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둘이상 둔 친구들에게 나는 가끔 물어보곤 한다. "자식들 중에 유달이 너하고 잘 맞고 예쁜 아이가 있니? 아니면 열손가락 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맞아? "
친구들은 대부분이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곤 한다. "다 아프지.그런데 부모와 자식간에도 궁합이 있는지 왠지 더 정이 가는 아이가 있는 것 같아."
퇴원을 언제 하실지 어느날인가는 회복될 수 있을지 아무런 기약도없는 상황에서 나는 엄마가 혼자 사시던 방에 가서 짐을 정리해 우리집으로 옮겨야 했다.
제주도에 있는 오빠가 올라올 수도 직장에 있는 동생을 오라고 할 수도 없어 혼자서 짐을 옮기려고 나섰는데 안쓰러워 보였는지 사촌동생이 따라나서서 생각보다 쉽게 짐을 옮겼다. 집에 가지고 온 짐을 정리하다가 몇권이나 되는 엄마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게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내게는 부담스럽더니 나이가 먹어서도 차갑고 냉정해서 정이 붙지 않는 자식이다.'
큰 올케가 어떻게 사업을 꾸려갔기에 그 많은 빚을 지고 두 채나 되는 아파트를 다 날리게 되었는지 그 바람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오빠까지 빚독촉에 견디지 못하고 직장에 사표를 내어야 했는지 서울에서 살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빠의 사업실패이후 다시 7년만에 내 친정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이 지경으로 만든 큰오빠내외와 큰 올케의 빚보증에 얽힌 남동생에게는 한없는 안쓰러움과 그들의 앞날에 대한 기원으로 일기장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원망스러움부다는 그들의 현재상황이 가슴이 아프셨을 뿐인데 나에게만은 유독 섭섭함뿐이었다.
나는 딸아이 하나만을 두어서 엄마의 자식사랑을 헤아릴 수 없지만 아들이 죽고 따라죽겠다고 했던 외할머니나 자신의 노년이 아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셨던 엄마를 봐서 나는 아이가 하나이기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다.
나는 딸아이의 돐상에 플라스틱 활과 화살을 사다가 올려놓을 정도로 가슴속 깊이 뿌리 깊은 우리나라의 남녀차별에 깊은 반항심을 갖고 자랐나 보다. '여자라고 군인이나 장군 못되라는 법 없지. 앞으로는 장난감도 인형뿐만 아니라 권총, 자동차 다 사 줄거다.'라고 중얼거리며 유난스러워 보이는 돐상을 차렸었다.
하지만 아이는 크면서 권총이나 자동차보다는 인형을 좋아했고 똑똑했지만 심경이 복잡한 여자아이 성격 그대로였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진 거라고 했는데 어느정도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 같아.'라며 친구끼리 만나면 가끔씩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유야 어떻든 엄마의 병원을 다니며 힘겨운 싸움을 하는 자식은 결국 딸인 나였고 엄마의 임종을 지킨 자식둘은 오빠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