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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한 A씨의 사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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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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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sonaki88 2002-11-07

적(敵)
그녀와의 인연은 아니 악연은 자궁 속에서부터 뒤틀려 시작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매라고 하기에 또 가족이라 하기에 너무나 틀렸다. 4대 독자였던 집의 뱃속에서 나와야 했던 것은 아들이라는 이름의 것인데 딸이라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할머니의 반대로 어렵게 한 결혼을 아들로 보상 받으려 했으나 결국 두 눈 부릅뜨고 ‘망할 년’으로 다시는 고쳐질 수 없는 낙인을 던지고 간 할머니를 아직도 엄마는 ‘지독한 사람’으로 죽은 사람에게 나름대로 찍어주곤 했다. 네 달 즈음 지났을 때 태기가 있어 주위에서도 스스로도 포기하려 했을 때 그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그녀와는 시작도 없었을 것이다.

니 할매가 얼마나 나를 부리고 또 부리는지 심신이 피곤해서 안방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인상 좋고 머리가 허연 할매가 오시더만 창문에서 여자아이를 안겨주시며 ‘잘 키워라. 그럼 그 애가 아들 몫을 할거여.’ 함과 동시 번쩍 빛이 나더니 두 팔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니 뭔지는 모르지만 평온하고 기분이 좋아지더라.

별 재미도 없는 꿈 이야기를 영웅탄생 신화처럼 말씀하시며 늘 그 때 일을 자랑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같이 할 것에 맹세 아닌 맹세를 했다. 그 뒤론 자식을 볼 수 없었던 이유였을까? 유달리 그녀에겐 사랑과 집착을 같이 주셨다. 공부를 잘해 곧잘 상도 타오던 큰딸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취직을 시켰고 그녀는 일년 재수를 하고 전문대학교에 들어갔다. 큰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하여 2년 뒤 엄마가 정성스레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야간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먹고사는데 여념이 없었던 살림이었지만 그녀는 졸업 후 들어오는 돈의 반을 가지고 나갔으며 그것은 우리 집 불변의 원칙이었다. 어렵게 공부를 마친 후 그럴듯한 회사에 공채로 입사한지 이년이 지났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그 외 것은 과외며 아르바이트 했던 돈으로 충당한 후 남은 돈과 대출을 받아서 조그마한 전셋집을 마련했다. 혼자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고 만끽할 즈음 그녀는 어느 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엄마의 정성이라기 보단 장녀의 구실로 시작되는 극도로 쌓이는 스트레스로 지친 끝에 출산휴가 중인 여직원 자리에 임시직으로 그녀는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가 남들보다 훨씬 공주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겉으로만 임시직이지 잘만 흡수되면 그것으로 든든한 직장이 될 수 있는 자리였다. 공채시험이 무색할 정도로 혈연, 학연, 지연의 모든 압력 속에서 신입대리의 줄인 그녀가 그 자리에 앉게 되리라 상상이라도 했던가?

