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무슨 말이야?]
진희와 선애가 동시에 말하면서 경인을 빤히 응시했다.
시간은 많이 지났다.
주위의 사람들은 더 북적대기 시작했고 취해서 비틀대며 나가는 사람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경인도,
진희도,
선애도 상당량의 맥주를 마셨다.
얼마만에 모인 삼총사든가!
얼마만에 가져보는 활기찬 분위기인가!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다시 찾은 우정에 취하고...
[내가 진희 널...항상 마음 밖으로 밀어낸 이유...난 너한테 친구될 자격도 없어.
그 날...니가 날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난 내 입장만 생각했거든. 난 남자때문에 친구를 버리고 우정을 배신했어. 항상 우린 진정한 친구라고 입버릇처럼 떠벌리던 내가 말이야...
진희 니가 그 때 그런 말 하는데 있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얼마나 절실했을지...
난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
정말 내가 니 친구이고 좋아했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됐던거야. 최소한 너를 위로라도 했어야 하는게 옳은 일이었어. 그게 아니면 동정이라도...
그런데 난 냉정하게 돌아섰어.
어쩌면 가장 힘든 사람은 너였는데...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였는데...
난...난 그런 너를 외면했어...]
경인이 울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제껏 꾹꾹 눌러 놓았던 눈물의 샘이 그제서야 터진 것이다. 창피하지도 않았다. 경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감정이 이성이 시키는대로 행하고 있었다.
[기집애, 울긴 왜 울어...]
울먹이며 말하는 선애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조용히 진희 또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서 경인을 보고 있었다. 경인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간간히 사람들이 흘낏 했으나 세 사람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이, 이뿐 아가씨가 와 우노?실연당했나? 이 오라비가 위로주 살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킥킥대며 한 마디 던졌다. 선애의 눈이 즉각적으로 돌아 갔다.
[신경 끄고 술이나 마시세요!]
도끼눈에 앙칼진 음성의 선애 말에 남자는 저들끼리 다시 킥킥 댔다.
[장소 선택을 잘못했어. 차라리 우리 까페가 났지...]
선애는 눈물을 훔치며 투덜댔다.
그러나 조용하면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경인이 일부러 정한 곳이란 걸 선애가 알 리 없었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그때서야 진희 니가 생각났어.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한건가...하는.
그러고도 내가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
또다른 죄책감이 들었어. 선생님에 대한 것보다 더한...
날마다...밤마다...널 볼때마다 괴롭고 미안했어.
너한테 얘기할 수도 없었어.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감히 내가 용서빌 용기도 나지 않더라.
냉랭한 너의 모습이 그나마 내겐 위로가 되었어. 그러면서도 난 진희 니가 나를 등지면 어쩌나... 더이상 친구로 남지 않으면 어쩌나...그것이 또 나를 갈등나게 했어.
난...진희 너마져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알아]
진희가 목메인 음성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경인이 눈을 들어 진희를 보았다. 진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경인의 눈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알...아?]
[그래. 언제든가...어느 날 니가 날 보는 눈이 달랐어. 여전히 내겐 별관심없이 대하고 차가웠으나 너의 눈이 나를 피하기 시작하더라. 그 때 알았어.
경인이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구나...
무언가 미안해 하는 게 있구나...]
[그럼 왜 묻지 않았니?]
그러자 진희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물었음 얘기해 주지 않았을거야. 그 땐 아직, 선생님에 대한 짐이 너무 무겁게 너와 내게 안겨 있었으니깐.
그리고 난 니가 먼저 얘기 해 주길 기다린거야.
그래야 니가 덜 미안해 할테니깐... 안그래?]
[넌 여전히 지능적이야]
경인이 농을 던졌다.
[지쳐서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많았어. 다 털어 버리고 니 옆에서 사라져 줄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경인이 니가 평생을 죄책감속에서 살까봐서 봐준거야]
[고마워...고마워, 진희야. 날...용서해 주는 거니?]
[니가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그 순간부터 넌 용서 받은거야. 하지만 부탁이 있어]
[뭔데? 뭐든 들어 줄거야. 말해]
[나 한번만 안아줘봐]
[엥? 이, 이기 무슨 소리고?]
선애가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말했다.
잠시 멍해 있던 경인이 웃으며 진희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일어 섰다.
[그래, 우리 한번 안아 보자!]
경인은 진희를 꼭 안았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진희야, 사랑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정말...너무 오랫동안...그리고 내 친구로 다시 돌아와줘서 고맙고...]
[나두!!]
선애가 어리광 피우듯 두 사람을 안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다시 찾은 우정앞에 그녀들은
세상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없었다.
온 세상을 얻은 들,
이렇게 기쁘고 뿌듯할까...
경인은 오랜세월 가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던 말뚝이 뚝 빠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 처럼...
진희도 그러했다. 가슴 속 모든 찌든 세포가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누가 그랬던가?
