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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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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6장


BY pobi9766 2003-05-20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여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뚜뚝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슬픈 표정이었

다.
스치듯이 떠오르는 기혁의 얼굴에 울컥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아 입술을 사려물었다.

승규를 만나야 한다.
자기취향에 따라 맞추려는 것 빼고는 평생을 함께 해도 여자 문제로나, 경제적인 어떠한 문제로든 가슴 아프게 할 사람이 아닌 남자를...

그러나, 나경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취향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고, 화장을 해야 하고,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것이 번거롭고 싫을 뿐이었다.
구두를 신을 때마다 발바닥에 돋아나는 물집이나 티눈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짜증스러웠다.

"반지 보러 가자. 오늘 밖에 시간이 없어."

"승규씬 늘 이런 식이야. 늘 바쁘다는 말만 하고, 그 속에 나를 꿰맞추려고나 하잖아."

"요즘들어 왜 그런 거야? 오늘쯤에는 나아지려나 했는데..짜증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다."

승규가 볼 때, 돋아지기만 하는 그녀의 재색 기분은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점점 짙어지는 울화의 기운을 삭힐 필요가 있었다.

"그럼 나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면 되잖아!"

"난 여자의 짜증 길게 받아줄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아..."

승규는 나경의 대답을 듣지 않고 핸들을 잡고 방향을 틀었다.

그래. 나는 이 남자랑 결혼 하는 거야...조금은 독단적이긴 하지만, 이만큼 제대로 된 조건을 갖춘 남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지...그래. 난 이 남자랑 결혼 하는 거야.....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 하나에 얽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안으로 안으로 짓눌렀지만, 시야로 꽉 차고 들어오는 보석상 앞에서는 나경은 여지없이 절망하고 말았다.

모든 생활 패턴이 바뀌는 결혼이 두렵긴 하지만, 보석상 앞에서는 괜히 설렌다는 여늬 여자들처럼 기분을 부추겨 보지만, 반지를 쳐다보는 나경은 멀미를 하는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잘 닦여진 크리스탈 진열장에 저마다의 빛깔과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반지는 하나같이 그녀 자신을 옭아 매려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어서들 오세요.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이렇게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테이블에 앉기가 바쁘게 진한 한약내를 자아내는 차가 놓여졌고, 벨벳으로 곱게 겉치장된 케이스가 나영의 앞에 놓여졌다.

워낙 어려워 패물로 14k 목걸이, 반지가 고작이었다는 지영이 봤더라면 꺄아 소리를 내면서 호들갑을 떨어대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왜, 한 마디도 안해?"

"처음부터 자기가 다 알아서 해놓구선...이뻐...이쁘다구..."

퉁명한 어조로 말하던 나경은 이제 그만! 이라는 무언의 행동을 하는 승규의 눈빛에 눌려 뒷말을 버벅거렸다.

반지모양은 아무래도 좋았다.
캐럿이 크든 작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반지를 쳐다보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변해 버렸다는 것...자신의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는 나경의 가슴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보이면서 아프게 쫄아들기만 했다.
쇠사슬에 몸이 꽁꽁 묶인듯한 압박감이 느껴질 뿐, 설레이지도 않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거실로 들어서는 딸아이의 얼굴쪽에서 핸드백을 들고 있는 손으로 바로 이어졌다.

"너, 오늘 박 서방 만난다고 하지 않았니?"

"응...만났어."

"오늘 반지하러 간다고 했잖아, 근데, 왜 반지가 없어."

"있어...가방에...그걸 벌써부터 끼고 다녀, 엄마는...보여줘?"

쇼파에 털썩 주저 않은 나경은 백속에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던 반지 케이스를 어머니의 손에 건네주었다.

"어머, 정말 이쁘구나...손가락에 한번 끼워봐라."

"손가락이 부어서...."

어머니는 살아온 나이만큼 연륜의 깊이를 가진 눈으로 딸의 예사롭지 않은 허전함과 슬픔을 찾아내려는 듯, 손가락에 엄한 멍에를 씌우는 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날씨가 그래서인지 그냥 맨 얼굴로 있기가 좀 그렇더구나...그래서 입술화장을 했단다....그러고 나니까 머리 모양새도 만지고 싶더구나...손거울로 뒷머리를 보는데...거울 속으로 비쳐지는 수많은 내 얼굴에 순간 깜짝 놀래버렸지 뭐니...수많은 허상이 반복되면서 어떤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인지 헷갈리지 뭐니..."

왜 갑자기 맞거울속에 비친 허상의 얼굴을 들먹이는 것인지..나경은 어머니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런 말은 안하고 싶었다만...나경아...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아와야지?''

