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저지른 일도 아닌데 한 보따리 사 들고 옆 방으로 들어가는 내 꼴이 우스워졌다.
대강 정리는 되어 있었지만 아직 방도 닦지 않은 채였고 오래동안 비워둔 방안의 공기는 그 서글픔을 더해 깊은 밤에 느껴지는 적막함과 함께 가슴 한 구석에 설렁한 바람 하나를 일으키고 있었다.
수건 하나를 빨아다가 방을 훔치고 일단 이부자리부터 깔았다.
여름인지라 온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썰렁한 방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위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쪽 구석에는 미스리 비키니 옷장에서 빼내온 내 옷가지들이 구겨져 있었다.내일은 저것부터 어떻게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또 뭘 사야하는지를 메모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스리일거라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가자 가슴이 또 뛰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야 그녀가 서 있는 바깥 출입문을 천천히 열었다.
밤새 켜져 있을 가로등 불빛이 운좋게도 숙소 앞 마당까지 뻗치고 들어와 앉아 있었다.
그 불빛속에 서 있는 그녀는 내게는 저승 사자를 보는 것 마냥 섬뜩했다.
“들어올래?”
내 목소리에 이미 그녀를 거부하는 무정함이 베여져 있었다.
내가 그녀를 대하는 것이 처음 그녀와 한방을 쓰게 되면서 시작된 큰언니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 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녀 앞에서는 그런 모습이 훨씬 나다운 모습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나를 아주 잠깐 노려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거두어 갔다.
그리곤 너무 오래 비워져 있던 방이라던데 잘 수 있겠냐며 오히려 걱정을 한다.
나는 끝내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다시 제 방으로 되돌려 보냈다.
뒤 돌아선 그녀의 꼭 다문 입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끝내 그것을 무시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문단속을 꼼꼼히 챙기고서야 잠자리에 들었지만 원래부터 겁이 많았던 나는 그날 밤, 잠이 드는데 만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제3장 세 여자
우리가 그렇게 갈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병리기사였던 김태운이라는 사람과 미스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떠돌기 시작했다.
겨우 직원들이라고 해 봐야 병원쪽 식구들까지 모두 합쳐도 오십명도 채 안되는 근무지에서 사내 연애는 그저 뉴스 중의 뉴스였다.
처녀 총각들이 만나는 거야 뭐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던 그 병리기사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다시 봄직한 그런 인물이었다.
결혼한 유부녀들은 내놓고 농담처럼 그 남자의 외모를 가지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았다고 했다가 남진이라는 우리나라 가수를 닮았다고 했다가..., 그렇게 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귀밑으로 내려오는 구렛나루 때문이었는데 정도가 심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나 역시도 그런 모습이 멋있어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어서 그럴까,
미스리에 대해서는 익히 알아봤다고 비웃는 이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또 심지어 멀쩡한 젊은 총각 하나 망쳐놨다며 노골적으로 미스리를 몰아붙이는 이도 있었다.
그 말이 나온 것은 사실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이 좁은 읍내에서 그들의 만남이라면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감시카메라에 포착이 되듯이 직원들의 눈에 찍혀 질 것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들은 아니었을텐데...
여관까지 들락거린다는 말은 최종 목적지까지 갈때로 간 것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나보다 한살 어린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역시 미스 리에게도 그 남자는 분명 연하였다.
한살 차이의 연하?
연하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점 점 골이 깊어졌고 그녀가 확실한 연애로 들어섰다는 짐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그녀는 내가 없어도 전혀 달라질 게 없었다.
아니, 더 없이 자유롭게 날개옷을 찾아 입고 맘껏 날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그녀만의 날 들이었다.
퇴근과 동시에 그녀는 외출 준비에 바빴고 어디를 그렇게 나풀거리며 나가는지 뒤 밟아 볼 사람도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것이 그녀가 진정 바라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 건 내 오만이었을까?
그녀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김태운이라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오히려 옛 남자를 더욱 생각나게만 만들 뿐, 그녀의 정신적인 치료자 역할은 할 수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출은 계속 되었다.
그 외출의 끝이 좀처럼 보일 것 같지 않더니... 어느 날, 느닷없이 그 만난다는 남자가 군입대를 한다는 소문이 듣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 남자는 아직 군에도 안 다녀 온 것이다.
하긴 나이로 봐서 학교 졸업 후 바로 이 곳에 들어온 것으로 계산이 되는데...
그 남자가 임시직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제서야 그러한 뒷 얘기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가 입대하던 날은 일부 또래 직원들의 환송회가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나더러 꼭 가자며 찾아온 사람이 미스리였다.
내 방문을 두드리더니 불쑥 김태운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며 환송회는 꼭 가주고 싶은데 혼자 가기가 멋쩍다고 나더러 동행해 줄 것을 부탁조로 해 왔다.
그리곤 다시 그녀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남의 얘기 하듯이 말했다
“김태운씨 한테 내 얘기를 다 해 버렸거든. 그랬더니 갑자기 저렇게 가겠다고 나오는 거야”
그녀의 눈이 순간 공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코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밭이 그대로 바람을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녀가 입사한지 한달을 겨우 넘기면서 시작된 이 연애사건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