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8-
"파도"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영은은 한쪽팔로 눈을 가렸다.아...!여기는...?!
갑자기 어제일이 생각나 영은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옆자리를 봤다.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원래 아무도 없었던것처럼 단정했다.
이런곳에 그것도 혼자 남겨진 그녀는 망연해진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벌벌 떨렸다.
그는 가버린걸까...?
영은은 불안하고 또 기가 막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영은은 전화를 받아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인다.
지금 자신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그가 아니면 없다.
용기를 내어 수화기를 들었다.
"영은아!"그의 목소리였다.
입안이 바싹 말라 영은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
"일어났니?"
영은은 가까스로 "네..."하고 대답한다.
"잠이... 일찍 깨서 나왔어."
그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 같아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골목을 나와서 바닷가가 보이는
창이 제일 큰 찻집에 있다고 했다.
영은은 그가 카페의 이름을 왜 얘기하지 않는지,그리고 자신은
또 왜 거기가 어디냐고 잘 묻지도 않은채
전화를 끊어버린건지 알수 없었다.
당장 여기서 건물밖으로 나갈일만으로 걱정스러워...
영은은 그의 앞에만 서면 턱없이 바보스러워지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너머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수는 해야 할지,이대로 그냥 나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가방을 뒤져보았다.
늘 가지고 다니던 화장품들이 오늘따라 빠져 있다.
립스틱하나도 없다.
그에게 자신의 흐트러진 이런 모습까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초라해진다.
영은의 마음은 지금
남자와 밤을 보내고도 한층 더 멋스런 얼굴로 나타나는
과친구들이 오히려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가진 배짱도 오기도 없이 흐르는 자신의 감정하나에만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에 비하면 그들은 얼마나 사랑에 당당한가.
영은은 약간 오르막인것 같은 골목을 가까스로 걸어내려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리에 힘이 없다.
모텔의 복도는 왜 그리 길고 어둡기만 한지 영은은 숨도 쉬지 않고
달려나왔다.그바람에 청소하던 아주머니와 쿵소리까지 내며 부딪혔다.
그녀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미안하단 말도 못한채
얼른 일어나 달아나듯 모텔 문을 열고 나왔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그가 이모습을 봤다면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그와 나란히 그곳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마음으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낼 생각까지했다니...
어젯밤 자신의 결심을 믿을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일 없이 아침을 맞은 자신이 다행스러운지는 알수 없었다.
그는 왜 자신을 안으려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여자로 느끼지 않는걸까...?
어젯밤을 떠올려보며 길가에 쭉 서있는 카페의 간판을 올려다 보던
영은의 입가에 갑자기 미소가 번진다.
그가 말한 '바닷가가 보이는 창이 제일 큰 찻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가에 앉은 그의 모습도...
그가 손을 들어 보인다.
영은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보냈다.
그는 피던 담배를 왼쪽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입모양만으로 '어서 들어와'라고 해보였다.
그의 앞에 앉았다.
그는 피우던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테이블위엔 금방 따라 놓은듯 뜨거운 커피가 놓여져있다.
구수한 원두의 향이 좋았다.
영은의 시선을 따르던 그가 말했다.
"으응.금방 리필했어.너 배 고프겠다.우선 뜨거운 차 한잔하고
나가자.뭐 마실까...?내가 골라줄까...?"
그는 영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메뉴판을 든다.
그가 물었다.
"괜찮지...?"라고...
그는 누구에게도 이런걸까...?
부드럽고 친절하게 '괜찮지...?'라고...
되묻는듯한 그의 눈빛에 영은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진한 초콜렛빛 메뉴판에 가려 영은의 눈앞에는
그의 긴손가락만 보였다.
교정에 앉아 기타를 치던 그의 섬세한 손가락.
그녀의 어깨를,손을,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았던
그의 커다랗고 따스했던 손...
영은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을 만지기라도 한듯 온몸이 떨려온다.
갑자기 그가 얼굴을 드러냈다.
영은은 자신의 생각을 그가 알아채기라도 한듯 무안해진다.
그가 영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뜨거운 코코아!그거 마셔라.피곤할땐 코코아가 좋대더라."
문득 그의 말투가 거슬렸다.
이거해라,뭐하대더라...그리고...
왠지모르게 그는 영은을 애써 아이처럼 대하려는듯 했다.
일부러 자신을 여자로 느끼지 않으려 그러는걸까...?
그가 손을 들어 주문을 했다.
영은이 코코아를 마시는 내내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다.
