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75

절대사랑 14장


BY pobi9766 2003-06-10

"네, 장 기혁입니다."

장 기혁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나경은 멀미같은 어지럼증을 감지하면서 목이 메여왔

다.

"으음...여보세요.....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나경이? 나경이니?"

"자는 걸 깨웠죠? 미안해.."

감기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목이 잠긴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그녀가 바로 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혁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잤어? 새벽 3신데..."

"기혁씨...나 말야,,,나 말야..어쩜 좋아...어쩌면 좋지..."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왜 또 우는 건데?"

"일 주일이야..."

"응? 일 주일? 일주일이라니? 무슨 말이야?"

"나 결혼한다구...일 주일 후에..."

"아, 참...당신 결혼해야지..."

뭇 여자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는 결혼을 사형선고를 받은 듯이 아주 처절한 음성으로 말하는 그녀의 음성에서 아주 여린 흐느낌 소리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은 진심으로 기혁의 가슴을 에이게 했다.

"나경아...."

"...."

"축하한다고 해야 하는데...그건 거짓말이니까...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난 그럴 수가 없다....넌 다른 여자들이랑은 달라..."

슬프고, 혼동된 음성으로 그가 말하는 다르다는 말에 어디가 그렇게 다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묻기가 겁이 났다.

마지막 한줄기 남은 이성마저도 빼앗기게 될까봐...

그러나, 그 순간...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나경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아버렸다.
빈말이라도..모든 것을 지레 체념하고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었더라면....어쩌면 자신의 인생판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아..."

"무슨 말이야? 뭐가 확실해졌다는 거야?"

"이젠 잠들 수 있을 수 같애. 기혁씨도 잘 자."

"나경아..."

"기혁씨?"

"응?"

"잘 자."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기혁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나경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연신 하품을 해대면서도 숙취로 요동치는 머리 속처럼 두통증세 때문에 결국은 잠들 수가 없었다.

<font color=green><center><b> 그대와의 사랑은 이제 그만.....</font></center></b>

며칠밤을 새워 승규에게 해야 할 말을 고민하고 생각했지만, 승규를 마주 대하고 앉은 나경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경은 테이블 위에 반지 케이스를 올려두는 것으로 해야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진작에 말하지..."

뒤늦게 반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경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해.....미안해...승규씨...."

"괜찮아...지금이라도..지금이라도 늦은 건 아니야...그래, 어떤 모양이 좋을까....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승규씨 그런게 아니야....내가 누구한테 반지를 받게 된다고 해도 이렇게 이쁜 반지는 받지 못할 거야..이 반지는 정말 내 마음에 쏙들어..."

"그게 무슨 말이야?"

따르릉.

승규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나 지금 가봐야겠는데....일어나자. 내가 나중에 전화할께."

승규씨.. 우리에게 더 이상의 다음이란 없어...

"일어나자...집에 데려다줄게."

"아니....혼자 갈 수 있어...바쁘잖아...."

"괜찮겠어? 얼굴 안색이 안 좋아보이는데...."

"응....괜찮아...혼자 갈 수 있어..."

"집으로 바로 가. 일 끝나는 대로 전화할께."

나경은 힘들여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전화했을 무렵에는 전화를 받지 못할테니까.....그리고 핸드폰의 번호도 이미 바뀐 상태이니까.....

나경은 승규보다 먼저 잰걸음으로 돌아섰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한결같이 믿어준 사랑을 배신하면서 돌아서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승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잰걸음으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나경은 어머니의 볼을 비비며 가슴안을 파고 들었다.

"아니,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니."

"엄마...난 엄마가 너무 좋아..."

"나도 그래. 엄마도 우리 딸 사랑해."

엄마. 미안해...미안해.

<엄마. 미안해..아무래도 난 자신이 없어...하지만, 엄마 어쩌면 다행이지 않을까..승규씨랑 결혼해 이런 맘이 생기지 않은 게 말야...엄마를 아프게 해서 내 마음도 너무 아퍼. 근데, 엄마..승규씨랑 결혼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애..결혼 후, 승규씨를 배신하는 것보다는 지금....지금..조금 아픈 것이 서로에게 낫지 않을까.....엄마..아프지 말아요, 제발 아프지 마...>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4월의 한가로운 일요일 새벽.....
발뒷꿈치를 들어 살짝살짝 집을 빠져 나온 나경은 같은 부산이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창가에 머리가 팅팅 부딪치는 것을 간간이 느끼면서 몸을 추스린 나경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머쓱한 미소를 지을만한 기운도 없었다.

