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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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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BY 액슬로즈 2003-05-12

재즈바의 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 진희는 잠시 그ㅡ 자리에 멈추었다. 빌리 할리데이의 음성이 우아하고도 구슬프게 재즈바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분이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스며드는 듯...
그래서인가?
사람들의 표정이 여유로워 보였다.

안을 둘러 보던 진희는 2층에서 손을 들어 보이는 민성을 발견했다.
마치 큰 일을 눈앞에 둔 것처럼 진희는 길게 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민성 앞에 앉았다.

[분위기가 아주 근사하군요]

[대학 때, 기분이 우울하면 가끔 찾아오던 곳이었소...마음에 든다니...듣기 나쁘진 않습니다]

여전히 냉정하고 똑똑 끊어지는 말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망설임의 흔적도 보였다.

[운전하고 왔소?]

[네에...]

[그럼 술은 안되겠군...]

[가벼운 칵테일 정도는 괜찮아요]

주문을 하고 그들은 잠시동안 서로의 할말을 가슴속에 둔 채 할리데이의 음성에 취해 있었다. 먼저 말을 하기가 부담스런 것이다.


[제가...먼저 말할께요]

[아니오. 오늘은 내 얘기를 듣기만 하시오]

여전히 명령조였다. 그러나 역시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쓸쓸...해 보인다? ... 단지 착각인가......

[내가 처음 상처를 받은 때가 언제였는지 아시오? ... 쌍둥이였다 걸 알았을 때였소. 당시 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놈인줄 알고 살았으니까...]

[지금도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 부러운 게 없는 행운아 말이오. 더없이 훌륭한 부모님과 문제라곤 없는 나...난 내가 쌍둥이였다는 것보다 내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게 더 충격이었소. 그래서 난 내 친부와 형제들을 거부한거요. 한동안 ...불안하기도 했소. 친부가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쩌나...부모님이 나를 가라고 하면 어쩌나...그러나 부모님은 예전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을 주셨소. 난 그 보답으로 공부만 했고...
의대도 부모님이 원해서 들어간거고...]

[그럼...친부와는 만나지도 않았나요?]

[...그렇소. 난 그 분들과의 만남도 거절했소. 이제와서 만난들 무엇하겠소만...난 버림 받았다는 생각에 반항심이 컸었소]

[그런 건...아니었던걸로 아는데?]

[알아요. 내가 몸이 약했고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러나 환경이 더 좋은 집으로 보냈다는 걸...하지만 그건 두 번째였소.난 단지 내가 버림 받았다는데 상처를 입은 것이오. 그리고 두 번째...
대학 때였소. 난 한 여자를 알았어요...아름답고 똑똑한 여자를...
소위 사랑이란 걸 한 거요. 여자는 알아주는 재벌가의 외동이었지. 그 여자의 부모는 나에게 의사를 포기하고 법대를 택하길 원했소.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여자도 원하더군...그 일로 우린 자주 다투었는데 그녀가 언제부턴가 나를 피하더군요...다른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더니...사실이었소. 상대는 고시를 패스하고 연수중인 남자라더군...그녀는 매몰차게 나를 버렸소...]

민성은 얘기 중간 중간에 맥주로 목을 축였다.

[부모와 여자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지 아시오?...나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소. 난 나를 닫아 버렸소. 내 부모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를 열어 보이지 않기로 맹세한거지...내가 가야 할 길은 오로지 이 나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전문의가 되는 것 뿐이었소. 그것을 가능케 해준 사람이 당신 어머님이셨소. 원장님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나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소]

[......!]

[난 말이오. 나를 믿어주는 사람한테 내 모든 걸 다 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면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소]

[그건 의사로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의사로서가 아니라 인간 김 민성! 남자인 김 민성으로서 하는 말이오. 의사로서 난 모든 환자에게 평등하고 공평하게 대해왔소. 그건 당신 어머님과 나의 철칙이오]

맞는 말이었다. 의사로서의 민성은 병원안의 모든 이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평판도 그만이었다.
진희는 민성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는지 몰랐다. 그가 그런 아픔을 혼자 안고 있으리라곤...그러나 이제와서 그가 그런 얘기를 왜 하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당신 어머님의 병원이 탐나서 당신과 결혼을 결심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닌가요? 이제와서 거짓말 할 필요 없다고 봐요. 당신이 그렇다고 인정해도 전 놀라지 않아요]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솔직하면 당신은 나를 믿겠소?...이제와서 내가 무얼 더 숨기겠소...당신은 나를 너무 파렴치하게 몰아부치더군...병원을 탐낸다? 훗...종합병원을 세워줄테니 사위로 오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거. 원장님이 얘기하지 않았소?]

