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여성 손님에게만 수건 이용요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92

[제8회]


BY lovjh 2003-05-02

“어디서 봤는데…”

궁금해 하는 L과 S 등의 성화에 못 이겨 K가 말했다.

“요 앞 백화점에서요…친구랑 백화점 갔는데…만났지요…”
“그래서 인사라도 했어?”

L이 추궁하는 듯, 다그치듯 묻자 K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부정하며 말했다.

“아니요. J 언니가 먼저 보고 말을 걸어서 인사하고 친구가 있어서 그냥 바로 헤어졌죠. 근데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더라구요. 얼굴 표정이 밝지도 않고…”
“나는 집에서 쉬면 너무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집에 있는 애들 얘기 들어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가 봐요…오히려 더 힘도 없어지고 무기력 해지고 그런 면이 있나 봐요…그래서 회사 다닐 때가 더 낫다고 다들 그러쟎아요…”

A의 말에 S는 수긍하지 못 하겠는지

“아니야…그래도 회사에서 업무에 치여, 사람에 치여,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것 보다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집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

라고 말했다. 너무 쓸데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 정리하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한 후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무엇이 더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것 일까? 나는 나의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일을 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의 존재 가치를 찾는다기 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가능하다면 누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취미생활하고 내가 좋아하는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으면 하고 바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동대문, 남대문 재래시장으로 가서 천을 떠서 커튼도 만들고, 요리도 해먹고, 그리고 집안 인테리어도 직접 해 보고…이런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결혼 후 시댁이나 남편이 직장생활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퇴사를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내게는 그런 배경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씁쓸했는지 모른다.

물론, 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림만을 하는 친구 중에는 남편이 가져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시부모에게 생활비를 얻어 쓰고 하는 것 역시 고역이라고 하소연 하며 남편과 출근하는 여자의 뒷모습이 가장 부럽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일한다는 것은 많은 편견과 장애를 이겨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나로서는 가정에 안주하고 싶은 바람이 종종 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떤가? 그녀는 생활비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직장생활이 나와 같은 사람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집에서 살림 만 한다고 하여도, 그 역시 평범한 가정 주부의 그것과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이 벌어주는 돈을 한 푼이라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하루 종일 아이와 집안 살림에 치여 사는 평범한 여자의 전업 주부 생활과 그녀의 주부생활은 그 차원이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 잠시 잠자고 있던 그녀의 그런 편안한 환경에 대한 질투가 솟아오르는 듯 했다. 마치 귀족의 딸과 가난한 평민의 딸의 삶의 차이처럼…

외국 파트너와 우리 회사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국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던 우리 팀으로서는 여름은 다른 부서와 팀에 비해서 생래적으로 한가할 수 밖에 없었다. 통상 우리의 상대방들은 길게는 두 달에서 보통 2주일 정도는 바캉스를 떠나기 때문에 우리 팀원들의 휴가에 외국 파트너들의 휴가가 겹치기도 하려니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국내외 전시회 역시 봄, 가을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날씨와 업무 모든 면에서 나사가 풀린 듯 지내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그런 지, 오히려 여름에 처리되는 일들에서 실수가 많이 생기 곤 했었다.

그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A가 전문을 서로 다른 파트너에게 송부하는 바람에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었다. 서로 경쟁 상대였던 파트너들에게 우리 회사가 다른 오퍼를 한 것이 알려지게 되어서, 우리 팀이 만들어 진 이래 가장 큰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우선, 해외영업이사와 부장, 나, 그리고 L이 각각의 파트너에게 사과 전문을 보내고 사장과 영업부장과 내가 급하게 해외출장을 가게 됐었다.

“이봐 당신은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얼마나 사람들이 긴장이 풀어져있으면 그런 중요한 전문을 그것도 태연하게 바꿔 보내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결재도 안 하나? 그런 중요 서신에 대해서 나는 결재 한 번 받아 본 적도 없고…이래서 일이 잘 되겠어…이러니…요즘 젊은 것들 일하는 거 믿을 수가 없다는 얘기 듣는 것 아냐?”