숨을 죄어 오듯이 다가오는 결혼은 그녀를 불면증에 시달리게 했고,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여러 날 째 계속 되어졌다.
지난 늦은 밤에 목안으로 삼켰던 약 기운이 그녀의 몸 속에서 회오리 치듯이 돌면서 눈꺼풀을 자꾸만 아래로 쳐지게 했다.

가슴 에이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처음 약속을 깨뜨린 스스로에게 형벌을 주는 의미로 아주 다른...전혀 모르는 곳에서 생활하기로 마음먹은 그녀가 선택한 곳은 한번도 와보지 않은 곳의 버스 종점이었다.

시야가 흐려져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나경은 장딴지 아래가 후들거려 한 걸음 내딛지 못할 때까지 걸으면서 자신의 사지를 온전히 누일 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녀가 거처로 정한 곳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넓다란 벚꽃나무 두 그루가 창가를 가리고 있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방 하나 주세요....조용한 방으루요...며칠 묵을 거에요."

"조용한 방이라면...어디가 좋을까..."

"저...괜찮다면...밖에 있는 벚꽃나무가 잘 보이는 방이면 좋겠는데요."

나경은 방으로 안내해주는 50대 부인의 불안한 시선을 짐짓 모른 척 했다.
가녀린 체구에 비해 커다란 여행 가방에..화장기 없이 초쵀한 얼굴하며, 발갛게 충혈된 눈자위하며...중년 부인이 불안해 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정말 좋네요..."

"그렇죠~ 이렇게 창을 열어놓으면 바람에 날려 벚꽃 잎이 날아들기도 한다우...우리 딸이 제일로 좋아하는 방이예요."

"이 침대에 눕기만 하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잠들어 버리겠어요."

"피곤해 보이긴 한데....식사를 먼저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일단....짐을 먼저 풀어야겠어요...이긴 열흘 치 선불이에요."

불안한 시선을 여전히 거두지 못하는 주인여자를 쫒아내듯이 내보낸 나경은 짐정리는 고사하고,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지도 않은 채 침대로 추락하듯이 쓰러져 버렸다.


"엄마아~"

초임벨을 누르는 순간부터 엄마를 소리쳐 외치면서 가슴으로 와락 껴안기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서야 주인여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구, 이쁜 우리 딸 왔구나. 널 보니 이제 살 것 같다."

열흘만에 쳐다본 어머니의 얼굴은 회색 빛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데..이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

"응?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니...무슨 말이에요?"

어머니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벚꽃나무가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방에서 삼일 째 묵고 있는 나경이에 대한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미친 년! 요즘도 실연 당해 징징거리면서 이런 데서 죽을려고 하는 얼빠진 년이 있단 말야??"

"실연을 당해 죽으려고 하는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만...뭘 먹는 거 같지도 않고, 밖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는 말이지."

"대체 언 년이 우리 엄마 속을 뒤숭숭하게 한 거야!?"

"얘! 정민아!?"

정민은 벽에 걸려있는 열쇠꾸러미를 집어들고, 이층으로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지금은 자고 있을거다... 밤 10시잖니."

"괜찮은 건지 확인만 해보는 건데, 뭐...이 방은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방인데...뭔 짓꺼리를 하기만 했단 봐라."

정민은 발끝에 온 힘을 끌어 모아 방문을 걷어찼다.

"야! 문열어! 이것이!?"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니...이렇게 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리가 안 나는 구나."

"일은 무슨.....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나처럼...좀 둔한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민도 슬슬 걱정에 겁까지 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의 끔찍한 그림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딸깍. 문이 열렸고, 정민은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열어제꼈다.

김 나경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정말 죽은 듯이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친 년! 죽을 려면 딴 데 가서 죽어. 누구 망하는 꼴 볼려고 여기서 지랄이야! 너, 우리 엄마 기겁하고 쓰러지면, 니가 책임질 거야!!"

이불을 걷어 제끼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것도 모잘라 길길이 날뛰는 자기 또래의 여자때문에 나경은 힘겹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그런데! 왜 이러고 있냐구! 우리 엄마 심장 약한단 말야."

