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와 사장과의 관계에 대한 가십거리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왠지 모를 불안과 답답함이 오후 내내 나를 지배하더니 집에 돌아갈 시간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아오자 마자 공항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었다. 출근 후 시간 봐서 퇴근하겠다고 얘기를 한 터라 남편이 집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남편은 집에 없었다.
오랜만에 남편을 기다리며 저녁 준비를 했었다. 남편은 담백한 생선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동네 마트에서 오늘 들어왔다는 대구를 사서 지리로 탕을 끓이고 몇 가지 나물거리를 사서 무쳤었다. 대부분 식사를 밖에서 하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식사를 할 기회는 기껏해야 휴일 점심 정도여서 오랜만에 남편을 위해 저녁상을 차리는 것이 몹시 기쁘고 설레었었다. 마치 신혼 초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내 메시지를 받았었는지 남편이 전화를 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자 남편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이미 식사를 했다고 했었다. 일주일이나 외국의 출장으로 얼굴도 보지 못했었고 전화연락도 용이치 않았으므로 오늘 저녁 정도는 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할 줄 알았었는데, 남편이 이미 혼자서 식사를 마쳤다는 사실은 꽤나 나를 실망시켰었던 것 같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들어온 남편은 내게 미안했던지 장미꽃 다발을 사가지고 들어왔었다. 워낙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라 꽃집에서 꽃을 사는 행위 자체를 수줍어했었던 것을 알기에 남편에 대해 섭섭했던 마음이 봄에 눈 녹듯이 다 풀렸었다. 과일과 차를 같이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출장 내내 남편이 옆에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매우 정서적으로 불안했었던 지라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이와 같이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깃드는 것 같았었다.
다음 날은 역시 한국이 최고야 하는 생각과 함께 아침 출근 길의 발걸음이 가벼웠었다. 팀원들 역시 모두 그대로고 오히려 출장을 통해 사장에게 내 능력을 인정 받은 것 같아 출장 전에 느꼈던 불안감이나 배신감은 다 없어진 듯 했었다. 자리에 앉자 마자 걸려온 부장의 호출을 받기 전까지는…
“어…어제는 잘 쉬었나?”
“네.”
“그래…요번 출장에서 참 수고 많았어요…사장님도 Y씨가 우수한 인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더군…그래서 말인데…그럴수록 조심해야지…앞으로 다시 그런 실수로 회사에 누를 끼치면 안돼…아무래도 팀장도 없고 해서 그 팀의 분위기가 좀 소란스러웠던 것 같아….여자들만 있어서 그런지 우루루 몰려 다니고 업무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키득키득 거리고…당신이 팀장이니까 앞으로 그런 관리차원에도 신경을 좀 써줘요…아무래도 다른 팀들에서 항의가 많아…”
“네…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부장에게는 아마도 내가 몹시도 아니꼽게 보여진 듯 했었다. 그래도 그 나이에 외국 유학까지 하고 자신의 동기들 보다 먼저 승진을 해서 부장이 된 사람이었는데 몇 년 사이에 회사의 판도가 바뀌면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진 것을 느끼는 지금, 아마도 부장에게는 자신의 편이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으면,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거나 더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부하직원은 제거해야 했었을 것이다. 미쳐 내자신이 후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었다는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었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 내 동기였던 남자들은 대부분 과장 직함 정도를 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중에 아직 팀장으로 승진된 케이스도 없었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들의 시선이 다 고울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우리 팀 역시 거의 아마조네스의 수준이었으므로, 부서 전체의 회식이나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남자 직원과의 술자리에서도 대부분 2차를 마지막으로 끝내기 마련이어서 사실 다른 팀의 남자 직원들과는 툭 터 놓고 지내기 보다 오히려 묘한 경쟁관계나 성에 의한 알력으로 희생이 될 수도 있는 섬이었다는 사실은 후에야 깨닫게 됐었다.
K와 L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 부장이 아침에 했던 얘기를 일러주며 당분간은 좀 신경을 쓰자는 말을 했었다. L과 K는 최근에 갑자기 구조조정에 관한 얘기가 화두가 되었다면서 아마도 그 여파 일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특히, K는 아직 신참이라 회사 내부 조직의 정치관계에 대해 여기저기 흩어진 동기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다시 있을 거란 얘기를 들었었다고 했었다.
“정기 인사 이동이 있은 지 얼마라고 벌써…”
실제로 정기적인 인사 이동이 일년에 두 번 있었기 때문에 봄의 인사 발령이 있고 얼마 후에 있는 가을 인사발령은 대부분 승진 등에 관한 것이 소폭으로 발표되었었기에, 가을 인사 이동이 대대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됐었다.
