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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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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BY 마음 2001-11-27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더 일찍이 출근해서 강주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주사의 큰딸이 초등학교 이학년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늦둥이로 아들을 보았다고 돌잔치를 거하게 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처녀방을 들락거리는지...
나는 마음을 다 잡아 먹기 위해 아침에 벌써 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 기어이 오늘은 모든 걸 까 발리고 말리라.

어젯밤에 숙직을 해서 좀 늦게 왔다며 계장님에게 꾸벅 절하는 그에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했다.
그도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오늘내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완전히 구겨져서 도무지 머리 회전이 안된다.
내가 하나 새로 구입해 놓은 전자계산기도 내 손가락도 모두 시시각각으로 제멋대로였다.
연말이라 결산은 엄청나고 쌓아둔 서류도 산더미 같은데 내 속에선 뿌연 화염만 자꾸 피워 올라 헉헉 거려야만 했다.

강주사는 일치감치 군청에 다녀 오겠다며 자리를 뜬다.
완전히 사면초가에 놓인 기분이다.
모두들 작당을 해서 나를 몰아내려는 의도처럼 만 보인다.
여기서 내가 물러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일들을 내가 무슨 수로 처리를 할 수 있겠느냐만 일단은 강주사와 단독으로 이 문제를 집고 넘어 가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기회를 내게 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점 점 지나간 얘기가 되어 가고 있고 그 사이에 미스리 방에서 나는 세 번째의 사건현장을 잡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그 날은 내가 외박이란 걸 한 날이다.
윤미네 미술학원의 그 뒷방이 숙소 내방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온기가 있어서 오히려 겨울을 지내기에는 그쪽이 훨씬 수월했다.
눈뜨자 마자 출근하는 사람들 생각해서 바삐 숙소로 들어오고 있는데 이번엔 제법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컸다.
까치발을 하고 슬쩍이 그녀의 유리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남자용 슬리퍼가 그녀의 신발 옆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오히려 떨여서 후다닥 내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마음을 진정 시켜 보지만 그녀에 대한 분노로 내 속은 시간이 갈수록 자제하기 어려운 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자근자근 그녀를 생각하며 이빨을 갈고 있었다.
‘저게 어찌 사람이야.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그것도 멀쩡한 처녀가...’
나는 혼자서 분을 삭히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역시 강주사가 또 유릿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용기를 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 둘거야.
가슴은 뛰었지만 내 잠재되어 있던 욱하는 성격이 튀어 나온 것이다.
밖으로 거의 동시에 뛰어 나왔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인 건 강주사가 아니라 김주사였다.
예방의약계 김주사,
그는 희멀대한 키에 타고난 허풍에다 보건소 내에서도 거의 다 알려진 바람꾼이었다.
“아이구, 박양! 벌써 일어났어요. 부지런도 하네. 지난밤에 내가 술을 좀 과하게 먹어서 미스리한테 물이라도 한잔 좀 얻어먹을까 해서...”

김주사가 엉거주춤한 폼을 하고 사라진 뒤 방에서 기척도 없는 미스리의 방문을 열고 나는 반 쯤은 정신이 나가있는 여자처럼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속옷인지 겉옷인지도 모를 옷들을 걸치고 석유난로 앞에서 멍청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조금은 멋쩍어 하는 듯 했지만 내 표정에 더욱 굳어져 가고 있었다.
“나 이대로 이번일 안 넘길꺼야. 알았니? 니가 어떤 아이라는 걸 전부 다 까 발릴거란 말이야. 죄다...”
나는 그녀를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 발길질이라도 해 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내 말만 하고 문을 닫아 버릴려는데 그녀가 내 뒷통수에다 대고 한마디를 했다.
“니가 뭔데?”
난 다시 뒤돌아서 그녀를 노려 보았고 그녀는 또 다시 말했다.
“그럼 너만 우스운 여자 되는거 아직도 모르겠니?”
“상관없어.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해. 난 니가 어떤 여자인지만 밝히면 돼”
“오바하지마! ”
“뭐! 오바한다고? 내가 뭘 오바한다는건데?”
“이상한 상상 같은 거 하지마란 말이야.”
“니가 어떤 아이라는 걸 내가 아는데 이상한 상상이라고? 어느 누구 한테든 얘기 해봐라. 혼자 사는 처녀 방에 낮도 아닌 밤에 그렇게 나오는 남자가 있다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지는 뻔한 얘기 아니니?”
“아니야. 꼭 그런건 아니야.”
“무슨 얘기야. 아니라고...뭐가 아닌데?”
“나쁜 상상 하지마.”
순간, 내 속은 더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여린 몸에다 입술은 금방이라도 선혈이 흘려 내릴 것만 같이 붉어져 있고 눈은 불안에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서 날 쳐다 보고 있었다.
저 아이를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그저 이말만 속으로 속으로 대뇌이고만 있었다.

내 혼란스러운 마음은 시간을 거듭 할수록 늪으로만 자꾸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가리라.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나는 끝내 방을 알아 보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