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이 오기전의 가을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자꾸 꺼집어 낸다.
8년의 세월을 건너고 또 건너 뛰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기억으로 인해 희경은 그 가을도 쓸쓸하게 받아 들여야만 했다. 일은 물론이고 입맞도 없고 기운도 없어져 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이라곤 30년 지기 은영이가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면 무슨 연애하는 게 아니냐 할 정도로 은영은 언제 어느때든 희경의 옆에서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준 친구였다. 하지만 단 하나! 은영이 해주지 못하는 것은 그 추억이었다. 아니 은영으로 인해 그 추억은 더욱 빛을 발하며 다가오고 있는지도... 한숨이 절로 세어 나왔다.
[그 병, 또 도졌다 도졌어.]
언제 왔는지 은영이 옆에서 팔짱을 끼고선 희경을 보고 쯧쯧 거렸다.희경은 긴 웨이브 머리 은영은 짧은 컷트 머리 희경은 160의 적당한 몸매 은영은 175의 쫙 빠진 몸매를 하고 약 먹은 병아리모양 축 늘어져 있는 희경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한심아! 서른이란 나이가 아깝다 아까워. 요즘 너 같은 팔푼이가 존재하는 지 어디, 길 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 봐.]
[너도 매년 똑같은 소리야, 지겹다 지겨워.]
다시 한숨을 쉬며 희경은 턱을 괴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 기억이 희경을 잡고 놓아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건드려 피를 토해 내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그 아픔...그 아픔이 늘 새롭게 다가와 희경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냥 내버려 둬...그냥.]넋 잃은 사람마냥 희경은 멀거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지겹다. 지겨운 줄 알면서 해대는 내 속은 편하겠어? 그 때내가 그 인간을...!]
[완연한 가을이다 은영아...가을.]
아련한 눈빛으로 희경은 가을을 감상했다.
[책마을]은 큰 도로 옆의 일차선 도로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도로 양 옆으로는 은행나무가 즐비해 해마다 가을이면 가슴 시린 가을 맛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황금빛의 농익은 은행잎이 바람에 못이겨 우아하게 쏟아져 내릴 때면 희경은 그 아름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가을은 그렇게 희경을 불행히도 행복하게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긴 가을엔 진짜 죽여준다니깐. 12층에서 내려다 보는 그 광경도 끝내줘. 가로등 받아 빛나는 은행잎은 예술 그 자체라 뛰어내리고 싶은 순간적인 충동도 없지 않아 생겨.]
[무슨...!]정색을 하며 희경이 돌아보자 은영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이해가 간다는 얘기야...어? 미스 신이네.]
[어머, 언니도 와 있었네요?]
맞은 편 베이커리에 근무하는 신 근애가 책방으로 들어섰다. 덩치는 산 만한데 하는 행동이며 말씨가 마치 여학생같고 재미있어 희경도 은영도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게다가 잠시도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데다 그 상가네의 소식통이었다.
[지금 요 밑에, 금은방에 형사들과 경찰이 와 있어요.]
[경찰? 무슨 일 있어?] 은영이 물었다.
[밤에 도둑이 들어 몽땅 털어 간 모양이예요. 난리예요.]
[정말이야? 세상에! 가보자.]
은영이 희경의 팔을 끌었고 얼떨결에 희경은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좋은 일 구경가는 것도 아니고해서 떨떠름했지만 금방 아저씨라면, 가끔 책을 빌려 가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사람 좋기로 유명한데 어쩌나...
가게 앞에는 이미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도로에는 경찰차와 범죄 감식이라 씌어진 봉고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런, 완전 난장판이네.] 키가 큰 은영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감상했지만 희경은 고개를 쭉 뽑고 까치발을 해야 볼 수 있었다. 미스 신은 이미 앞으로 돌진하고 없었다.
[아저씨 가게엔 새콤처리 되어 있을텐데?]
[요즘 도둑들이 좀 영리하니? 어젯밤에 조용했던걸로 봐선 새콤도 무용지물이었네 뭐. 경찰들이 왔으니 뭔가 알아...! ]
갑자기 주절대든 은영의 입이 얼어붙은 듯 벌어진 상태로, 쪽 째진 작은 눈은 한껏 뜨져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은영의 반응에 희경은 무슨 일인가 싶어 앞사람 옆으로 살짝 비집고 들어가 가게 안을 쳐다보았다. 순간, 흠칫한 건 희경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했다. 희경은 꼼짝없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데도 심장은 독불장군마냥 무섭게 벌렁거리며 쿵쿵대기 시작했다. 은영이 뒤에서 희경의 어깨를 잡았다. 어느새 은영은 제정신을 찾고 있었다.
[너도 봤니? 대구 바닥이 좁긴 좁은가봐. 저 놈을 여기서 보다니.]분노와 비난이 뒤섞인 음성으로 은영이 나지막히 내뱉았다. 그리고 굳어 있는 희경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희경은 가게 안에 있는 한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앉았다 섰다 하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돌아 서자 희경은 남자의 등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감식.이라는 글자를. 감식반에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지문이나 혹, 증거가 될만한 것을 찾아 내는 게 감식반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희경도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경찰이 되어 있을줄이야! 그 생각은 미처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될 줄은 더더욱...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 말 그런 거 한도 없네.]마치 들어라는 듯 은영의 음성이 크지자 희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저런 나쁜 인간이 법을 준수하는 경찰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
은영의 비아냥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다. 돌아서서 가야 한다는 느낌이 머리속을 스치는 순간 그 남자가 출입문쪽으로 돌아서 오는 게 아닌가! 늦었다는 생각을 막 하는 순간 남자가 무리들 속에서 희경을 정면으로 보고 말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순간 희경은 자신을 알아보는 남자의 눈빛을 읽었다. 쌍꺼풀없이 움푹 들어간 그 눈에 놀라움이 번지더니 미간을 좁히며 이내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묘했다. 실망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희경의 몸을 한바퀴 휘익 돌고 지나갔다. 희경이 돌아섰다. 더 있어야 할 필요도 더 있고 싶지도 않았다.
[못된 놈!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런 놈 안 잡아 가고...괜찮니?]
[괜찮아. 좀 놀란 것 뿐이야. 신경 쓰지마]
충격에서 벗어 난 희경은 희미하게,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래, 신경 꺼자. 못 볼 거 봤다고 생각하면 되니깐...]
[어쩌면...]희경은 떨어지는 은행잎을 손바닥으로 받아 감쌌다. 촉촉한 느낌이 온몸으로 스며 들었다. 따스했다.
[어쩌면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었어.]
[맞는 말이야...커피나 마시자.]
마음이 슬며시 뒤쪽으로 향하자 희경은 한 쪽 가슴이 싸아.하게 스려오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발 밑에서 바스락 거리는 은행잎이 그런 희경의 마음을 대신하듯 씁쓸한 소리를 내었다. 그 남자를 처음 만난것도 가을이었고 통증같은 배신을 맛본것도 가을이었다. 다시 재회 한 것도 가을이라니! 가을. 정말 싫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흩날리며 멀어져 가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황량해졌고 목구멍 깊숙이서 쥐어짜듯 세어 나오는 낮은 중얼거림에는 고통이 묻어 있었다. 남자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세상을 온통 밝혀줄 것 같았던 빛나는 발랄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있는 건 과거의 아픈 추억뿐인 것도 보았다. 남자는 겨우 아문 가슴속 상처가 입을 쩍 벌리는 걸 보아야만 했다.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고 가는 세월 막을 수도 없었다. 그 때처럼 남자는 또다시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