“아니예요…어쩌면 K씨 말이 맞을 지도 모르죠…요새 우리 회사 감사 받고 있고 그리고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투자 건으로 컨설팅을 받고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외국에서 특채로 직원들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만일 투자 건이 성사되면 전반적인 시스템 조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런데…실제로 현재 우리 회사의 전반적인 구조조정을 할 정도의 투자 건이 아니고…내가 알기로는 아마도 주식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연출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그게 실제 상황인가? 만약에 진짜로 외국의 회사와 합작을 하거나 투자를 받고 지분의 일정 부분을 넘겨 줘서 우리가 그 회사와 조인트 벤처 형식으로 운영이 되더라고 외국회사의 시스템을 그대로 승계하지는 안지…그냥 우리는 그대로 하고 다만 회사 운영으로 일어나는 수익을 배분하는 게 고작이야…”
회사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 소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실수라면 실수였었을 것이다. 우리 팀의 경우 직원 한 사람의 생산성이 타 팀보다는 우수하다고 판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PRIDE를 갖고 일을 하였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구조조정이니 인사발령에서의 불이익이니 등에 대해 무시하려던 경향이 있었던 것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었다.
식사를 한 후 회사 앞의 백화점을 한 번 둘러 본 것으로 산책을 대치하고 사무실로 들어왔었다. 웬 전화메모가 있어 이게 뭔가 하고 보다가 놀랬었다. ‘로버트…’ 출장 중 저녁식사 때 만난 적이 있었던 ‘로버트’라고 했던 미국 변호사의 메모였다. 자신의 호텔 룸과 전화번호를 메모시켜뒀었다. 일단 한국에 와 있다면 인사라도 하는 것이 예의다 싶어 전화를 했었다. 마침 방에 있었는 지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올 계획이 있었는지 몰랐었다. 잘 왔냐?”
“잘 왔고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나 할 까 해서 전화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고, 언제까지 있을 건지 알려주면 시간 날 때 식사 같이 하자”
의외였었다. 우리가 귀국하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 있는 줄 몰라서 이기도 했고, 나를 기억하고 전화를 해준 것이 고맙기도 했었고 아무튼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로버트의 전화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는 그날 오전의 부장의 얘기로 좋지 않았던 기분이 풀렸었다.
“팀장님…전화왔었는데요…”
A가 내게 전화메모를 건네줬다.
“와..오늘 날 찾는 사람이 많네…”
“근데…J씬데요…”
“그래?”
J라는 얘기를 들어서였을 까, L이 내 쪽을 한 번 힐끗 본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아닐 꺼란 듯이 L을 한 번 쳐다보고는 메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그녀와 사장과의 관계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혹시 내게 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건조하고 차가왔다.
“아 J씨 전화했었어?”
“아…언니…점심 식사 나가셨었어요?”
“응…그래 잘 지냈어?”
“네…언니 출장간 동안 팀원들하고 한 번 식사했었는데…”
“그래…얘기들었어…”
“시간 좋으시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 하고요…”
그날 따라 저녁을 같이 하자는 사람이 많았었다. 일단 저녁 선약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그 뒷날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었다. 저녁시간은 아주 친한 친구나 팀원들 아니면 가족과 보내고 싶었었기 때문에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가능한 한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긴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던 내 습관에 기인한 약속이었었다.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녀가 내게 꾸준히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면서부터 였었었던 것 같다. 그 즈음이 회사의 일도 안정적이었던 때였고, 남편도 시험을 본 후라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었기 때문에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었고, 친구들과는 결혼 후 자주 만나기가 점점 힘들었었기에, 그녀가 안부를 묻는 전화라 든 가, 가끔 점심을 같이 하면서 한담하자고 하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내 관심이 나를 그녀와 만나게 했었지만 만날수록 내가 모르던 따스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었기에 그녀에 대한 나의 편견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던 것 같다.
“팀장님 요새도 가끔 J씨한테 전화 와요?”
어느 날 느닷없는 A의 질문에 왜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A는 그냥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다는 말로 얼버무렸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팀원 모두 그녀와 사장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 그녀의 잦은 내게로의 전화와 가끔씩 내가 그녀와 점심을 먹는 사실이 어쩌면 껄끄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괜히 그녀와 친해지는 것으로 팀원들과 형성한 어떤 하나라는 공동체라는 의식을 흐트러트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전화하면 전화가 왔었다는 얘기 식사를 하면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는 얘기 등을 모두 했었지만, 그 후로 팀원들이 그녀에 대한 얘기를 내 앞에서는 가려서 하는 것을 문득 문득 느끼고 있었기에, A의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싶어졌었다.
“응.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전화 오는 것 같은데…왜?”
“아니…그냥…”
“아이구 이 사람아…걱정하지마…그냥 전화 와서 만나는 거고, 회사 일이나 개인 연애사 같은 것은 얘기도 안 해…그리고 아무려면 내가 J씨 만나서 우리 팀 얘기하면서 혹시 A한테 들은 얘기할 까봐?”
“아니요…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뭔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려다 못하고 말을 하려다 못하고 하는 A를 보면서 이 친구가 내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A씨 우리 저녁에 식사나 같이 할 까?, 약속있어…”
“네…근데…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었다.
“그래…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