[설...마요?!!!]

[당신만 제외하곤 많은 이들이 나를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왜 가지 않았죠? 그게 당신 꿈 아니엇나요?]

[난 제일의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병원을 원한다고 한 적은 없소. 내가 원장님 밑에 있는 건 원장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당신 때문이오]

[나,나...요?]

[그렇소. 홍 진희씨 당신. 당신이 내 잠자는 호기심을 건드린거지. 솔직히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소. 그러나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당신에게 호기심이 생기더니 나중엔 그게...좋은 감정이 되더군...남자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당신의 태도. 늘 같은 표정으로 그자리에 있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난 사랑을 느낀거요]

[지금...! 장난하시는 거예요?]

[내가 진실을 말할때도 당신은 거짓이라 말하는군...]

[말이 안되잖아요. 어떻게...어떻게...!]

[원래 사랑은 말이 안되는 거 아니오? 난 당신이 과연 결혼식장에 올까...를 두고 반신반의하고 있었소. 오지 않는다해도 놀라지 말자.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난 그렇게 나를 달랬소. 솔직히 원장님이 그렇게 되신 거...당신만 안도하는 게 아니라 나도 안도하고 있소. 나에 대해 부정적인 면만 알고 있는 당신을 그런 식으로 데려와서는 안된다...나도 반성을 했소. 그래서 당신이 오늘 무슨 얘기를 할지 듣지 않아도 알수 있는 거요. 결혼을 백지화 하자는 것 아니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깐?]

그녀는 할말을 잃었다. 아니, 할말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럼, 엄마의 말이 맞았다는 말인가?...정말 민성씨가 나를 사랑한다고?...

[당신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건...당신을 잃을까봐였소. 나를 거절할까봐...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 받는 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소. 그래서 당신이 원장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는 걸 난 이용한거요. 용서하시오]

[결혼이 백지화될 마당에...굳이 고백하는 이유는 뭐죠?]

[당신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게 그 이유요. 내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란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라면 나를 다룰 수 있으리라 판단했소. 더 이상 난 당신에게 숨기는 게 없어요. 출발점에 서서 다시 시작하고 싶소. 내게...기회를 주겠소?]

그의 고백은 그를 새롭게 보도록 했다. 민성이 사람으로 보이고 남자로 보이는 것이다. 마치 처음 보는 남자와 마주앉아 대화를 하는 것처럼...생소하면서도 다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진희는 손수 술을 시켰다. 한 두어잔을 마셨다.

[당신은...제가 당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는데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네요. 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제가 엄마 딸이란 것 뿐이죠? 하지만 저도 비밀이 많아요]

[글쎄요...당신이 한 때...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말이오?]

진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과 결혼 얘기가 오갈 때 간호사들 사이에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어서 내가 알아본거요. 용서하시오...하지만 난 문제삼지 않아요. 여학교에선 그런 경우가 가끔 생긴다고 들어 알고 있었소. 당신의 상대가 유 경인씨라는 것도...그러나 그건 당신 혼자만의 감정이었고 당신 스스로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했다는 것도 알아요. 난 당신의 그 용기에 감탄했소. 또 지금은 유 경인씨와의 사이에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다는 것도...아니오?]

[철저하시군요...보충 설명도 필요 없을만큼...하지만 지금도 제게는 경인과 선애가 소중한 건 사실이에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당신은 경인과 선애를 좋아하지 않죠?]

[좋아하지 않는 건 그들이요. 난...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경인씨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질투를 했었소. 그 대상이 나였음 하는...그리고 당신은 항상 그들 얘기뿐이었으니깐...]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또 하나 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 당신은 저를 경멸할지도 몰라요]

[...들읍시다. 서로 숨기는 게 있는 것보단 나을거요. 듣고 난 후의 판단는 내몫이요. 해 보시오]


쉽지는 않지만 진희는 경인과 자신을 오랜시간 고통속에 헤매이게 한 태준에 대한 얘기를 했다.
판단은...민성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