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기간 동안은 어쩐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느슨하고 들떠있는 듯함을 막을 수는 없었다. 휴가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다른 동료 역시 자리를 비우게 되기 때문일까? 틈틈히 보이는 빈자리가 여백의 시원함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했었다. 휴가 후 처음 출근 일에 역시 혹시나 하는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기 위해 서둘렀지만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A와 S가 미리 출근한 상태였다.
“안녕?”
“잘다녀오셨어요?”
얼굴이 그을린 것 같다고 S가 얘기했다. 물 설고 음식도 익숙하지 않았던 탓일 까? 약간은 여의어 보인다는 A의 말도 듣기 좋았다. 모처럼 한산한 사무실에서 아침 TEA TIME을 갖기로 하고 여행에서 재미있었던 것, 신기했던 것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얘기를 늘어 놓았다. 그러다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A에게 물었다.
“저기 사장…휴가 갔어?”
“네?...휴가요?...아니요…사장은 휴가 웬만해서는 안 써요…아마 지금쯤 유럽 출장 중일걸요…”
“유럽 출장?”
“예…항상 유럽이 본격적으로 휴가철 되기 전에 지사 둘러 보고 격려하신다고 한 달 정도 가세요…올해는 좀 일이 있어서 늦게 출국하고 일찍 돌아오실 거예요. 아마 모레쯤인가 돌아오시는 걸로 알고 있는 데요…”
아 그럼 혹시 진짜 사장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후루룩 따끈한 커피를 꿀꺽 삼키고는 아직 채 커피향이 가시기도 전에 A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사장이 런던에도 들러?”
“예…항상 런던으로 먼저 가세요. 원래 영국에서 유학해서 친구들도 있고…그리고 거기 지사가 제일 규모가 크니까…요번에도 출장 스케쥴 제가 짜서 언제나 처럼…런던으로 먼저 가셨어요.”
“그래…”
“혹시 만나셨어요?”
“엉?”
갑작스런 A의 질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잠깐 당황했었다.
“아니…뭐…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해서…”
A는 사장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2박 3일 정도를 런던에 체류하고는 다시 암스테르담을 거쳐 프랑크푸르트와 로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보름이 좀 안 되는 빽빽한 일정이라고 알려줬다.
“언니 사장 봤어요?...정말 재수없었겠다…하필이면 휴가 중에 사장도 만나고…”
S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니 뭐 재수가 없을 것까지는 없고…사장 비슷한 사람을 보긴 봤는데…그쪽에서는 나를 본 것 같지는 않고…무슨 상관이야? 근데…그냥 좀 궁금하더라고…”
하나 둘 사람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채우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어서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갔다. 들떠 있는 분위기에 나의 유치한 호기심이 겹쳐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졌었다.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몸이 나른해짐을 느꼈었다. 사무실 안의 찬 에어컨 공기도 작열하는 한낮의 여름 더위를 막을 수는 없는 듯, 점점 기세를 잃어서 오후 세네시가 되면 사무실 안도 후덥지근 한 것 같았다. 나른함을 떨치려고 노력하면서 휴가간 L의 업무로 A와 얘기를 하고 있을 때…인터폰이 울렸다.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세요?”
그녀다. 좀 황당했다. 런던에서 그녀를 본 이후로 그녀와는 다시 보지 않았으면 하는 뭔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는데…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잘 지냈어? 그때 식사같이 못했지? 어떻게 지내?”
궁금하지도 않은 그녀의 근황을 사무적으로 물었다.
“잘 지내죠…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어…어떻게 알았어? 나 없는 새 전화했었어?”
“아니요…런던에서 뵀어요…언니는 저 못 보셨나봐요?”
이게 웬 날벼락…그녀가 나를 본 것이 맞았구나…결코 듣고 싶지 않던 얘기를 그녀의 입으로 들었다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투에서 어쩐지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꼈었던 것 같다.
“시간 좋으실 때 한번 뵙고 싶어요?”
“그래…글쎄…내가 업무가 좀 밀리고 그래서 당분간 좀 바쁜데…”
그녀를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녀를 만나면 뭔가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될 듯한 불안감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게 했었다.
“음…제가 드릴 말이 있거든요…만나시죠?”
어라…그녀의 무례한 말투에 기분이 나뻤다. 강요하는 듯 느껴진 그녀의 말투에 일침을 놓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J씨 당분간은 내가 좀 바쁘고, 시간나면 내가 전화할께…그리고 내가 J씨가 만나고 싶다고 항상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어…기분 상하셨어요? 제가 좀 말 실수를 했네요…제가 점심시간에 맞춰 한 번 찾아갈께요…그럼 안녕히 계셔요.”
