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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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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인디핑크 2003-04-14

아무일도 없는 하루하루의 이어짐이었다.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는 난 내 안에서만 쉴새없이 빈속에 게보린을 한줌 털어놓은듯 기분 나쁜 떨림과 진흙 뻘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음을 반복할 뿐이었다.
길거리에 걷고 있는 아무나를 붙들고 싶었다. 나와 같은 떨림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서 이 무시무시한 "비정상적인 열정"을 없애 버리자고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불길이 닿아서 타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만들자고, 그 불길이 그 열꽃이 어디 있는지 혹시 아냐고 묻고 싶었다. 마치 길가는 중년의 남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담뱃불을 빌리는 또다른 중년의 남자처럼 그 불길을 빌리고 싶었다.
난 내 스스로 타버리기로 했다. 있냐고 물어보지 않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의 주머니를 뒤져 그의 라이터를 찾아내서... 혹시라도 담배 따위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 무안해 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고 돌려 보내기로 했다.

난 그를 만났다.
너무도 말라 몸전체는 못생긴 골격 위에 거죽을 간신히 발라 놓은 듯하고, 게다 비위상하게 흰피부, 커다란 두개골위에 아무렇게나 심어놓은 듯한 가는 갈색의 머리카락들, 크지만 매끈하게 내려오지 못한 콧선, 커다란 입에 테두리만 둘러 놓은 듯한 얇은 입술 ....
교양수업이 있던 공대 강의실 앞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때, 난 에밀졸라의 소설속 인물을 떠올렸다.
라캥 부인의 과보호속에 약을 입에 달고 살던 유일한 혈육, 파리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터질듯한 열기를 참지 못하던 여자와 살던 선병질적이고 약해빠진 그 남자. 결국엔 아내 테레즈 라캥과 그녀의 정부에게서 살해당하는 하얗다 못해 퍼런 남자였다.
그는 졸라의 소설속에서 걸어나와 내 앞에 서있는듯했다.

미간에 늘상 잡혀있는 신경질적인 주름은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무의식중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수업시간마다 일부러 그의 옆에 앉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커다란 카키색 이스트백에 터질듯이 책을 넣고 극장식 강의실 한켠에서 두텁고 조사만 한글로 쓰여진 책을 뒤적이며, 젊은 강사의 여성학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오래 참느라 혼났다는 식의 몸짓으로 벌떡 일어나 미련없이 나가 버렸다.
난 그가 나간 뒤 한참 동안을 빈강의실에 남아 있다가 모든 사람이 빠져 나간 뒤 내 옆 그가 앉았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가 책을 올려 놓은 접이식 책상에 볼을 대어 본다. 차고 비릿한 느낌이 들었다.

졸라의 테레즈의 몸속의 숨어있는 열과 독기를 밖으로 뿜어내, 그녀의 정부와 공통의 드러난 고통으로 만든건 그녀의 힘없는 남편이 싸늘한 시체로 물속에 가라앉고 부터였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만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나올것이다. 그리고 갈등없는 끝이 보일 것 같았다.
다음번 수업도 또 다음번 수업에도 그는 의무적으로 그 공간을 채우듯이 하고 가버렸다. 난 그가 보는 그 단순하고 줄거리 없는 조사만 한글인 책속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 날도 그와 다른 사람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빠져 버린 넓은 강의실 그와 나 단둘이 남았다.
하지만 빽빽한 지하철에서 난 자리를 탐내듯 그의 접이식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음의 행선지를 잊어 버린 것일까? 아님 책 속 한자들이 그를 오늘따라 놓아 주지 않는 걸까? 어느 순간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내 시선을 느꼈는지, 늘상 잡혀있는 미간의 주름을 더 짙게하고 뜨악하게 날 쳐다 보았다. 저렇게 역겨울 수가. 사람이 저렇게 더러운 표정을 한순간 지을수 있을까? 난 그를 향해 입가를 한껏올리고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열 계집을 마다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는 여자를 막지 않았고, "왜 그러시죠?" 미간의 주름이 가는 선만 남기고 쫘악 펴지며,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돌때 그의 얼굴은 너무 낯설었다.
아뇨, 당신이 너무 맘에 들어서요. 혹시 무슨 과예요? 여자 친구 있으세요? 저랑 한번 만나 보실래요? 그는 이런 말들을 한껏 기대하고 날 쳐다보는듯했다. 그의 그런 단순한 기대를 좀 더 그럴듯하게 들어주고 싶었다. 난 무척이나 부끄럽지만 오랜동안 당신을 보아왔고 당신이 너무 맘에 들어 참을수가 없어서 비록 여자 이지만 먼저 이렇게 말을 하노라하고 말이다.
그래서 난 " 법학과세요?, 책이 굉장히 두껍네요. 공부하기 힘드시겠어요." 그는 언뜻 지나가는 너무도 자랑스러운 표정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세련됨을 보이려고 잠시간 뜸을 들이더니 "어.... 어렵지 않은 공부가 있나요? 그냥 하는 거죠. 무슨 과세요?" "이 수업 들으세요?" 난 그의 책을 다시 쳐다보았다. " 아, 시험이 임박해서요. 아직도 볼책이 많거든요. 글쎄 시험 앞두고 볼 기본서하고 문제집을 쌓아 보니까. 제 키보다 훨씬 넘는거 있죠? 그걸 다 봐야 하니까. 시간이 없더라구요..... " 그는 아주 말이 많았다. 말을 한다고 하기 보다 묽은 타액과 함께 쏟아내는듯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어린 호기심 따위는 굳이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그는 자기 자신에게 빠져버려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밥 먹었어요? 밥 먹으러 갈래요? 전 맨날 고시원에 딸린 식당에서 먹거든요. 시간 아껴야 하니까. 아직 3학년이지만 졸업해서 까지 여기 매달리려면 시간을 좀 벌어 놓으려고 1학년 2학기때 부터 시작했어요. 힘들긴요. 뭘요. 저희 아버지도 행시 보셨는데요. 뭐. 그 당신 더 힘들었을 꺼예요. 네 그렇죠. 아버지 영향을 좀 받은 것도 있어요. 오늘은 지연씨 덕분에 고시원 식당 하루 쉬죠. 뭐, 아니예요. 오늘 몇시간 덜 자면 되요.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근데 말 놔도 되나...요? 네 고마워요. 그럼 96? 아 그렇구나. 얼굴도 예쁜데 그동안 남자 친구 없었어?......"
대학안에서 여자가 이성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건 너무나도 쉬웠다. 적당하고 만만한 상대만 잘 찾아내면, 말도 몇마디 필요 없었다. 그의 역한 집안 자랑과 공부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엄살을 비웃음 없이 들어주고, 간혹 애정어린 눈빛을 그리고 잠자리에 대한 가능성을 약간씩 비춰 주기만 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