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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3


BY B&H1973 2002-07-24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건 잠깐 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 이더군.


고창 선운사로 가는 버스안.
선운사까지 40여분 남았다는 여행가이드의 말에
갑자기 그가 조용히 시를 ?섦쨈?
정확히 95 년 3월 19 일에 내가 구입했다가,
그를 연인으로 인정하며,처음으로 그에게 준 시집에 있는 글.
최 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첫장에 있는[선운사에서]...

그 시가 너무 좋아 그와 시암송 내기 를 한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첫 다섯구절만을 낭송하고,알고 있는게 분명한데도,
더 이상 낭송하려 하지 않았었다.
내가 이유를 물어도 아무말없이 씨익 웃기만 하더니,
이니셜이 새겨진 사파이어 반지만을 쑤욱 내밀고,
쑥스러운듯 그저 물만 마셔 댔었다.
부평역앞 . 카페 "ef" 에서였다.

"아니 언제 외운거야? 기억력 좋다.

"요 근래 한번 더 읽어봤었어.괜히 읽어보고 싶더라."

"그 시를 읽고나면...좀...서글퍼져...오빠도 그래?"

"응.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건 한참인것...
지는건 쉬워도 잊는건 한참인것...
꽃 보다는 사랑이 아닐까...싶어.
작가도 그걸 말하려는것 같고...
아님 ,꽃과 사랑을 동질화해서 표현했을수도 있고..."

혼잣말처럼...시를 몇번 되뇌어보더니,그는 다시 침묵속에 잠긴다.

아...아. 그에게 어떤말을 해줘야 하나......
내 사주 때문이라면, 그는 당장, 침묵과 우울을 걷을텐데...
그런건 아무 문제도 아니라며,자기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며...
처음 그 날의 환한 웃음으로 나를 안아줄텐데......
하지만,내 부모님이 반대하고 있고,그의 부모님 역시 나를
조금은 달갑지 않아 하신다.
일찍부터 생각해놓은 여자가 있다며,가끔씩 내게 전화하셔
정중히 부탁하신다.
집안끼리 약속이니,자네가 우릴 좀 도와달라고.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 하니,자네가 멀어지고,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나 역시 정중히 거절했지만,솔직히 자신없다.
밀고 나가면야 꺽이지 않을 분들은 아니지만,
난 평생 그와 그의 부모님에게 죄인같은 기분으로 살아갈것이기에...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여니,뺨에 와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초 겨울 겨울바람에 비가 조금 섞여있긴 해도 그마저 시원하다.
충무바다 에선 비바람도 너무 세차고,멀미를 심하게 하다보니,
섬 정상에 있는 등대에 오르지 못하고,배 안에서 멀리 등대만
쳐다보고 왔었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긴 하지만,차에서 내려 조금 쉬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나를 챙겨 주느라 그도 많이 지쳐있을것이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착한 그는 아마 내 부모가 자길 반대해서,내가 헤어지려 하는걸로
짐작하고, 혼자 고민하고,힘들어 하고 있을것이다.
요즘 부쩍 말이 없어지고,우울해진 나를 보고,
그 역시 이별을 짐작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있을것이다.

그의 보기좋던 턱선이 며칠새 야위어보인다.
도착을 알리며 차문이 열렸음에도,그는 어느새 잠들어
일어날줄 모른다.
간밤에 차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기에 깨우지 않으려다,
허리와 발 만이라도 펴고 자게 해주고 싶어 그를 깨웠다.
부시시 일어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일부러 수다를 떨었다.

"이 아저씨 웃긴 아저씨네.
뭐 ? 전천후 보디가드? 무슨 보디가드가 이러냐?
누가 나 납치해가도 잠만 자고 있겠네.뭐..."

"너 납치 하려면 1개 중대가 움직여야돼.
너 열받으면 무섭잖아.열 댓명 정도는 너 혼자 처리할껄.
너 한 터프 하는거 보고 내가 반했잖아.
그냥 니가 내 보디가드 해라. 펴...엉...생!
...........................................................
나.. 열심히 살거고, 너 많이 도와주고,너 힘들게 안할께.
네 어머님,아버님께 아들처럼 잘하고,너 하나 사랑하며 살께.
너랑 내가 살 집 설계도면도 그려났어.
지금가지 내가 건축한 그 어떤 집보다 이쁜 집에서,
딸 하나,아들 하나 낳고,행복하게 살자.
평생.네 나무가 되고,산이 되고,집이 되고,버팀목이 될께.
네 곁에서 나 평생 너의 보디가드가 되고싶다."


나의 수다에 농담으로 받아치던 그가 어느순간,
너무나 진지해져 내게 청혼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가 내게 청혼을 하리라 예감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갑자기,뜻박의 장소 에서,더구나 이별 여행지 에서...
순간, 나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할수없다.
그 어떤 말도 할수 없고,그 어떤 표현도 할수없다.
온 몸에 기운이 빠져 털석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 빠져나간 버스 안에서 그와 나만 앉아있는게 이상했는지,
여행 가이드가 그에게 묻는다.

"여자분이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배 에서도 멀미를 많이 하시던데......
여기서 부터 선운사 까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어쩌나.
그렇다고 차안에만 계시게 할수도 없고.......
여기 제가 잘 아는 민박집이 있는데,거기서 잠깐 쉬시겠어요?
비는 멈췄는데...바깥은 너무 추워요.편히 누울 만한데도 없고."

민박집으로 가겠냐는 가이드의 물음에 그는 아무 대답도 안한다.
점심 식사 시간과,휴식시간까지 4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내가 먼저 따라 나섰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조금 멀리 내려오니 선고운 기와집 하나가
큰 소나무 하나를 등에지고 얌전히 앉아있다.
가이드와 주인인 듯한 중년 여인은 서로 잘 아는 사인가보다.
몸이 안 좋아 서너시간 쉴거란 가이드의 말에,시원한 식혜 그릇을 우리에게 건네주며 편히 쉬라한다.
멀미와 여행에 지친 몸을 뜨거운 물로 씻어내고,
정갈한 이불위에 누우니 여인의 인정 만큼 방안이 따스하다.
비가 다시 내리다 보다.
보라색 커튼의 실루엣 너머로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려온다.
샤워하고 나오라는 내 말에 괜찮다며, 고집을 피우던 그가
벌개진 얼굴로 샤워를 하고 나온다.
내 옆에 누우라고 했더니,마지못해 눕는다.
그에게서 나는 비누냄새가 싱그럽다.
젖은 머리에 베인 샴푸 냄새가 향긋하다.
빗발이 굵어지는지...방안이 빗소리로 가득찬다.
그의 숨소리가 내 안에 가득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