그는 바다를 보는 것일까...?
그를 본다.
조금 야윈듯한 얼굴.
턱밑으로 약간 자란 까칠한 수염.그리고 그의 입술...
그의 입술은 윤기나는 립스틱을 바른것처럼 붉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은 얼마나 많은시간
그리움에 몸살을 앓아야 했었는지 그는 알까...?
알고도 모른체 하고 있었을까...?
알수 없는 그의 마음에 영은은 또다시 마음이 아프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영은을 본다.
"너 바다 좋아하니...?"
그가 물었다.
영은이 대답했다.
"아니요."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모른다.
그가 말했다.
"그래.바다 좋아하지마.바다 좋아하는 사람은 청승맞대더라."
그리고는 그가 일어섰다.
"그래도 왔으니까...인사는 하고 가야지."
말없이 그를 올려다 보는 그녀에게 그가 손을 내민다.
영은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그러나 꽉 힘주어 잡는다.
영은이 우동국물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웃는다.
"너 뜨거운 거 잘 마시는구나!아니야.더 먹어.난 괜찮아."
그의 말에 어머니가 떠오른다.
'뜨거운거 잘 먹네.그래도 다행이네.인복은 있겠어.어여 먹어.'
더 마실수가 없어 영은은 그릇을 내려 놓는다.
"왜...?더 먹지.좋다는 뜻인데..."
영은의 어두운 표정에 그가 미안해했다.
"아니에요.많이 먹었어요."
어쩌면 어머니도 영은처럼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닷가로 나가는 길은 단단한 가드레일에 가려져 있었다.
슬픈 누군가가 바다를 향해 마구 달려가 안길까 염려스러워
저렇게 앞을 막아놓은걸까...?
한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혜영에게서는 느낄수 없는 강한 담배내음이
그를 더 남자로 느끼게한다.
어린 영은은 어디선가 담배냄새만 나면 놀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빠왔어요?'하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영은에게 담배냄새는 곧 아버지였다.
어디도 닮은구석이 없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느낀다.
그가 영은을 본다.그리고 말했다.
"넌 담배 안피니...?"
"...네."
"그래.피지마라.몸에 해롭대."
"...네."
그러고보니 그의 말투가 아버지같았다.
길가 화단 한귀퉁이에 그가 몸을 기댄다.
영은은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 이것저것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는 대답해줄까...?
문득 여태 그를 부를 어떤 호칭이 없었음이 떠올랐다.
"근데...뭐라고 부르죠?선배...?"
영은의 물음에 그는 오래간만에 환한 웃음을 보인다.
"그러고 보니...그래.내가 선배긴 하지만 네선배는 아니잖니.
영은이가 날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넌 어떻게 부르고 싶어...?"
그를 어떤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부끄러운듯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난 네가 날 '누구씨'라고 불러줬음 좋겠다.
어때...?좀 징그럽지...?그래도 오빠나 선배 또 아저씨 그렇게
다른애들이랑 똑같이 부르는건 싫을것 같다.넌 어떠니...?"
뜻밖의 말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말을 생각해 낸것 같지 않다.
자신을 어린애대하듯 던지던 그의 말투와는 달리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남자로 느껴달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설레임에 그와 처음 마주 앉아 보았던
그의 수줍은 미소가 생각났다.
그도 그녀처럼 자신의 앞에서만 이런걸까...?
그런거라면 좋겠다고 영은은 생각했다.
자신의 친구와 잠을 자고 어떤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까지 듣고도 영은은 좀처럼 그와 그 얘기들을 연관지을 수 없다.
이렇게 맑아보이는 사람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아니 영은은 믿지 않으려 한다.
그가 말하지 않는한 그녀역시 먼저 묻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영은은 자신이 한순간에 무분별하고 철딱서니없는 여자가 되어
있는것만 같다.
그러나 그를 만나지 못해 괴로운것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나을것 같다.
혼자 가슴을 쥐어뜯기보다 그와 함께 있는 아픔을 그녀는 택했다.
버스를 탔다.
차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눈을 뜬 바다 역시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을 탁 트이게 해준다는 바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바다는 철썩일때마다
울컥울컥 울음을 토해내는것 같다.
조금이라도 다가서면 금방이라도 삼켜버릴듯
고운빛으로 자꾸만 자신을 빨아당기려하는 바다.
그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낸다.
그의 손이 영은의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차가 갑자기 쿠웅하고 흔들렸다.
순간 영은은 그의 흔들리는 몸이 거대한 파도같아 섬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