한 스프의 냄새를 즐기는데...

그 역시 지금 그렇게 먹고 있다.

 

처음 그는 라면을 퉁퉁 불려서 먹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늘 습관처럼 내 기호대로 라면을 끓였을 뿐이고 그는 땀까지 흘려가며 내가 즐기는 라면을 먹고 있는것이다.

 

더 먹지를 못하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 왜 안먹어 불기 전에 먹어, 불면 맛없잖아"

그가 날보고 어서 먹으라며 눈짓을 하며 웃는다.

 

" 아..맛있게 먹었다. " 그가 라면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옆에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건 내가 쓰는 흰 수건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내가 먹는 라면을 먹고 내가 쓰는 수건을 쓰기 시작한건 언제부터였을까.

아...

어제밤에도 그는 침대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다.

물론 나는 술김에 그랬을거라고 별스럽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면 맛을 모르겠다.

조금 어지러운것 같다.

 

갑자기 그가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커피 한잔 줄까? 왜 그래 라면도 못먹더니..?"

"그래 한잔 부탁해...저기.."

" 응? 뭐?"

나는 망설인다.

 

" 프림이랑 설탕 하나씩 넣어서..."

나는 용기를 낸다.

그도 흰수건을 쓰고 생라면을 먹는데 이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 그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맛있게 타다줄께"

그가 주방으로 가는 모습이 가벼워 보인다.

 

우리는 공통점이 있다.

생라면을 먹고,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넣어서 마신다.

 

우리...

어쩌면

둘이 같이 장을 보러 가도 될지 모르겠다.

 

휴일의 오전이 한가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