“얘가 왜이리 늦노?”
“좀 있으면 오겠지요.”
“니 한테 무슨 말 없드나? 왔나부다”
문을 열기도 전에 딸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술이 걷는지 사람이 걷는지 모를 정도로 독한 냄새와 볼그레한 얼굴의 그녀가 쓰러지듯 안방으로 가버린다. 방 2칸의 집에 안방은 그녀, 그녀의 엄마가 다른방은 그들과 다른이가 살고 있었다. 밤새도록 들락달락 거리는 소리에 한 숨 못자고 무거운 몸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니는 니꺼나 준비혀라. 야가 술만 묵으면 내가 끓인 콩나물국만 안 찾냐.”
“콩나물 사다 놓은 거 없을 텐데요.”
“요 앞에 부식집에 문 열었드라.”
괜한 걸 물었구나 생각했다. 밥을 먹고 시간에 맞추어 전철을 타야겠기에 막 나서려는데 언제 술을 먹었냐는 듯이 환한 얼굴의 그녀가 말을 던졌다.
“내차 타고 같이 가.”
“지하철이 편해.”
“꼭 그렇게 없는 티를 내야 적성이 풀리니? 머리 묶어야 해. 시간이 없어서 그래. 네가 운전 좀 해.”
빨간 그녀의 차가 어제 주인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마치 금이라도 밟으면 펑크라도 날까봐 너무나도 정확하게 제 집에 들어 있었다. 취직을 했답시고 시골집 팔고 남은 돈으로 사줬다며 시운전을 해보는 그녀를 자랑스러운 듯이 지켜보며 말씀하셨다. 집값의 반이 조금 넘는 자동차를 보면서 말이다. 씁쓸한 마음에 시동을 걸고 있는데 무게 중심이 흔들렸고 방금 나온 곳보다는 더 많이 인정해주는 곳으로 차를 움직였다.
“이번 엔”
“시끄러. 운전이나 해. 그리고 엄마만으로 충분하니까 너까지 거들지마.”
아무 생각 없이 몇 번의 푸른 신호등과 붉은 신호등을 따르고 나니 회사 정문이 보였다.
“여기서 세워. 내가 운전할거니까.”
갑자기 목구멍에서 불같은 것이 올라왔다.
“너!”
바로 그 순간 빰이 얼얼한 느낌에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급식학교를 다녔었고 한달에 한 번 급식비를 학교에 납부해야만 했다.
학교를 파하고 오는 길에 주머니에 만져지는 돈이 있었다. 급식비를 깜박했던 것이다.
학교에 다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날 불렀고 그녀는 돈으로 빵과 우유 평소 너무 비싸서 먹어보지 못했던 과자를 실컷 먹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큰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혼이 나야 했던 것에 책을 보자기에 들 수 없을 만큼 넣고 집을 나왔다. 해질 무렵 혼자라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갔을 때 따뜻한 품이 아닌 차가운 눈빛과 뺨을 맞은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인생이 철저히 다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길이 다른 것에 상관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항상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한 둘씩 와서 같이 먹게 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어울려 먹고 있는 자리에는 선뜻 가서 앉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는 늘 신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 온지 일년이 채 안되었지만 여직원들의 시샘어린 눈과 끈적한 남자들의 눈독이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을 즐기는 방법을 알아갔으며 나 또한 뜻모를 그 여파로 눈독은 없었어도 눈은 있게 되었다.
오늘은 자재과장과 함께 밥을 먹는 그녀가 보였다. 대리들은 풋내기라 상대하지 않으며 줄 곧 장(長)들과 어울리는 그녀였다. 여직원의 질투도 한 풀 꺾여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바람으로 그녀에게 갖은 보석을 상납하곤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집으로 전화를 했다.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오늘은 삼계탕 해 묵자. 날도 더운데 작은 애가 더 에?뭇蒻? 장 좀 봐온나.”
“네”
대답과 함께 수화기를 놓는 순간 조용히 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구두 소리와 양복을 입는 세 사람이 조부장과 들어섰다.
“오늘 본사에서 내려 온 신입사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시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평소 부하직원이라도 짧은 말은 절대 쓰지 않으며 상당한 힘과 베일에 쌓인 조부장이라 모두들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본사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직책이 두 단계 강등되어 좌천당한 격으로 여기에 있고 조만간 다시 올라갈 계획이며 서민들의 눈으로 본다면 어마어마한 재력가라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말이 끝난 한참 후에도 옆 직원의 ‘꿀꺽’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조부장이 나간지도 몰랐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신입직원들의 얼굴을 한 번씩 보았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제일 왼쪽에 서있는 신입직원의 얼굴을 봄과 동시 내 가슴속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닭은 이제 싫증난다며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은 그녀는 닭죽을 먹고 있는 나를 힐끔 보았다. 오늘은 유달리 신경을 쓰는 그녀다. 너무도 파란 민소매와 하얀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고왔다. 아름다움과 표독스러움을 교묘하게 풍기며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장을 한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오후 한 잠의 유혹을 뿌리치는 무리들 속에 조부장의 칼날 같은 목소리는 섬뜩해서 살이 놀라 부풀어 오를 지경이었다. .
“신입직원들은 지사장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니 절 따라 오십시요.”
벌떡 일어나는 그들과 함께 그녀의 눈이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본다는 것만으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치밀어 오르는 이 상실감은 무엇일까?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빼앗겼어도 이렇진 않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아 평범한 것인지 평범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혼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 올 뿐이다. 혼자인 것이다.

두 잔 연거푸 마시는 커피가 쓴 줄 모르고 향에 취해 한심한 인생에 취해 있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혼자 드시지 말고.”
“…….”
“사실은 잔돈이 없어서 그래요. 나중에 갚을게요.”
“......”
무슨 말이든 그가 건네만 준다면 참으로 보내줄 말이 많았는데 오로지 ‘각박한 인생을 살다보니 얼굴도 인정머리 없게 생겼나보다’ 하는 것뿐이다.
깜빡거리는 동그랗고 조그만 불빛이 멈추었을 때 숨도 따라 멎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원수는 꼭 갚지요.”
하고 웃는 그 모습에 남자의 매력이라면 저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
간간히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은 없었다.

