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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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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BY ggummani 2002-06-05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낙동강에. 본관 사층의 가장 안 쪽에 위치한 도서관에서는 구포역과 낙동강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개가식 서가의 한쪽 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다가 눈이 부셔와 손을 이마에 대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창밖을 내다보면 해가 강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연한 노랑이다가 다음에는 진한 노랑의 빛을 쏘면서 깊고 넓기까지 한 낙동강너머로 해가 빠져 버리면 하늘에는 내장처럼 붉은 구름만이 낮게 내렸다. 피처럼 뚜렷하게 선명한 붉은 빛이 아닌 내장처럼 뭉글뭉글하게 꿈틀대는 붉은 구름들. 그 구름들과 조응하면서 이미 삼켜버린 뜨거운 해를 헉헉대며 반사하던 붉으레하고 노랗기도 한 강물. 강물은 느리게 흐르고 노을이 내리는 순간, 잠시 흐름을 멈추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둠이 내렸다. 아주 빠르고 갑작스럽게.

우리, 나와 미현이 그리고 또 하나의 친구 강희는 읽던 책을 덮어 책장에 꽂고는 조용하지만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데스크로 가서 하루 동안 대관이 되거나 반납된 책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개가식이어서 마구 들락거리니 좀 어수선한 책장도 대충 둘러보고 정리를 한다. 중학교 도서관이라 시험기간이 아닌 평소에는 여덟시만 되면 문을 닫기에 우리들의 손길은 바쁠 수밖에 없다. 하나 둘 떠난 학생들의 자리들을 돌아다니면서 의자와 좀 어수선해 있는 종이조각 같은 것도 치워야 한다. 우리가 맡아 하는 일은 말하자면 사서 보조일 이었다. 사서라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롭고 일이 많다보니 학생들 가운데 몇 명을 뽑아 보조를 하게 했다. 정말 중요한 분류나 색인, 관리 등은 사서 언니가 맡아서 하고 우리는 대관이 되는 책들의 열람카드 같은 것을 정리하고 청소 같은 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우 중학교 이학년이었던 우리들에게는 그것조차도 너무나 신선하고 즐거웠다. 우리 이전의 부모님들이나 여러 해 선배들에 비하면 많이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책은 만만치 않은 가격에 귀한 것이었다. 선배들 보다 나아진 것은 참고서라도 풍부하다는 것이었고 문고본이라고 할지라도 용돈으로 책을 사 볼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 것이라고 보여 진다.

이후의 유행을 이끈 로맨스 북이 나오기 전, 우리들이 읽은 것은 삼중당 문고와 레먼북스 같은 것들이었다. 국민학교 때 에는 주로 새소년 클로버문고를 읽었다. 도서관은 달랐다. 지금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천장까지 닿는 대형 책꽂이를 네 개씩 붙여 오열쯤 있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정말 내가 본 가운데 가장 책이 많은 공간이었다. 책꽂이들의 사이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혹은 창문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직 지혜와 지식을 구분 할 줄 몰랐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다 훌륭한 줄만 알았던 때에 책들이 전해주는 지식의 무게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책들에 경도되었다. 을유문화사의 문학전집이나 함석헌 전집, 한 권의 크기와 무게가 백과사전 만 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 뿐 만이 아니었다. 단편적으로 읽었던 안데르센 완역본도 그 도서관에서 읽었고 당시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금성출판사의 만화로 그린 세계명작도 그 도서관에서 뗐다. 심지어는 몰몬경까지도 시도하였으니 그 무렵의 내 책읽기는 기준이 없었다. 시도만 하고 못 읽은 책들도 많다. 그러나 그 분위기에 젖는 것 만으로도 나는 아니, 우리는 행복했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사춘기의 폭풍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