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러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어도, A의 머뭇거리는 모습에서 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오후였었다.
A보다 먼저 퇴근을 해서 백화점의 지하매장을 둘러 본 후 A와 1층 로비에서 만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J씨와 관련해서?”
“저…”
“뭐야?”
“괜히 오해하시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시면 안 되요…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저는 사실 팀장님께 폐를 끼친 것도 있고 해서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요…”
A의 장황한 전언이 갑자기 짜증을 불러 일으켰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내와 J와의 관계에 관해서 오해 섞인 얘기들이 팀내에서 오가고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요…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팀장님 걱정하지요…사실은..”
“뭔데…A씨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불안하고 더 궁금하고 그리고 기분도 나빠지려고 하는데?”
“음…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팀장님도 대책을 마련하셔야 하니까…그냥 말씀드릴께요.”
“그래, 뭐든 얘기해봐”
A의 말에 의하면, 부장이 출장 후부터 남자 팀장들과 회식이 늘었고, 부장의 입에서 나의 태도가 출장 후에 많이 건방져 졌으며, 부장에 대해 부하직원으로서의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는 성토가 연일 이어졌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에 더하여 우리 팀이 큰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마된 사실과 사장이 오히려 나를 감싸고 돈 사실은 사장과 내가 불미스런 관계일 수 있는 개연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 J와 나 사이의 잦은 전화통화나 점심 약속 등은 내가 ROYAL FAMILY에 붙어 사내 스파이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해서, 미국 출장 후 알게 된 로버트가 우리 회사의 고문 변호사 역할을 하기 위해 일년에 몇 개월 체류하기로 한 이후 나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이 로버트를 대신하여 식당 예약을 했던 비서로부터 말이 나와서 로버트와 나 역시 부적절한 관계이거나 아니면 회사의 구조조정의 깊은 부분에 내가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소문들이지만, 어쨌거나 팀장님이 갑자기 화두가 되어서 여기저기 가십이 나오는 건 일단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우리 팀 다른 직원들도 말은 여기저기서 듣기는 했는데 물론 팀장님이 그럴 분이 아니란 것을 알고 아닐 거라고 얘기들은 했다고 하지만, 어쩐지 다 조심하는 분위기고 보면…”
황당하다거나 기가 막힌다는 정도의 표현으로는 그때 느꼈었던 더러운 기분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능력이 있다고 보스에게 인정을 받고 그리고 누군가와 가끔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저질적인 모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과, 나에 대해 그런 상상들이 가능할 정도의 인물로 밖에 내가 비쳐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사회에 대한, 능력은 없지만 남성이라는 것 하나로 여성을 누르려는 어리석은 남자들에 대한 모멸감을 들게 했었던 것 같다. 더욱이, 내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들이 나의 남편까지도 욕을 보인 거란 생각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가 쉽지 않았었던 것 같다.
A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의연한 듯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회사고 뭐고 이런 더러운 모함까지 받으며 다녀야 하나는 생각에 그냥 ‘그만 두는 것이 낳지 않을 까’ 하고 생각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A의 얘기를 곱씹고 곱씹다가 내가 여기서 그런 말도 안되고 사실도 아닌 소문에 회사를 그만 둔다면 그런 비열한 인간들이 원하는 데로 움직여 주는 어리석은 사람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럴수록 더 의연하게 회사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었다.
아침마다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그때처럼 고역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친구고, 동료며, 가족보다 더 가까이 더 오래 만나는 그들을 나름대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던 자신이 몹시도 어리석게 느껴졌었다. 아침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남자후배들이나, 커피를 빼주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동기들 역시 가증스런 이중 인격의 탈을 쓴 자들이란 생각에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었다.
“네가 회사 스파이고 너와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회사에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로버트의 전화를 받고 회사 근처의 훼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물었었다.
“스파이?”
“그래, 미국 출장에서 너를 만난 후에 네가 한국에 오고 우리 회사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을 부장과 네 비서를 통해서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네 업무가 표면상은 회사의 고문 변호사이지만 실제로는 회사의 M&A전문이어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들 말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얘기다. 그렇지만, 그건 네가 신경 쓸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네 개인의 사적인 얘기까지 나랑 만난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소문거리를 만들고 있다고 하면 나로서도 가만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일단 무시해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겠다.”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로버트의 반응에서 괜한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만일 그가 나를 진짜로 친구로 생각한다면 그런 일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어떤 action을 취해주길 바랬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주변의 소문에 위축되는 것이 안 좋겠다 싶어 더 의연히 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괜실히 스스로 주눅이 드는 것을 느끼면서 이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했었던 것 같다.
J의 연락을 받고 그녀와 저녁식사를 위해 만난 것은 한참 이런저런 회사에서의 소문들로 머리가 복잡할 때 였었던 것 같다.
“언니 요즘 어디 안 좋으세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응. 별거 아니야…그냥 회사를 너무 오래 다녀서 그런지 좀 쉬고 싶네…”
“아니 언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다 있어요? 저는 언니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아닌 가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요…?”
“뭐? 글쎄…내가 그렇게 workholic으로 보였어?”
“아니…그런게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 언니가 빛나 보이기도 하고 뭐랄까 일 외에 별 관심이 없잖아요…언니가 일할 때 보면 꼭 학생이 뭔가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집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예요.”
