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에 묻은 설탕을 깨씹으면서 현재 자신의 마음같이 울렁거리고 있는 파도를 쳐다보던 나경
은 복받쳐 오는 설움을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아프게 잇몸을 깨물었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무슨 결정이든 내려야 해....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말을 하지? 회오리처럼 일고 있는 이 마음의 변화를 알게 된다면...승규씨, 이 사람...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눈에 띄게 변덕스러워지고, 침울한 나경의 변화에 대해서 승규는 다만,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계절을 타거나, 결혼을 앞둔 여자의 걷잡을 수 없는 기분 쯤으로 어림 잡고 있었다.
이내 결혼할 여자가 정혼자 아닌 다른 남자와 기약도 없는 만남을 준비하면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저도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을 승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여자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승규로서는 다른 사람 아닌 그 자신이 그녀를 습관적인 죄책감으로 몰아놓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것도 그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나경은 말끝마다 회사 일을 끌어들이며,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는 승규를 쳐다보면서 그저 말갛게 웃기만 했다.
따르릉....
벌써 몇 번 째 인줄 모른다.
그녀와 만나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울려대는 저 핸드폰...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아니, 왜 이제야 전화를 하냐면서 짠소리를 하면서 통화를 시작하고, 앞에 앉은 나경의 존재에 대한 배려는 해주지 않았다.
승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핸드폰 통화에 열중이었다.
자신을 만나고 있을 때는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봐 주던 기혁의 다정하고도 열정적인 기혁의 눈빛이 그리웠다.
기혁을 만나기 전에는 승규의 그런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었고, 믿음직스러워 보이기까지도 했는데....그 사람은 나를 만나면...핸드폰도 차에 두고 내리는데...승규씬...아니, 내가 왜 이렇게 뻔뻔스러워진 거야? 지금 누가 누굴 탓하고, 원망하고 있는 거야!
"휴우...."
"너, 그거 좋은 버릇 아니다."
"어, 뭐?"
"그렇게 한숨 내쉬는 거 이제 아주 버릇이 다 됐다, 너."
"내가 그랬어?"
"일어나자...집까지 태워줄게...난 회사로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
"아냐...혼자 갈께...승규씨, 바쁘잖아...."
당신이 먼저 날 떠나줘요.....
숫자를 세어보기도 하고, 우유를 마셔보기도 하고, 밤새 침대시트를 구겨가면서 꼼지락거렸던 나경은 새벽 동틀 무렵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나경은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의 울림이 세 번에 넘어가기도 전에 얼른 전화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기혁을 알고나서 부터는 오랜 습관처럼 되어버린 행위였다.
"뭐해?"
이 사람은 늘 이렇게 말하지...뭐해...
"아직도 침대에서 뒹굴고 있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야? 너 또 비 맞고 다녔구나."
마치, 한 손에 접은 우산을 들고 비를 맞는 나경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종일 누워 있다보니까...목이 좀 잠겨서 그래요...아픈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기혁씬 집이 아닌 것 같네요??"
"응...포항이야."
"출장 갔었어요?"
"아니...그냥 좀 답답해서 드라이브 나왔어...지금 내려가는 중이야...나경아...얼굴 좀 보여주라."
보고 싶다는 말 대신 그가 말했다. 얼굴 좀 보여주라....
그는 언제부턴가 보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경은 순간 생각에 잠기고 갈등해야 했다.
모든 생각은 기혁에게로 치달리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는 승규를 만나 어른들...그러니까, 장차 시댁어른들이 될 분들을 뵈러 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지난번에도 기혁을 만나느라 약속을 펑크냈었다.
이번은 안돼! 승규가 강한 어조로 말했었다.
"안돼? 약속 있니?"
"아니...그런 건 아니구요..."
"지금 내려가면 점심때를 맞출 수 있을 거야.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점심은 금방 끝나는데....그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려요..."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시어른을 만나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마는 나경은 천연덕스럽게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는 것도 부족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린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아쉬움이 한껏 베어나는 그녀의 음성에서 금방이라도 물기가 베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점심때 만나서 밥 먹고....좀 더 나랑 있어 준다면...나야 고마운 일이지..."
까칠하고 기쁨 없던 그녀의 얼굴에 뽀사시한 기쁨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기쁨과 기대...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흥분으로 그녀의 마음은 겅중겅중 튀어 올라 천장을 뚫을 지경이었다.
"어디서 만나요?"
승규와의 이미 정해져 있는 약속을 접어두고, 예정된 이별에 가까워지고 있는 기혁을 만나기로 한 나경은 그 뒤에 닥쳐올 야단쯤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경의 집에서 두 어 블록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중 스트라이프의 티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는 반면, 왠지 그녀는 화장이 겉도는 느낌이어서 어수선하고 허둥거려졌다.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넌."
그의 말대로 몸은 부푸는 것 같고, 열이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더워왔다.
"무지하게 좋은 데...왜 그렇게 보이는 거지..."
기혁은 그녀의 짧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어하는 손을 핸들 위에 올려놓았다.
"어디 가고 싶니?"
"나야 뭐...아는 데가 별로 없어서...."
"니네 그 사람은 도대체 너한테 왜 그렇게 무심한 거야?!"