가슴속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세상은 사랑이 되고
가슴속에 미워하는 이가 있다면 세상은 미움이 되고
가슴속에 희망이 있다면 세상은 희망이 된다
희망찬 새해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이! 아가씨들, 연애 하나? ]
또다시 느끼한 음성이 끼어 들어 세 사람에게 찬물을 뒤집어 씌웠다.
[상대가 없으면 말해. 우리라도 해줄테니까. 어때, 연애 할래?]
그들은 끈적대는 웃음을 흘리며 세 사람을 보았다. 선애가 인상을 썼다.
[야야, 나가자. 여긴 분위기 꽝.이야. 이차 가자, 이차 가!]
선애가 앞장서서 경인과 진희의 가방을 챙겼다.
세 사람이 나오고 곧바로 문제의 그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을 그녀들은 알지 못했다.
적당히 술도 깰겸,
세 사람은 가까운 노래방으로 들어 갔다.
선애가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눌렀다.
세 사람중 가장 음치를 자랑하는 선애가 제일 어려운 노래를 택하자 경인과 진희는 눈웃음을 교환했다.
누가 말리겠는가! 선애를.
선애의 음치곡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남자 셋이 들어 왔다. 음악이 멈추고 그녀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불청객을 보았다.
[아니!]
선애가 아는체를 했다.
그렇다. 남자들은 호프집에서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뭐예요?]
마이크에 대고 선애가 말하자 남자들은 씨익 웃었다. 취하기도 취했고 인상을 봐서도 썩 좋은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들은 긴장하며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아가씨들 끼리 외로울 것 같아서...우리도 셋. 아가씨들도 셋. 짝이 딱 맞네 뭐!]
[누가 댁들과 짝하고 싶대요? 나가요! 나가지 않으면 주인을 부르겠어요]
선애가 문으로 향하자 남자 하나가 그런 선애의 팔을 잡고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선애는 남자의 가슴에 안기는 꼴이 되었고...
[거 봐! 좋으면서 뭘 그래?]
[어머머!!]
놀란 선애는 냅다 남자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쫙! 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남자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코피다. 확인을 한 순간, 남자의 눈이 뒤집혀졌다.
한 마디 욕과 함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선애의 곱게 말아 올린 머리채를 댑다 움켜 쥐었다.
외마디 선애의 비명소리.
경인과 진희의 눈에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 둘이 합세해서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 차고 머리를 쥐어 뜯었다. 간신히 풀려난 선애가 이성을 잃고 재떨이를 집어 들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남자들이 덤벼 들었다.
장소가 노래방이라 웬만큼 시끄러워도 주인이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 안의 상황을 잘 알리가 없었다.
세 여자와 세 남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뻔하다. 힘으로 따지면 남자를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하지만, 경인과 진희, 선애가 어디 고분고분한 여자들인가!
맞고는 못사는게 선애의 철칙이고,
여자에게 손찌검하는 남자는 눈뜨고 못 보는 게 경인의 성격이요,
여자를 무시하는 인간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게 진희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남자들이 여자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녀들은 닥치는 대로 잡고 남자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 와중에 선애가 문을 열고 외쳤다.
[아저씨! 치한이예요. 경찰 불러요, 빨리. 경찰요!]
[나 참! 이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경인 일행은 남자들과 함께 나란히 파출소에 앉게 되었다. 경찰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며 내내 웃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들은 말짱한데 남자들은 엉망이었다.
코에 솜을 쑤셔 넣고 있지를 않나,
얼굴에는 손톱 자국이 나 있질 않나,
급소를 차여 터졌다는 둥, 앓는 소리를 하지 않나...
[손해 배상하지 않으면 고소할테니 알아서들 해!]
한 남자가 당당한 어조로 내뱉자 선애가 눈을 부라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시비 건 사람이 누군데...! 남자들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 아, 조용히들 해봐요! 다 큰 사람들이 뭘 잘 했다고!]
[수고들 많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선 모양이었다. 뒤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경찰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맞았다.
[어이! 자네가 파출소엔 웬일인가? 당직인가?]
[아, 예. 뭣 좀 찾아볼 게 있어서]
굵직하고 활기찬 남자의 음성에 경인이 고개를 들고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음성...?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하니...?
확인하기가 망설여졌다.
[근데, 무슨 일입니까?]
[어, 강형사 왔는가?]
강...형사?
숨이 멎었다. 그가 아니길 빌었다. 이런 곳에서 이 상황에서 그를 대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으응, 살다보니 웃겨서 말이야. 이 놈들이 글쎄, 이 여자들한테 폭행을 당했다고 난리를 치잖아. 여자들은 정당방위라 그러고...]
[그래요?]
그가 웃었다.
[어디 어떤 여자들인지 얼굴 한 번...?]
남자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경인을 보고 말을 잊었다. 그의 표정에 놀라움이, 곧이어 담담함이 스쳐 지나 갔다.
진희와 선애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더니 눈 앞의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입을 딱 벌렸다.
강 재민.
그는 언제나 뜻밖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는 일로 만나게 되는 경인을 보고 놀라워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어? 강형사 아는 아가씨들이야?]
[그런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