뚝하고 끊어지는 그녀의 전화에 몹시 언짢았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A가 나를 보고 있었다.
“J 미국 간다고 하지 않았어?”
멍하니 서 있던 A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예…미국 간다고 해서 저희가 비행기표 같은 거 다 준비해줬었는데…”
괜히 죄 없는 A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고, A는 황당한 듯 내게 대답했다.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띵’한 기분이었다.
“아니…예…왜 이래…지가 점심 약속도 어겼으면서 바쁘다는데 굳이 만나자고 생떼야…”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혼자말을 누구나 들리게 했었다. S까지 놀란 듯 내 쪽으로 오더니…
“왜그러세요…”
“아니, J 미국 안 갔나봐…꼭 만나야겠다네…”
“왜요?”
“낸들 알아? 웃겨…”
불쾌함과 왠지 모를 불안함이 교차하는 오후였다. J는 그로부터 이틀 뒤 점심시간을 맞춰 사무실로 나를 만나러 왔다. 이미 온 사람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해서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고 회사근처의 FAST FOOD 점으로 갔다.
“나는 아침을 먹었더니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샐러드 먹을 까 하는데…J씨는?
“저도요…”
약간은 침울한 그녀의 분위기에 어딘지 모를 안 쓰러움도 느꼈지만, 퇴사한 직원한테 휘둘리는 듯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샐러드 바에서 이것저것 야채를 잔뜩 담아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J는 오렌지 주스에 푸실리가 들어간 야채샐러드를 조금 담아왔다.
“얼굴이 좀 상한거 같은데…어디 안 좋아?”
“아니요…좀 피곤해요…”
“요즘 새 직장에 다녀?”
“아니요…좀 생각할 게 많아서요…”
“그래…”
그녀와의 겉도는 그런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로 인해 내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 싫었었던 것 같다.
“근데…할 얘기가 뭐지?”
“저 봤다는 말 다른 사람들한테 하셨어요?”
그녀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J씨 맞았구나…나는 혹시…나…하고 그냥 닮은 사람을 본 줄 알았지?”
왠지 나에게 묻는 그녀가 안쓰러워 별거 아니라는 듯 관심없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었다.
“그때…저 말고 다른 사람도 보셨어요…?”
얼른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은 아니었었다. 솔직히 얘기하는 것도, 그렇다고 못 봤다고 얘기하는 것도 모두 우스운 꼴을 연출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셨어요?”
“아니…근데…혹시 J씨는 나 봤다는 말씀 드렸어?”
나를 한 동안 빤히 쳐다보다 그녀가 힘 없이 말했다.
“아니요…”
“근데…왜 그게 궁금하지…”
“예?”
나로서는 그녀가 내가 그녀와 사장이 같이 있었던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해 궁금해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물었었다.
“왜…내가 J씨가 사장님하고 같이 있는 것을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는 지가 궁금한지 이상해…?...나는 별 것 본 것도 없고…J씨가 애써 회사까지 찾아와서 내게 그런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 좀…이상하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내가 그녀에게 말했었던 것 같다.
“사실…그냥…사람들이 저와 사장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게 싫어서요…제가 회사 그만 뒀는데…또, 오빠랑 같이 어딘 가에서 만났다는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게 싫어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와 사장에 대해 주변에서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은 팀 안에서도 더 이상 없었다.
“글쎄…나는 그런 얘기 들은 적도 없고…나도 J씨 얘기는 한 적 없으니까…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갑자기 그녀가 생기를 찾은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좀…당황하셨죠?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군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뭐…오해할 게 뭐가 있어? 근데…미국 갔다고 들었었는데…”
“아…예…가려다가 계획을 바꿨어요…남편하고 상의도 해야 하고…그리고 뭐…혼자 미국에 있는 것도 외로울 것 같고요…”
그녀가 하는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별거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었기 때문에, 그녀의 거취문제에 그녀의 남편의 동의가 필요한 지가 의문이었고, 그녀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좋다는 친미 찬양론자쯤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미국에서의 외로움을 운운하는 그녀가 납득이 가지 않았었다. 특히, 그녀와 사장의 관계는 몹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었다. 내가 본 그들의 관계는 정상적인 오누이의 모습은 아니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됐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