어머니는 나경의 생각을 훔쳐내기라도 한 듯이 아주 직설적으로....그러나...딸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슬프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어느새 어머니는 딸의 오랜 우울과 그 속에 비낀 파리한 혼돈까지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경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컥하고 쏟구치는 눈물을 애써 감추려했지만,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지도 않은 길에 접어들 때가 있는 거야...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로인해 아파해야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니? 마음이 흔들릴 때면 아파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추스리도록 해야지..피곤했겠구나...들어가서 쉬어라."

어머니의 말대로 그녀 자신을 에워싸고, 그녀 자신을 침몰하게 하는 바람같은 사랑을 그만 잠재워야 할테지만, 나경은 차마 그러겠다는 헛말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나, 어떡하면 좋아....


따르릉.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울음을 삼키고 있던 나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정말 이렇게 끝내버릴 생각인 거야? 이렇게 쉽게?"

"내가 그렇게 흥분했었다는 게 바보같고, 그래서 미안해요....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게 전부인 거야? 미안한 것이 전부냐구? 왜 난 미안하다는 그 말이 끝장 내자는 말로 들리는 거지?"

어차피 잊혀질 사람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지만, 정작 이별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가슴을 에이게 할 줄은 몰랐었다.
일년치 울어 버릴 눈물을 한 사람으로 인해 보름만에 다 쏟아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만나지 이제 고작 한달 남짓 되어가는 남자는 8년을 사귄 남자를 아주 간단히 제껴놓았고, 화상처럼 그녀가슴에 흔적을 남겨놓았다.

나경은 울음을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 것도 아닌데...그냥 친구일 뿐이라구."

"거긴 내 세상이 아니였어요."

"미안해.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건데..."

솔직히 기혁으로서는 사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제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을 때는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면서 헛웃음이 나왔고, 뒤이어 새끼치는 오기에 그녀를 잊어버리는 일쯤은 약에 취해 비실거리는 바퀴벌레 잡는 일보다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혼인신고만 안했다뿐이지..부부처럼 살았던 여자와의 결별도...뭐..시간이 해결해주었으니, 나경과도 옷에 묻은 먼지처럼 손끝으로 탈탈 털어내버리면 그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경과 짠하니 가슴으로 나누던 느낌은 생각보다 더 깊게 가슴안으로 파고 들어 있었던 것이다.

기혁은 게속해 그녀의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왠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내 결혼해 딴 놈의 마누라가 되버릴 여자고, 그것이 현실이었지만...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절절해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 끝이 아려왔다.

레트가 떠난 후 뒤늦게 깨달은 스칼렛의 사랑을 비웃던 내가 이럴수가.....
나경아, 너는 아니? 만나선 안될 우리가 만나버렸고....또한, 해서는 안될 사랑을 해버린 지금...미어지는 내 가슴을...

"기혁씨가 미안해 할 것은 없어요. 내가 아직 그쪽 세상을 잘 알지 못하니까...하지만, 문제는 그런게 아니예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문제는 그러니까...정말 문제는 내가 기혁씨에게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누구에게서나 흔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어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누구에게서나 흔하게 생길 수 있는 감정이라면...내가 할 일 없어 이러고 있겠냐? 정말 돌아버리겠다. 어쨌든 기분 좋은 말이로군. 나만 그런 건 줄 알았거든..."

"그 말을 이제는 쉽사리 믿을 수가 없어요."

"믿든 아니든..그건 당신 마음이겠지...그래, 당신보다 더 오래 채팅을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났어. 하지만 이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야...그래서 나도 힘이 든다구..."

"......."

"당신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가 없어."

아무리 시간에 상관없이 가슴으로 젖어드는 것이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암처럼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 수 있다니...

"그냥 이 감정, 이 느낌대로 날 느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이별 해야 한다면...그래.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때 아파해도 충분히 아프고, 힘이 들텐데...미리 아파할 것은 없잖아. 지금 우리에겐 사랑할 시간도 충분치 않다구....이런 제길...핸드폰 충전이 다 된 것 같다...내일 통화해야겠다...울지 말고...잘 자..."

밧데리가 다 되어간다는 말을 하는 기혁과 또 다른 류의 이별을 해야 하는 나경은 습관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 잡혀 마음이 산란스러웠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면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것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움에 못이긴 나경은 이불을 확 걷어제끼며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밧데리가 다 되어 그와 통화할 수는 없겠지만, 메모리로 남겨져 있는 그의 음성만이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네, 장 기혁입니다."

뭐야?!

음성 사서함에 남겨진 그의 음성을 듣고자 전화를 걸었던 나경은 예상치 않게 들려오는 기혁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사람 분명히 핸드폰 밧데리가 다 되었다고 해놓구선 전화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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