짙은 단풍이 유달리 서러워 보이는 이른 아침에 단풍놀이를 간다고 부산스레 움직이시더니 메마른 낙엽처럼 말씀하신다..
“냉장고에 밑반찬 다 넣어 놨으니 밥 꼭 챙겨 묵고 니 동생 아침에 국은 꼭 끓여 줘라.”
‘불행이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하고 뒤를 돌아보며 엉뚱한 생각도 해보지만 여하튼 아침부터 불안하고 서글프다.
“오늘 어디 안가니?”
“왜?”
“저녁에 손님이 오기로 했어. 저녁 좀 준비해 줄 수 있어? 한명이야.”
지금까지 집구석이라 칭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어제 이상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이리저리 쑤셔 박더니 얼굴도 보지 못한 한사람 때문이었다니 잠시나마 철이 들어가나 보다 했던 착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소리 소문 없는 시간은 여유롭고 만만하게 보이지만 되돌려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그 속에서 원했던 것을 얻었는지 후회라는 것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준비해 놓고 진한 커피 향에 빠져 있는데 차임벨 소리에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벌써 여덟시가 되어 있었다. 허물거리는 생각들을 집어넣고 문을 열었다. 베이지색 정장에 건드리기만 하면 다칠 것 같은 그녀의 구두가 보였다.
“좀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네”
굵직한 남자 음성이 들렸다.
저녁이라기엔 늦은 시간이라 급한 마음에 문만 열고 찌게에 불을 올리고 밥이 잘 되었는지 재검을 한 후 인사를 하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아시죠? 언니예요. 회사에서 자주 보셨죠?”
“네.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배고파. 빨리.”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허겁지겁 저녁을 준비하였다. 그를 집으로 데려온 그녀가 싫었고 장단을 맞추듯 단정히 앉아있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저녁을 숟가락과 젓가락의 최소한의 의무만 시키고 어질한 기분에 커피를 탔다.
혼자만의 배신에 눈물이 났지만 웃어야 했고 이것으로써 인생은 초라함으로 거창한 장식을 하며 마무리 지어졌다. 그녀와 그가 같이 나갔고 최선을 다해준 빈 그릇만이 위로할 뿐이다. 참으로 기나 긴 밤이었고 “쾅”거리는 소리에 눈을 감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와 같이 나간 후로 항상 싱그러웠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야위어 갔다.
그녀의 분신은 괴롭고도 안타까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고 생각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려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나와.”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디쯤에 있는 산부인과라는 말만 듣고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 곳에 앉아 있다가 아는 얼굴을 보는 순간 일어나 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따라갔지만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인지도 묻지 말라는 눈빛에 떨리는 손으로 일체 말도 않는 그녀만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들을 짧은 시간에 한다는 것은 심장을 터지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다. 이런 것일까?
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었고 자리만 채워야 했고 불필요 했던 사람은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울 때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알았다. 몇 개월 전의 일이라기엔 아직도 생생한 기억은 어떤 때는 거미줄처럼 어떤 때는 바람처럼 얽히다가 흔들리고 지울수록 선명해지는 얼룩같이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와 같이 했던 순간은 커피 한 잔 마신 기억뿐이지만 온 몸은 그 향에 젖어 나올 줄 몰랐다. 이젠 그를 잊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라고 외쳐보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두려움이 메아리를 울린다.

그녀와의 사이처럼 시린 겨울이 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눈처럼 한없이 따뜻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가가 만지면 너무 차가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얼음덩어리다. 편하게 해 주려는 것인지 힘들게 하려는 것인지 그녀는 늘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딱히 예전처럼 쏘아 붙이지도 않았다. 삶이 약간은 지루해진 하루였고 첫눈도 지나가고 몇 번이나 내렸던 눈이 또 내려 소복이 쌓인 오후였다. 결재 서류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손에 낯선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노오란 작은 봉투를 정성스레 직접 만들어 수신란에는 ‘보세요’라고 작은 메모가 앙증맞게 누워 있었다. 꼭 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지 않는다면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보세요’라는 글씨가 혹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잘못 놓아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편지인지 메모지인지 모를 작은 종이를 정성스레 펼쳤다.