사장과 이사에게 크게 깨지기라도 했는 지, 우리 팀까지 직접 와서 서류를 치며 길길이 소리 지르는 부장을 향해 한 마디 반격도 못하고 당하기를 사나흘 했을 때, ‘아! 이게 기화가 되었구나…’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회사 전체를 놓고, 여자가 팀장을 하고 있는 팀은 우리 밖에 없었었기 때문에, 여자가 팀장이라서 규율이 없고 긴장이 풀어져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라는 부장의 말을 연일 들으면서, 그리고, A의 실수는 사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고, A가 결재 없이 마음대로 전문을 보낸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이 우리 팀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얘기를 아침저녁으로 들으면서 너무 힘이 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10년간의 회사생활을 타인의 사소한 실수로, 그것도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상황을 책임지고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뭔가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감이 들었었다.

사장과 직접 면담을 한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사장에 대한 루머와 A를 통해서 들었던 사장의 개인사가 오버랩 되어 이미 상종할 수 없는 나쁜 인간쪽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던 터라 출장을 위한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던 날의 사장의 행동이 몹시나 의외였었다.

“우리가 보낸 서신의 내용과 그 전에 우리가 오퍼 했던 내용, 그리고 그 쪽과 우리의 연간 거래량과 기존 거래 총량, 그리고 우리 쪽 경쟁상대와 그 쪽에서 컨텍 해서 다시 계약 진행할 수 있는 개연성에 관해 충분히 조사가 되었으면 됐습니다.”

실수가 일어난 이유와 영향, 그리고 해결책, 그리고 미팅 시 우리 쪽에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데이터를 뽑아 출장 시 주의할 사항까지 나름대로 의견을 개진했었다. 못 마땅한 듯 내내 나를 갈구던 부장과 달리 사장은 전혀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매우 젠틀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부장과 사장의 얼굴과 태도가 겹쳐서 내가 알던 사장이 부장이고 부장이 사장이 된 듯한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장의 낮은 저음의 똑 부러지는 듯한 말투와 몸에 밴 듯한 에티켓이 나를 더 당황하게 했었다. 특히, 부장이 뭔가 나를 향해 말하려 하자 나를 보더니 갑자기 출장 준비하느라고 수고했다고 말했을 때,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느껴졌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히려 내가 먼저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사장을 스칠 때 나던 향수 향처럼 말끔하고 상쾌한 사람이 아닐까하고 생각했었다.

출장 준비로 사나흘을 거의 밤을 새다 시피하고 L에게 업무인수를 한 후 출국하기 전날, 그 동안 너무 화가 나서 눈길 조차 주지 않고 말도 시키지 않았던 A를 불렀다. A 역시 모든 팀원과 특히 부장에게 연달아 당하는 나에게 미안했었던 지, 그 동안 풀이 많이 죽어 있었었다. 잠깐 얘기나 하자는 내 말이 불안했었는 지, A는 보기 처량할 정도로 기운 없이 내게 왔었다.

“A씨, 나 회사 들어와서 이런 일이 처음이야…어쩌다 A씨가 결재 받지도 않은 전문을 그냥 보냈는지…어쩌다 그런 실수로 작성된 서신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 지 모르겠지만…사람이 직장생활하다 보면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우리 팀에서는 신입이나 마찬가지니까 이 번 일을 계기로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런 실수하면 안 돼? 알았지…그리고 기운내…별일 없을 테니까.”
“네…”

시무룩히 기운 없이 대답하던 A가 갑자기 눈물을 떨궜다.

“어…A씨 왜 울어? 누가 보면 내가 A씨 나무란 지 알겠네…나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신경 쓰지 못했고, A씨도 잘 한 거 없으니까 이제 그만 하고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

목례하고 돌아서는 A가 계속 울었기 때문에, 기분이 편치 않았었다. 특히, 다른 때 같았으면 나도 부장 못지 않게 화를 냈겠지만, 왠지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듯 느껴졌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내 회사생활이 내게 즐거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애할 때도 회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가는 출장이 남편을 약간 걱정시킨 면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내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아느 양 남편도 구체적으로 캐 묻지 않았었다.

주로 전시회 관련으로 출장을 다녔던 나로서는 이런 사과와 관계 개선을 위한 출장에 그것도 사장을 대동하고 가게 된 것이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것이었다. 회사의 오너와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사장을 가까이 모신 사람들의 경우 다 뒤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