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신문을 내려놓고 살포시 눈을 감은채 여고시절을 떠올려본다.바람에 살랑대는 아카시아 물결에도 가슴설레던 꿈많던 시절, 자잘한 일에도 까르르거리던 풋풋한 그 땐 참 꿈도 많았었다. 어느 조그만 섬에서 시를 쓰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낭랑한 목소리로 새 소식을 전해주는 아나운서도, 솔로몬처럼 현명한 판결을 하는 판사도 되고 싶었던 그녀는 갈매기 조나산처럼 그렇게 세상 하늘을 마음껏 나는 비상으로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갈매기 조나산처럼 모 방송국 아나운서 도전, 교육대학 응시 실패 등 몇번의 비상으로 내리꽂는 실패의 좌절감을 맛보았다. 결국 그녀는 낙도의 선생님, 아나운서, 판사는 못 되었지만 300명을 웃도는 웅변 글짓기 학원의 주임강사로 아동들의 말과 글을 키워나갔었다. 어찌보면 그녀는 그들을 가르친다기보다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찾는 기쁨을 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남편의 열렬한 구애 편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도 그 속에 안주한 채 아이들의 눈망울에 맺힌 자잘한 이야기를 엿보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떠 창밖을 응시했다. 가시 덩굴 사이로 빨간 장미가 푸른 잎 사이로 각혈처럼 빨갛게 피어 누군가의 시선을 부르고 있었다.
재 작년, 시어머님의 급작스런 뇌출혈로 별세를 하시자 시 이모님께서는 가시 덩굴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며 장미를 밑둥까지 잘라버렸다.그런데 그 장미가 어느 새 자라 또 다시 담을 기어오르고 있으니....
그녀는 그런 장미를 보며 다시금 비상하고픈 욕구가 솟구쳤다.
"그래,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건 아냐, 한 번 날아보는 거야, 오르다 날개가 꺽여 내리꽂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해보는 거야."
그녀는 용기를 내어 신문사 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또르륵. 또르륵."
신호음이 그녀의 귓전을 넘어 가슴까지 울려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되었다. 더구나 심장 고동 소리까지 신호음에 박자를 맞추며 그녀를 초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조명 아래서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이처럼 긴장되지 않았는데.....
"녜, 00신문삽니다."
"저, 리포터 모집 보고 전화 드립니다. 서류는 무엇이 필요하고 또 어떤 일을 하는지요?"
"아. 그렇습니까. 제가 바로 담당자 김 영철입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써서 내사 하시면 됩니다. 특히 자기 소개서를 자세히 써 주셔야 합니다.그리고 하시는 일은 내사하면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내일 서류 준비해서 2시쯤 방문하겠습니다."
그녀는 수회기를 내려 놓고 숨을 한 껏 몰아쉬었다.
"후-"
마치 진공 상태의 긴 터널을 헤쳐 나온듯한 느낌이 들정도로 잔뜩 긴장하였던 자신을 떠올리곤 새삼 마흔의 나이를 실감하였다.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아랫배가 우리지근하게 아플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왼쪽 무릎에 약간의 통증과 함께 약간의 뇨가 분비됨을 직시한 그녀는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가 속옷을 내렸다.은행알만큼 젖은 속옷이 그녀를 슬프게 했지만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변 줄기에 새로운 도전을 심어보았다.
"솨-솨아아."
비염, 건망증, 무릎 통증, 요실금으로 힘든 마흔의 나이에 새로이 도전하려는 희망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였다. 담장을 기어오르는 붉은 덩굴장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