계절이 바뀐다지만 늘 그대로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다 싶으면 가을이 오고 언제인지 모르게 또 겨울이 찾아 듭니다. 제겐 그렇습니다. 하지만 계절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개나리가 피면 한방 가득 개나리를 채워주고 매미가 울면 푸른 숲과 푸른바다를 보고 단풍이 곱게 물들면 여행을 떠나며 눈이 내리는 지금은 사랑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누구였을까?’ 며칠 전 받은 편지의 발신자를 찾아야 한다. 잘못 전해진 것을 알려주고 다시 보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감정의 동물은 종이 한 장 때문에 울고 웃는다. 사무실을 둘러보고 눈을 맞추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늘만 더 기다려 보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또 다른 일상을 위해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편지봉투 크기의 종이상자가 있었다. 서류와 같은 색이라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약간의 두께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 잘못 온 것일까?’ 깨알 같은 글씨가 보였다. 성을 뺀 이름 남들이 불러주는 이름이었다. 책상에 올려진 이 상자와 편지도 모두 제대로 왔던 것이다. 조심스레 열어 본 상자 안에는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털장갑이 두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적어도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털의 감촉과 따뜻함이 어울려 손끝을 간지럽게 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이 어색할 줄만 알았는데 걷는 걸음마다 하늘을 나는 같이 붕붕 떠오르고 귓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지도 않았던 그를 보내고 사랑과는 친해질 수 없다며 체념하지 않았던가? 그를 생각하면 아직 서러운 아릿함이 남아 있지만 이 기분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이삼일에 한 번씩 책상 위 손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즐겁고 유익했다. 우울하면 달래주고 지쳐있으면 편하게 해주는 낯설지 않은 손님이 좋아졌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사랑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조금씩 키워 나갔다. 방안 가득 개나리가 채워지는 느낄 수 있는 계절이 옴과 동시에 그녀는 작은 가방만을 들고 떠났다. 그녀가 남긴 흔적들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서서히 채워 나갔다.

오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짧기도 하지만 길고 많은 세월이었다. 그동안 한 집안의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라는 핑계로 간단한 통화만 하였고 간간히 수화기 건너편으로
신경질적인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비켜 간 이유는 몸에 붙였다 떼었다 생각했던 혈육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인 존재가 되어 평범한 여자의 길을 선택한 순간인지 모른다. 새로운 출발을 많은 사람들 앞에 약속을 했던 자리에서도 그녀는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볼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큰아이를 낳고 갓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 남편은 타지로 출장을 간 직후였고 전화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할아버지의 손자사랑이 남다른데가 있어 가끔씩은 이 시간에 벨이 울리곤 했다. 새로 잠을 청하기로 했던 마음은 어느 새 시골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고 한숨을 내리쉬는 그녀만의 보호자였다. 칭얼거리는 아이의 잠을 깨워가며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운전을 하고 도착한 병원은 입구에서부터 공중전화기가 즐비해 있었다. 아마 저기가 무소식은 희소식이란 것을 가르쳐 준 곳일 것이다. 꽤나 큰 병원이었다. 커다란 모양새에 주눅이 들어 어정이다가 곤히 잠든 아이를 업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조금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 ‘특실’이라 적힌 두 글자에 발이 묶였다. 누군가 특별히 그녀만을 생각한다는 방의 출입문을 두번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살짝 드밀고 간 병실에는 방 이름과 걸맞지 않는 냄비와 그릇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가 저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오래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세월은 빗나가지 않았으며 큰 눈가의 잔주름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왔니?”
“그래. 몸은 좀 어떠니?”
“그렇지 뭐?”
“아침은 먹었니?”
“그냥.”
“기운 없으면 더 자. 나가 있을게.”
“됐어. 앉아 있어. 애는 자?”
“응. 조금 있으면 일어 날거야.”
“그럼, 여기 좀 눕혀봐.”
침대자리의 반을 내주며 팔을 벌리는 그녀에게 두말없이 아이를 맡겼다. 일찍부터 설친 탓에 아이는 곤하기만 하다. 같은 여자라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아픔을 그녀는 두 번이나 겪었다. 처음에는 묻지 않았고 두 번째는 물을 수 없었다. 아이의 머리를 이리 저리 넘겨보고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는 그녀에게 측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하던 병실에 문이 열렸고 환자보다 더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말은 없었다. 그저 각자의 아픔으로 가끔씩 훌쩍이는 맺힌 한(恨)만이 침묵을 깨고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있었고 그녀와 둘이만 있는 병실은 넓기만 했다. 외할머니 노릇을 하시는지 아이를 들쳐 업고 나가신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상대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똑똑’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의자가 튕겨질 정도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병문안을 온 것인가?’ 그녀가 회사를 그만 둔지 꽤나 되었고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조부장의 손에서 왜 꽃다발이나 음료수 박스를 찾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병을 낫게 하기위해 잠시 병원을 찾은 것도 아니거니와 가족들만의 비밀이 되어 있는 곳에 아무렇지 않게 조부장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침묵만 일어나고 있었다. 답답한 이 상황을 아무도 벗어나게 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부장을 또 다른 그녀는 받아 들였으며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사주 때문이며 그저 팔자라고 힘없이 답을 주셨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자식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에 ‘몹쓸 짓을 했구나.’라는 생각과 뭔지 모를 괴로움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처음으로 진심을 보여 주었던 그를 형부라고 부르게 했던 것이 이렇게 강한 죄책감이 들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모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처음 집으로 놀러왔던 것도 그녀의 언니 때문이었고 책상위로 자주 찾아왔던 글친구도 그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도 이런 감정까진 일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으로 작은 영혼은 기나긴 기지개를 펴며 뒤틀려 있던 모든 것을 날려 보냈는데 고스란히 그녀에게 찾아간 것이었을까? 아직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날부터 인지 모르지만 한 울타리에 안에 있게 되었다.