"나도 엄마 있어요...죽고 싶은 일도 없고...그럴 만한 용기도 없어요.."

"그런 말로 사람 안심 시켜놓고 돌아서면 죽어버리는 년놈 숱하게 봤다, 내가."

"오해 할 수도 있겠지만....알았어요, 알았으니까...그만 나가줘요. 나 정말 안 죽어요."

입술을 연신 혀끝으로 축이면서 옆으로 기우뚱 가라앉으려는 나경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안스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치고 있었다.

"뭐라도 좀 먹여야 되지 않겠니..."

"죄송해요...걱정을 끼쳐 드려서.....하지만, 괜한 걱정을 하셨어요...전 괜찮아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경은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휘청....
나경은 발가락에 힘을 바짝 주어 휘청거리는 자신의 몸을 곳세우려 했지만, 테이블을 잡지 않고서는 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바닥이 지남철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의 몸을 아래로 잡아 당기는 것 같았다.

"뭐 할려구??"

"커피를 좀 마시려구요"

"미친 년. 지랄하고 자빠졌네. 가만있어. 내가 해줄게."

처음부터 백과사전에 나오는 기본적인 언어와는 거리가 먼 거친 투로 말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커피준비를 해주고 있었다.

커피 잔을 받아드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죽진 않을 것 같어.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삼일 내리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실신한 듯이 잠들어 있던 나경은 몸을 추스려 앉는 것조차도 정민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기력이 빠진 상태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서도 욱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던 나경 앞으로 새벽 일찍 죽 사발이 놓여졌다.

"나 얼마나 잠 많은지 너, 모르지? 지금은 한참 밤이야..내 일요일 아침을 좀 먹은 죄야. 토할 때 토해내더라도 깨끗이 비워."

"나중에 먹을께요...지금은 도저히..."

"야, 너, 지금 가방 싸라."

"네?"

"얘가 가는 귀가 먹었나. 왜 같은 말을 두번 하게 하니, 가방 싸라구 했다. 이 여관 장만하느라 우리 엄마 뼈가 다 녹았다구. 근데, 여기서 송장을 치라구??"

정민의 엄포에 못 이겨 힘겹게 수저를 들은 나경은 죽 사발을 천천히 비우기 시작했다.

정민은 그 모습을 아주 흐뭇한 듯이 쳐다보았다.

"커피 마실래?"

"내가 끓여서 마실게요."

"아~~암...나도 한잔하려고 그래. 하품이 나와서 못 살겠다."

"미안해요...하지만, 정말 죽으려고...한 건 아니에요..난 그럴 용기도 없어요."

"너 학교 다닐때 공부 무쟈게 못했지? 이럴때는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침대 모퉁이에 앉아 기어이 죽사발을 비우게 하고, 커피까지 끓여서 나경앞으로 가져다 주는 정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제법 귀염상이었다.

"저기요..."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저..김 나경이에요..."

"알아. 난 최 정민이야. 너, 나하고 동갑이드라...말 트고 지내자."

동갑이라지만, 정민은 그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경의 옆을 떠나지 않고 늘 언니처럼 그녀곁을 지켜주었다.
가끔은 너무 솔직해 남들로 하여금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정민은 의외로 감수성이 예민해 나경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정민, 그녀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가도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말을 시작으로 멋드러진 시 한소절을 읊어주기도 하고, 비가 온다면서 밖을 내다보라며 전화를 주기도 했다.

가끔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쩔어서도 신통하다할 정도로 집으로 들어온 정민은 질퍽한 욕을 해대는 어머니를 피해 나경의 방으로 몰래 숨어 들어오기도 했다.

"저 비가 그치면...저 벚꽃도 다 져버리겠지..."

"그럴거야."

"정민아..."

"응?"

"나,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인데...그렇게 딸막 거려? 돈 줘?"

"아니, 그런 게 아니구.....우리 집에...우리 엄마한테 전화 좀 해줄래??"

"전화 걸어주는 거야 어렵잖지만, 전화해서 뭐라고 그러지??"

"그냥...아픈 덴 없으신지....난 잘 있다구..."

정민은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어줍잖은 미소로 가리고 번호를 누르고 있는 나경을 쳐다보면서 덩달아 심각해졌다.
안부를 대신 전해주는 간단한 부탁일 뿐이라며, 정민은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다 죽어가는 중년 부인의 음성에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긴장한 정민의 침묵이 이어지자, 나경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중년 부인의 흐느낌 섞인 음성에 정민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고개를 푹 수그리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나경이 아닌데요...나경이하고 같이 있는 최 정민 입니다. 어디 편찮으신데는 없으신지...나경이가 많이 걱정해요."