"기혁씨?"
기혁은 화가 났다.
여리디 여린 여자를 늘 바쁘다는 핑계로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승규라는 남자에게 화가 치밀었다.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어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마는 여자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마음대로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화가 난 것이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갱신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은 맞닥뜨려진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 기혁이 담배를 집어들었다.
훅하고 내뱉는 회한의 숨소리와 뿌얘지는 담배연기가 그녀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나는 요, 기혁씨...당신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이고 싶어요....그래서 어디든 당신이랑 함께 다니고 싶어요....기혁씨, 나는 말이에요....지금 당신 손가락에 쥐어진 담배이고 싶어요...그리구요...나는 당신의 눈에 끼워져 있는 투명한 안경이고 싶어요...그래서,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싶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그 어떤 존재로든 머물 수 없는...이내 떠나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차를 정차시킨 곳은 다대포 앞바다였다.
한 낮의 기온을 생각해 옷을 입었다가 바보처럼 떨어대었던 때를 떠올리면서 나경은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시폰형 블라우스를 입은 것을 그 중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우와~ 이렇게 넓은 백사장은 처음 봐요."
이 여잔 도대체...어느 땐 나이보다 더 성숙한 것도 같고...또 어느 땐 열다섯도 안 되는 것 같애.
"어머...어머...기혁씨...저것 좀 봐."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어머, 어머''를 연발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붉은 기도 있고, 노란 기도 서려있는 저녁노을이었다.
"이렇게 직접 저녁노을을 보다니...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애당초 그 자리에 있었던 하늘과 저녁 노을이었으련만...나경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면 마주 보이는 저녁노을을 가리켰다.
아까까지의 침울하고, 싸늘한 분위기는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주 한정되어 있는 그로서는 그녀의 입가에 웃음을 띄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혁의 입가에도 서글프지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팔은 왜 그러고 있어?"
엑스 자로 팔을 꼬아 걷고있는 나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이거...뒷짐을 지기도 그렇고 해서..."
"이렇게 놀고 있는 내 팔이 있잖아."
기혁은 나경의 손을 잡아주었다.
유일하게 그녀와 할 수 있는 신체적인 접촉이었다.
그렇게 기혁은 속내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을...그녀를 향해 치솟기 시작하는 욕심을 아예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눈물이 많은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속은 문드러지더라도 참아야 했다.
"저기 어때?"
기혁이 가리킨 곳은 ''바다풍경'' 이라는 네온사인이 걸린 카페였다.
끼니를 챙겨 먹는 것보다 커피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오케 사인을 보내는 그녀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주문해라."
메뉴 판을 그녀 앞으로 내밀어주었다.
헤즐넛을 주문하면서 봉지 설탕을 하나 더 달라는 그녀를 따라 향이 죽여주게 좋다는 헤즐넛을 마셔보기로 했다.
종업원이 가져다 준 설탕을 추가로 넣으면서 헤즐넛을 마시던 그녀의 눈가에서 뚝하고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그래?"
대기 불안정에 접어둔 8월의 하늘처럼 순간순간 돌변하는 그녀...
그녀가 또 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한테 어떤 욕심도 내지 않을게...그러니, 울지마...그냥 이렇게 보고 싶을 때...보는 것으로...널 사랑하는 마음은 그냥 속으로 삭일테니까...부담스러워 하지마..."
"기혁씨가 날 먼저 떠나주면 안되겠어?"
그녀가 코멩멩이 소리로 코를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떠나달라며 소리내어 말하는 나경의 가슴도 무너지고 있었고, 떠나 달라는 말을 듣는 기혁의 가슴도 슬픔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난 도저히 안되겠어...어떻게 하면 기혁씨가 내게 염증을 내면서 떠나갈까? 어떻게 해야 기혁씨가 먼저 날 떠날 수 있지?"
"뭐가 그렇게 어려워? 날 만나주지 않으면 되는 걸 가지고."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이 만나자고 할 때.. 샐쭉거리며..바빠요, 피곤해요 라고 해버리면 되는 거지...
그러나, 나경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그와의 관계를 접을 수 없다는 것을...
"또...며칠은 너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아마 난 미친 듯 일에 매달리게 될 거다. 그래도 넌 잘 지내라. 행복하게..."
감미롭고 안타까운 감정이 바람이나 안개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훔치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정작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왠지 두려웠다.
나경은 문득 언젠가 읽었던 <이 정하>님의 글 한 부분을 기억해냈다.
그대를 사랑하면서부터 내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대 하나만 얻기 위해 나는 많은 것을 버렸다.
남들은 정신 차리라고 하지만 나는 결코 정신 차리고 싶지 않았다..
그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자신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대의 사랑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두사람이 만나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대여, 나는 그대를 알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의 사랑이 내 것이 아닌걸 알았다 해도 나는 결코 정신차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 마음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바쳐서 한 움큼만이라도
그대 마음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
그대가 없는 이 세상,그대 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나이기에..
나경은 그를 알고 나서부터는 종종 이성이 제멋대로 이탈되어 버리는 증세에 시달리면서...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간혹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나경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장 기혁 이라는 남자의 어느 한 부분의 ...한 움큼만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