그가 잘 가지도 않는 낚시를 가려고 한다. 모든 모임을 부부가 항상 함께 해오던 그이기에 안쓰럽기만 하다. 오늘은 처음으로 그녀가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온다. 그가 집에 있느냐는 그녀의 조심스런 질문에 수화기를 막고 물으니 대뜸 친구들이랑 간만에 낚시를 갈 거라며 조심스레 얘기 한다. 혼자서 갈 줄 알았는데 큰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는 그를 보며 처음보다 더 큰 사랑이 느껴졌다. 그가 가고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하얀 중형차가 주차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전보다는 약간 살이 찐 모습으로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왔고 엄마는 못 올 곳을 오시는 것처럼 들어오시더니 쌍둥이 딸들을 이리저리 ?아 다니시다가 신발을 신겨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그녀와의 얘기는 끝이 없었고 슬퍼서 울고 기뻐서 웃다가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도 서로가 받아 주었다.
가족 모두 처음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으며 쌍둥이의 재롱으로 한바탕 웃기도 하였다. 시간이 어디 숨어 있다가 ‘쨘’하고 나온 것처럼 해가 어둑해져 있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서둘러 나서는 뒷모습에 아쉬움은 곱으로 남는다. 벌써 저만치 서있는 엄마를 모른채 하며 그녀는 말했다.
“언니, 알고 있어? 언니는 항상 빛이야. 그 빛 때문에 난 늘 갈증을 느꼈으니깐. 목마름이 싫어 엄마 그늘로 숨었는데 해소는커녕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잖아. 언니가 행복해 보여 너무 좋아. 잘 살아. 이제 자주 얼굴 보자. 참 다음에는 형부랑 애들이랑 같이 집에 놀러 와라. 간다.” 찡긋거리며 돌아서는 그녀에게 해 줄 말이 있었는데 할말만 간단하게 해왔던 터라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다. 멀리서 들어가라는 엄마의 손짓이 보였다. 가고 난 자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어쩌면 엄마의 꿈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의지하고 사랑하였고 같은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그녀가 당신에겐 아들인 것이다. 따뜻한 정을 부볐던 흔적이 없어질 때 쯤 안방 침대 옆에 커다란 가방이 보였다. 종이로 만든 큰 가방이었다. 두툼한 것이 ‘무엇이 들었을까?’ 강한 호기심으로 인해 침대 위에 이내 내용물이 들어났다. 큰아이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윗옷들과 바지 두벌, 색깔만 다른 똑같은 원피스 두벌과 아이들 속옷 그리고 가지각색의 양말들과 곱게 접은 쪽지도 들어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불면서 추워진다. 엄마가 시장에 가실 때 마다 사 모은 것들이야. 장롱 깊숙이 박혀 나 올 줄 모르더라. 아마 나 때문 이었나봐. 엄만 옆에서 애들 옷이 맞을지 걱정하신다. 언니! 가족모두 건강하고 행복해라. 그리고 미안해......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힘들게 싸우며 이겨내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더 짓밟았던 사람은 엄마도 그녀도 아닌 나였던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문득 뒤돌아서는 그녀에게 해주고픈 말이 이제서야 생각났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소리없이 뱉으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두 아이가 꼬옥 껴안아 준다. 현관문 너머로 그와 아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인생의 가장 큰 적(敵)과의 기나긴 전쟁도 끝을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