“칭찬이야? 비난이야?”
“어휴…칭찬이죠…저는 그런 언니 밑에서 일하느라고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데요…”
“뭐?”
이상한 일이었다. 회사에서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녀를 만나는 것이 싫어야 정상적이었겠지만, 오히려 그녀와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나를 위로해주거나 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쥔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나의 현재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사로 그녀를 움직여 보고 싶어했었던 것 같다.
“저 사실은 남편이랑 이혼하기로 최종적으로 협의했어요”
그녀의 갑작스런 이혼얘기에 황당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녀가 나를 위해 움직여 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공허해지는 느낌이 들었었던 것 같다.
“이혼?”
“예…사실 같이 살지 않은 지 꽤 됐거든요…”
“그래? 근데, 지난 번 미국에 안 가는 이유가 남편 때문 이라고 하지 않았어? 떨어져 있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저 한테 남편 때문에 뭘 못하고 하는 일은 없었어요…그때나 지금이나…남편은 그냥 친구 같은 존재였죠…제 감성상담사라고나 할 까요?”
“아니, 근데…내 기억에는 남편이랑 많이 좋아해서 집안 반대 물리치고 결혼한 거 아니였어?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예…맞아요…사랑한다고…아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동안 굉장히 노력하고 굉장히 열심이었어요…저…”
“음…뭔가 사정이 있어?”
사실, 그녀가 별거 중이란 사실은 이미 우리 팀원들을 통해 알고 있었던 바 였고, 그녀의 별거 사실 자체가 내겐 별로 커다란 관심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그녀가 이혼한 것 역시 놀랄만한 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자상하고, 잘 생기고, 조건이 좋고, 더불어 능력까지 있는 남자였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이 (별거와는 별개의) 이외라면 이외일 까…아니면, 알게 모르게 질투해 온 대상의 아픔이 약간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 나의 우위를 확인시켜주는 듯한 묘한 기분을 형성했었던 것 같다.
“언니…결혼 생활이 행복해요?”
느닷없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멍 했던 것 같다. 초보 이혼녀의 기혼녀에 대한 질문이란 사실을 넘어서 그 어투에 묻어 나오는 공허함이 다시금 그녀를 돌아보게 했었던 것 같다.
“글쎄…행복?”
“언니는 항상 결혼생활에 충실하게 보여 져요…회사생활에도 열심이고, 결혼생활에도 열심이고, 그리고…언니는 오빠를 사랑하는 것 같아…”
갑작스런 그녀의 넋두리가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녀와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사이이고 싶지 않았었기 때문일까…? 다시금, 그녀 역시 한 평범한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서 였을 까?
“나? 나는 언제나 J씨를 부러워 했는데…오늘 J씨가 나를 좋게 얘기하니까 쑥스럽다고 할 까? 부끄럽다고 할 까?”
“언니는 언니 자신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언닌 어딘지 모르게 빈틈이 없어요…누가 들어가서 쉴 수 있는 여지를 잘 안 남기는 것 같아요…뭐든 계획적이고 합리적이고 그리고 이성적이고…강한 사람이예요”
대화가 비약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므로, 사실 그녀의 감정이 추스러지도록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마냥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가 않았었던 것 같다.
“J씨 나도 많이 힘들어…나 사실 회사에서 요즘 음해당하고 있고, 집에서는 남편 얼굴보기도 힘들어…나는 뭔가 많이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했고…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서만 있었어…지금 J씨 이혼이다 해다 힘들 수 있지만, 세월이 약이될 거야…나는 오히려 J씨가 부러워…남들이 갖지 못한 많은 것을 갖고 있잖아…”
그녀가 갑자기 나를 뚜러져라 쳐다 봤었던 것 같다.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우울이 묻어나 있었다.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를 나쁜 쪽으로 자극하게 될 까봐,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가 언니를 음해해요? 회사에서?”
“어…별거 아니야…요즘 이런 저런 소문이 많이 돌아서 힘들었어…근데 주변을 둘러 보니까 내가 말하고 위로 받을 사람이 없었어…남편한테 얘기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인간은 누가나 혼자인가 봐…결혼…직장…어떤 중요한 순간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누구에게 기대고 싶다고 생각하면 주변에 아무도 없어…혼자라는 게 너무 실감이 나지…나도 요즘 그래…모르긴 몰라도 아마 J씨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괜히 나같이 볼 것 없는 사람이 모든 걸 갖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는 지도 모르지…”
“글쎄요…어쩌면 언니랑 나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람들인지 모르겠어요…힘들면 서로 만나서 터 놓고 얘기하고 그래요 우리…저 사실은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어요…회사에 다닐 때는 진짜 툭 터 놓고 얘기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으니까…그리고…제 넋두리 받아주신 것 안 잊을 께요…”
“무슨 소리야…오히려 내가 J씨 한테 이런 저런 넋두리 하는데…우리 같이 일할 때 보다 요즘이 더 친밀해진 것 같지? 내가 J씨 회사에 있을 때 잘 못 챙겨줘서 많이 미안했어…”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의 일상사에 대해 알게 되는 것으로 우리 사이가 친밀해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던 것 같다. 한편으론 그녀의 페이스에 내가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던 이유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