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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마음 2001-11-23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처럼 편하게만 느껴졌던 윤미에 대한 생각들이 뿌연 안개속에 갇힌 모양으로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게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나 기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내 옆에 그런 친구 하나를 둔다는 것이 나한테 미칠 영향에 대한 기대였고 또한 호기심이었다.
한때 나 역시도 로뎅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리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열정에 빠져 들어 자신을 완전히 재로 만들어 버린데도 한번쯤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때일 뿐이다.
윤미가 썼다는 허무에 대한 시도 분명 그러한 얘기들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윤미와 나눌 수많은 얘기들이었다.

보건소 내에 있는 숙소였지만 건물 뒤편으로 돌아앉아 있어서 정문만 통과하면 별달리 신경 쓸만한 일은 없었다.
윤미가 우리 숙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단지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거나 잠깐씩 지나가는 길이었거나 그랬을 뿐이다.
그녀가 저녁을 먹고 가는 날에는 나는 최대한 요리솜씨를 발휘했었고 그녀는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고마움을 내게 전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이력이 생긴 것 같았다.
후식으로 가지고 온 커피를 마시면서 갑자기 밤바다를 보러 가자고 하면 우린 어김없이 밤바다로 향했다.
내가 그런 말을 기다리는 줄 그녀는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걸어서 삼십분 거리, 여자, 그것도 처녀 둘이서 겁도 없이 밤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달콤한 기분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그 때 윤미한테 이런 말을 했었다.
"니가 남자였더라면 나는 너무 너무 안타까워 했을 꺼야. 니가 여자라는 것 하나 때문에 내가 이러한 시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보낼 수 있으니 말이야"
"나는 아닌데...내가 남자였으면 좋겠다 싶은데... 내가 남자 였더라면 아마 이런 데이트 너무 멋지잖아. 이런 밤중에 바다, 그것 하나 보러 가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너처럼 이쁜 여자하고 말이야."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어둠에 잘 융화되어 두려움마저 달아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의 모습은 늘 그렇게 우리들을 몸살나게 했다.
해가 뜨는 바다부터 밤바다 까지, 가랑비가 내리는 바다부터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까지, 우리는 매일 같이 그 모습을 찾으려 잠을 설쳐 가면서도 따라 나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일치 되어질 때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에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나와 다른 그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그 당당함,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그런 그녀가 내 곁에서 그것도 늘 그렇게 붙어 있어 주어서 나 조차도 덩달아 그녀를 닮아가는 듯 했다.
사실 닮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얌전한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플레어드스커트만이 내가 입는 유일한 스커트였다면 그녀를 만나면서 미니 스커트가 아니면 롱스커트로 바뀌었고 어정쩡한 단발머리는 짧은 숏커트로 바꾸고 하지도 않던 귀고리도 큰 것으로 일부러 골라서 달고 다녔다.하지만 그건 그녀를 만날 때였고 차마 출근 할 때는 그리하지를 못했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을 때에는 다만 그녀가 내 옆에 있을 때만이 가능했다.
나는 고집스럽게 나를 바꿔놓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영 어색하다고 했고 그 단발머리에 대한 추억으로 아쉬워 하는 이도 있었다.말을 속에 담아 두지 못하는 직원들 입에서는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미스박! 지금 그 머리 미스박한테 안 어울리는 알어? 원래의 모습이 더 나아, 그런데 그렇게 변해가는 이유가 뭐야. 괜히 다른 사람들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생긴대로 살어.”
하지만 다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내 변화가 보기 좋다는 이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또래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어느 누구의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용기가 내게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 나대로 내 삶에 있어 성공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 처음으로 윤미의 그림을 볼 기회가 생겼다.
아직 완성이 덜 된 듯한 그림이었는데 낯익은 포구의 모습이었다.
큰 배 한척을 중앙에 두고 뒤로 보이는 건 검푸른 바다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배 역시도 폐선인 듯 형편 없이 낡고 부서져 있어서 순간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말았다.
우리가 일출을 보려 다녔던 그 동네의 모습이 틀림없는데 그녀는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이렇게 검푸른 바다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이런 큰 폐선 또한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바다는 이런 모습이었던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제 색을 내는 것이 없었다.
유화라서 이리도 답답할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그림이 눈에 각인이 된 듯 자꾸만 얼쩡거렸다.

여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미스 리와 김태운이라는 사람이 만난다는 것에 대해 하나 같이 걱정들을 하더니만 그 남자가 입대를 한다니까 이번에는 미스 리 걱정부터 했다.
“미스 리가 제일 서운해 하겠구만,”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군대를 간다고 하는 건 뭔지 모르겠네. 한참 연애한다고 푹 빠져 있더구만”
“글쎄말이야. 가긴 언제라도 갔다와야 할거지만 금방까지도 온 읍내가 떠들썩하게 연애를 하더니만 느닷없이 군에를 간다니... 뭔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둘이 싸웠던지...”
내놓고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까지 그들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방에서 보따리를 싼 후 그녀와 단 십분도 얘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철저하게 상대를 무시해 버렸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김태운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그리고 그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다는 것도 모두가 귀동냥해 가며 얻은 것들이었다.

그녀의 부탁으로 송별회에 함께 참석했을 때에 내가 그녀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그녀는 오히려 나한테 꼭 붙어 있었다.
김태운 그 역시 오히려 말을 해도 나한테 걸어왔고 의식적으로 미스리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모습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서 미스리가 한말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다 해 버렸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어서 그를 볼 때나 미스리를 볼 때 마다 그 생각이 겹쳐졌다.
밖으로 내 ?b지 못하고 삼키기만 하는 말이 있었다.
“바보같이, 할 얘기가 따로 있지.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