대신 전해지는 안부의 말에 서글프게 울어버리는 어머니의 음성이 핸드폰 밖으로 들려오자, 나경은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네, 나경인 정말 잘 있어요....네, 안 아파요...보기엔 살집이 없어 약해 보이는데...얼마나 건강하게 잘 있는데요...네, 네...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창가로 돌아선 나경은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편찮으신 데 없으시데...니 걱정만 하셔...잘 있냐구...옆에 있는 걸 아시는 것 같은데...바꾸란 말씀은 안 하신다...너 어디로 가버릴 것 같아서 그런가봐."

"그래...고마워."

"참..내 정신 좀 봐. 해야 할 일이 깜빡하고 있었네.."

혼자 있고 싶다고 따로 말하지 않아도 정민은 없는 일까지 만들어 내면서 자리를 비껴주었다.

나경은 정민이 나가고 혼자 있게 되었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기혁을 알은 후부터 그녀는 소리 없이 우는 법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아주 익숙하게 흐느낌 소리를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콧망울에 맺혀 창틀로 떨어지고 있었다.

<차마 염치가 없어 이렇게 편지로 대신해. 승규씨 미안해...잘 있지? 며칠째 비가 오고 있어...미안하단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한결같은 마음으로 날 사랑해준 승규씰 배신한 나같은 여자..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해...아버님, 어머님 나 때문에 상심이 크실 거야. 그 분들을 위로하는 일까지 승규씨에게 떠맡겨서 정말 미안해..승규씨..나란 여자 때문에 아프면 안돼.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모습 때문에 승규씨가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래.>

훅하고 내쉬는 한숨이 언제부턴가는 버릇이 되어 버렸다.

기혁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었다.
만나 서로의 얼굴을 대하게 되면 그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것은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를 만날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대로, 마음대로 속마음 하나 조절할 수 없다니......왜 하나님은 한사람에게 하나의 사랑만 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처리해야할 업무가 산재해 있는 이유도 있었지만, 승규는 나경의 가슴에 일고 있는 한줄기 바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나친 자신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이었다.

"나한테 이럴 순 없어."

"미안해.."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로 이러지 말고."

"미안해...하지만, 승규씨...난 정말 이 결혼 못해...아니, 할 수가 없어."

"나경이 너 정말!...."

"미안해...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너 지금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습게 하고, 아프게 하는...철없는 행동인 줄 알기나 하는 거야??"

"미안해..."

순간, 그녀의 모든 행동이 철없음을 일깨워주려고 했던 승규의 뇌리에 꽃히는 느낌이 아주 더러웠다.

"아무 것도 묻지 않을테니 일루 와...약속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승규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라해도 승규의 성격상 그러겠다면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마음속에 한 번 일기 시작한 한줄기 바람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장 기혁이란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은!

승규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나경의 말을 듣는 거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미안해..."

"만나서 얘기하자니까...그렇게 미안하단 간단한 말로 정리 되어버릴 만큼 우리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이야? 난 너한테 이런 식으로 밖에 안되는 하찮은 존재였던 거니...."

"아냐. 승규씨...그런 거 아냐..."

"널 만나서 무슨 말을 해도 니 마음을 돌이킬 수 없고, 지금의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구나....."

그녀가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차근차근 나열하고 있는 승규의 얼굴은 분노와 허탈함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전화선 속으로 빠져들 수만 있다면, 빠져들어 그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옷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었다.

"미안해...."

나경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이면서도 메스꺼울 정도로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승규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면서도, 꼭 그만큼의 해방감을 느끼는 자신이 환멸스럽다.

사람 마음만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하더니만, 돌아선 사람에게 대한 마음은 그간 공들인 시간과 경비까지 셈을 하면서 애틋했던 감정을 싸늘하게 식어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경에 대한 감정을 싸그리 씻어낼 수가 없었다.

사랑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고...이 깨끗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는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제기랄!!

정체불명의 감정 때문에 승규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생각은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져 혀끝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embed src=http://tkor.bugsmusic.co.kr/top20000/kor/07/kor076543.asf hidden="true"loo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