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719

[제2회]


BY bebestar 2002-07-07

--아랫집 여자(2)


6월 중순이 조금 지난 때라 한 낮의 기온은 28-9도를 넘나들 정도로 무더웠다.
버스로 두정거장을 가야 할 정도의 거리에 대형 할인점이 있었지만 버스로 다니기는 왠지 어정쩡한 거리였던터라 동네 친구들이랑 "운동 하러 가자"는 말이 슈퍼에 가자는 말이 되어버렸을 정도니까...
여하튼 그날도 사람의 머리를 아주 센 불에 쪄 내야하는 고구마로 착각하는 태양으로 인해서 가만히 있어도 등짝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바람기 하나 없는 그런 날이었다.
아침 나절부터 목욕통에 받아놓은 물에서 나올줄 모르던 혜정이를 데리고 그 더운 낮에 그 먼 할인점을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집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외출을 할때는 앞뒤 볼것도 없이 아래로 뛰어 가는 딸애 때문에 날씨가 더운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집으로 오는길에 항상 터졌으니까...
그날도 5Kg이 조금 넘는 고구마를 사가지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슈퍼를 벗어난지 500m도 채 안되서 혜정이가 바닥에 주저 앉아버린다.
김말자씨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분명히 딸아이의 손에는 전략상 필요에 의해 사준 쭈쭈바가 들려 있었고 과자도 한봉지 뜯지 않은 채로 들려 있었다.
어디 신발이 벗겨 졌나 싶어 발을 쳐다 봤지만 신발도 두 발에 무사히 붙어있다. 모자도 벗겨지긴 했지만 아직 머리끝에 처절히 메달려 있었고 절대 안된다고 위협도하고 얼러도 봤지만 슈퍼 직원이 보는 앞에서 엉덩이에 깔고 밀고 다녀서 등짝을 검게 만들어버린 뿡뿡이 인형 또한 혜정이의 왼쪽손에 꼭 들려 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왜 혜정이가 걸음을 멈춘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 다리 아퍼. 엎고가"
혀짧은 소리를 내는 네살박이 딸이랑 길거리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김말자씨는 그제서야 딱 10분만 반값에 판다고 하던 슈퍼 총각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온 악마의 유혹이었다는걸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을 책망하고 있었다.
"혜정아, 엄마 손 좀 봐. 뭐가 있지?"
"고구마"
"그래, 혜정이 집에 가서 맛있게 쪄 줄려고 엄마가 이렇게 많이 샀는데 여기 앉아 있으면 고구마 못 먹잖아. 어서 일어나세요. 엄마랑 같이 손잡고 집에 가자. 와! 고구마가 빨리 자기를 삶아 달래. 혜정이 입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고 싶다고.."
"난 하나만 먹으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많이 샀어?"
"그거야 오빠도 유치원 갔다오면 배 고프니까 먹고, 저녁에 아빠도 일하고 들어오시면 배 고프니까 먹고 할려고 많이 샀지."
혜정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자 김말자씨는 여세를 몰아 아예일어서게 만들 욕심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혜정아 어떻하지?
엄마가 고구마가 너무 무거워서 오늘은 우리 혜정이 엎고 갈 수 없을것 같은데... 걸어 가자. 혜정이도 운동을 해야 날씬해 지지.
이 배 좀 봐. 아이 창피해라. 혜정이는 예쁜옷 입고 싶지 않아?
엄마가 혜정이 배만 들어가면 예쁜 옷 많이 사줄 텐데..."
그리곤 딸애의 눈치를 살핀다.
근데 이건 말을 듣는건지 마는건지 엎고 가자며 뻗은 팔을 거둬들일 조짐은 전혀 없다. 오히려 더 불쌍한 얼굴을 하고 엄마를 빤히 쳐다 볼 뿐이다. 또 다시 눈 싸움이 시작됐다.
먼저 입을 연 건 혜정이 였다. 일명 협상안 이라고나 할까?
"그러면 좋은 수가 있다."
"응? 말해 봐. "
" 한개만 들고 가자. 아니 두개만.
엄마 한개. 나 한개. 그거는 여기 두고"
얼마나 대단한 협상안이 나올꺼라고 기대를 한 건지 얼굴에 미소를 띠며 한 껏 웃던 김말자씨는 김이 샌다.
사실 이 정도는 귀여운 제안으로 받아 들일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그런 인내력을 발휘하기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너무 뜨거웠고 길을 오가는 인파 역시 너무나 많았으며, 때마침 도로가 막힌다며 인도로 뛰어든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를 급히 피하느라 비닐 봉지가 찢어지면서 온바닥에 흩어져 깔리는 고구마의 수가 너무나 너무나 많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새끼 손가락만한 크기의 고구마가 아니라 어른 주먹만한 고구마를 살껄하는 후회와 언젠가 시누이랑 같이 시장을 갔을때 고구마는 큰 것보다 이렇게 작은게 더 맛있다는 말이 왜 하필 그때 기억이 난건지 짜증이 뒤섞이며, 급히 피하게 하느라 길 한쪽으로 밀쳐버린 딸애에게 시선이 머물자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넘어지며 시멘트 바닥에 갈렸는지 벌겋게 피가 베어나오고있었고, 쭈쭈바는 저 쪽 바닥에 내 팽게쳐저 뱃속 