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가면 갈수록 엄마의 몸은 쇠약해졌다. 돌보는 사람이 잠깐 없으면 식사를 제대로 안해 저혈당이 와서 혼수상태에 빠지셔서 주변 사람들은 놀라게 하는 바람에 하루에 50,000원씩 하는 간병을 써야했다. 하지만 간병이 하는 일은 몸닦아주고 밥 먹도록 권하고 이야기동무 되어주는 것일 뿐 똥오줌이 조금 묻은 속옷조차 빨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병원에 매일 가야 했다. 그 때만해도 엄마는 먹고 싶은 것이 많으셔서 간병을 시켜 칼국수, 물만두, 삼계탕 등등을 사오게 하시곤 했는데 한두 수저 뜨시고는 또 그만이었다. 병원복도에서 식사를 나르는 카트가 오면 엄마는 손으로 코부터 막고 냄새조차 싫다고 했다. 기저귀라도 차면 좋으련만 그 카랑카랑한 성격탓에 하루에 5개씩 속옷을 갈아입으시면서도 기저귀는 싫다고 하셨다.
'내가 며느리면 진작에 도망갔다. 어쩌면 저렇게 자기생각만 할까?'
나보고 죽으란 소리였다. 아들이 둘이나 있는 친정엄마를 병간호하러 매일 가면서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집안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힘든 내색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엄마란 사람이 날 잡으려고 작정을 했지... 딸 힘든 건 생각도 안하고 섭섭한 것만 투성이니...'
그렇게 한 두달을 벼티다가 나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서 두세명의 간병인들이 교대를 해가며 24시간 환자 6명을 한꺼번에 돌보아주는 공동간병인실로 엄마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공동간병인실로 옮기기 전에 한 열흘동안 친구이모님이 저녁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엄마를 돌보아주셨었는데 엄마는 물으셨단다.
"우리 딸아이가 그리로 나 보내라고 해요?"
정이 많으신데다가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라 엄마의 말벗이 되어주시고 잘 해 주셔서 그 분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투정을 하셨지만 나는 못들은 척 할 수 밖에 없없다.
'나도 살아야 하쟎아. 엄마.' 나는 입밖으로 낼 수도 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한편으로는 엄마가 야속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래도 견딜만한 상황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회복의 기미가 없이 폐에 찬 물과 공기를을 뽑아내기 위해 폐에 호스를 박고 몸 밖으로 빼어 연결한 플라스틱통 때문에 엄마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몸무게가 계속 빠지는 상황에서도 퇴원조차 할 수 없었다.
여러차례 의사선생님께 졸랐지만 호스를 단 상태로도 퇴원은 곤란하다는 설명뿐이었다. 이제 엄마는 기저귀를 찬 채 움직이는 것도 귀챦아 소변과 대변을 다 기저귀에 눠버리는 영락없는 노인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간병아주머니들이 24시간 계시니까 나도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시장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무슨 일 있대요?"
"아니 목소리 좋으시던데."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얘! 아침에 생선가게에 가면 햇빛에 비늘이 반짝거리는 은빛 병어 있쟎니? 그걸로 회만들어 좀 사와라."
"엄마 하필이면 왜 병어회야? 그건 사기도 힘든데 광어회나 다른회면 몰라도..."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엄마의 먹는 타령은 못말린다니까. 남편보기도 민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