내용물을 다 토해 놓고 있어으며 새로 샀지만 전혀 새것처럼 보이지 않는 뿡뿡이 인형은 근처에 세워져 있던 떡볶이 포장마차의 설겆이 통에 머리를 박고 혼자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참기 힘든 시험으로 다가왔으며 그녀는 더 이상 그걸 참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밑둥이 찢어진 비닐봉지를 대충 묶어 거칠게 고구마를 주워 담고는 딸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눈물도 닦아주지 않고 뿡뿡이를 물통에서 꺼내 물기를 털어낸 뒤 겨드랑이에 끼고 딸아이의 손을 낚아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릎이 아프다며 혜정이는 길거리에 다시 주저 앉아 버렸고, 이젠 울음소리도 서러움에 북받쳐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두 모녀를 번갈아가며 힐끗거리고 쳐다 보고 지나간다. 남의 일 참견하기 좋아하는 어떤 아줌마들은 애를 왜 울리냐며 혜정이를 얼르다가 울음소리가 더 커지자 난감해하며 제 갈길로 총총히 사라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혜정이가 주저 앉은 곳이 옷가게 앞이라 주인 아저씨가 가게에서 나오며 싫은 내색을 역력히 나타낸다.
"거 아줌마, 날씨도 더워 죽겠는데 왜 애는 울려요?
얘야, 아저씨가 더워서 짜증이 날려고 하니깐 그만 울어라.
으이그, 장사도 안되서 죽겠구만 재수없게 남의 장사집 앞에서 뭐하는게야? 아 빨리 애 데리고 가쇼. 칵-?"
김말자씨는 이제 화가 난다기 보다는 서러워 질려고 한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겨우 참고 혜정이를 일으켜 세우는데 더 악을쓰며 일어서지 않으려고 버틴다. 저도 화가 났다는 거겠지.
이놈의 고구마만 없어도 확 들쳐업고 가겠는데, 고구마에 인형에 혜정이에 어쩔도리가 없다. 이를 어쩌나... 이젠 바닥에 들어누우려고 드느 혜정이를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애가 저러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부모'라는 오해까지는 받기 싫었던 김말자씨는 혜정이를 포기하고 그냥 고구마만 든채 휙 돌아 성큼성큼 걸어간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떡볶이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기 전까지는
'엄마가 그냥 가면 저도 따라 오겠지... 어쩔수 있어. 지가
나도 책에서 봤다. 너 처럼 고집불통인 애들은 울며 떼 쓸때 들어주면 다음번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처음에 목적 달성을 하던때보다 더 심하게 운다는걸. 어디 울고 그러고 있어봐. 너만 손해지.
결국은 따라 오고 말껄?
네 오빠도 그렇게 버릇을 들였으니까 너라고 별 수 있겠니?'
머릿속으로 온갖 자녀양육서의 내용을 복습하고 있는 동안에도 딸애가 진짜 일어서 줄것인가가 걱정이 되어 속이 다 타고 있는데 그녀의 뒷 통수에 대고 누군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떡볶이집 아줌마의 목소리 였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금방 헤헤거리다가 펙 톨아져서는 말도 안하고
애들도 지 애인쯤으로 생각하는지 금방 애 한테 살살거리더니 저것봐.
애가 저러면 엄마가 궁둥짝이라도 때려서 애 버릇들일 생각은 않고
저렇게 가버리면 애가 애인처럼 절 따라 갈 줄 아나 보지?
엄마들이 저러니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다른게 말세가 아니라 저렇게 버릇없이 새끼를 키워놓으니 저것들이 커서 어른 무서운 줄을 아나, 공공 예절을 지킬줄 아나, 세상이 어떻게 될려고 갈수록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이러냐. 쯧쯧쯧"
김말자씨는 머릿칼이 쭈뼛 설만큼 화가 났다. 길거리에 들어누워 우는 자식이 예뻐 보이는 부모가 어디있겠는가 말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와 역지사지의 태도(남과 자신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 할 줄 아는 태도)를 평생 신조로 삼고 살고 싶은 그녀로서는 자식으로 인해 그런 오해를 받을때 만큼 속상한 것이 없었다.
큰애를 키울때도 여느 또래 애들 보다 별난 아들 녀석 때문에 동네에사죄를 드리러 가지 않은 집이 없을 만큼 힘 들었었는데 딸아이는 좀 다르겠거니 하고 키우는 둘째가 첫애와 같은 전철을 밟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맘이 편치 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면 내가 저렇게 하라고 시켰단 말인가요?'
생각같아서는 한 마디 하고 싶어서 뒤로 휙 돌아섰는데 아줌마가 연세가 친정 엄마 연세정도로 들어 보였던 탓에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그 말을 참느라 목젖이 아플 정도였다. 떡볶이집 아줌마는 네가 노려보면 어쩔 꺼냐는 듯 눈을 내려깔고 김말자씨를 연신 흘끗거리며 쳐다 봤으며 가끔 여전히 드러누워 앙탈을 부리고 있는 딸애를 보며 못내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때 였다.
그 아랫집 여자가 나타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