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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을 공개합니다.


BY 인연 2001-08-26

제1부 천상의 인연

지숙은 1녀 5남의 유복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J대 가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소심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숙은 차분한 성격으로 인해 캠퍼스 시절에도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해 봤으며 그렇다고 가슴속에 남 모르게 묻어 둔 짝사랑도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동아리 정기 모임에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참여하였을 뿐 적극적인
활동도 하지 않아서 대학 4년 동안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책과 씨름한 기억밖에 없다.
유교적인 가정 환경이 지숙의 젊음을 그렇게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했지만 지숙 또한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닌 것조차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지숙에게도 강의를 팽개치고 구애의 손길을 뻗쳤던 남학생들도 다수가 있었다.
지숙은 그때마다 빙그레 웃음만 지을 뿐 묵비권으로 일관하며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내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은 그런 지숙을 보고 반반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공부밖에 모르는
친구로 인식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지숙이 몰래 고시 준비라도 하는 줄 오해도 하였다.

지숙에게는 꿈이 있었다.
부모의 뜻에 따라 전공을 잘못 선택한 자신을 후회하면서 졸업 후에는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업하여 자신의 원대한 미래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지숙은 졸업 후 유교적인 가풍으로 인해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물론 주위의 친척어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지숙으로서는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른들은 한결같이 지숙이가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는 살림을 배우다 좋은 배필을 만나
현모양처의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지숙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님의 집안 살림을 거들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스물 여섯
나이에 외교관이던 정태와 맞선을 보게 된 것이다.
양가 집안 어른들이 서로의 신상을 충분히 검증한 후 맞선을 주선하였기에 정태에 대해
별다르게 궁금한 점은 없었지만 맞선 날이 가까워질수록 지숙의 가슴은 쉴새없이 두근거렸다.

정태와 맞선을 보기로 한 일요일 아침. 지숙은 어머니의 부지런함에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머리를 감고 세면을 하고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소에 잘 하지도 않았던 화장까지
곱게 하였다. 지숙은 화장대 위에 놓인 정태의 사진을 보면서 립스틱을 바르고 정장을
차려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평소와 다른 또 유지숙이 거울 속에 서 있었다.

"아이고 우리 지숙이가 이렇게 꾸미고 나니까 딴사람이 됐네!"
"거울 속에 이쁜 처녀가 내 딸 지숙이 맞은 겨?"
"엄마는!"

오전 10시가 되자 지숙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정태와 맞선을 보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지숙의 심장은 뛰었다.
여러 남자들에게 핑크 빛 편지를 받아 본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스물 여섯이 되도록 정작
연애 한번 못해 본 자신이 한편으로는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단 한번이라도 남자를 사귀어 본적이 있었다면 오늘의 맞선자리가 이렇게까지 초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숙은 어머니의 한복 치마 자락에 몸을 숨긴 듯 다방 현관문을 들어섰다. 맞선 당사자인
정태는 보이지 않고 정태 부모님만 지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날이 많이 차졌지요?"
"안녕하세요. 어르신께서 더 일찍 나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지숙과 정태 부모님은 중매인이 양가를 오갈 때 상면을 했기 때문에 서먹함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정태 부모님을 처음 본 지숙은 온화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으며, 정태 아버님은 소문대로
매사가 분명한 것 같았다.

"정태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먼저 집을 나갔는데 이곳으로 오기로 했어요."

정태가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는 지숙의 표정을 읽었는지, 정태 아버지는 정태의 소식을
전하며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았다.

"아! 그래요. 그럼, 기다리지요. 어르신은 훌륭한 아드님을 두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잠시 서먹한 침묵이 부담스러운 듯 지숙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별 말씀을 요. 어르신께서 따님을 더 참하게 키우셨는데요."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는 정태 때문에 초조해 하던 정태 아버지가 지숙 아버지의 칭찬에
긴장이 조금 풀린 듯 표정이 밝아지며 맞장구를 쳤다.
부모님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맞선 당사자인 정태는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밝은 표정이던 정태 아버지는 정태가 걱정이 되는지 초조해 하며 다방 현관문을 연신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태는 약속한 시간을 넘기고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태 아버지는 안절부절못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카운터로 갔다.
전화 통화를 하던 정태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지숙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지숙은 애써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동안 전화기를 들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던 정태 아버지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큰일 났네요! 글쎄. 녀석이 오랜만에 본 고향친구들과 술을 한잔했나 봅니다."
"?!"
"억지로 권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자 친구들이 여관에 데려다 놓았답니다."

지숙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술을 마시다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정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괘씸한 생각에 지숙은 화가 치밀고 자존심이 상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어르신! 이왕 이렇게 나선 길이니 우리가 아드님이 있는 곳으로 가면 어떨까요?"
"아이고.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정태 아버님은 펄쩍 뛰었고 다른 사람들은 지숙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순간 지숙은 알 수 없는 오기가 발동하였다.
지숙은 아침부터 준비한 일들이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경우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정태에게
한마디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요. 어르신!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가 정태씨 있는 곳으로 가요."

지숙은 정태가 잠들어 있다는 여관을 가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중에서도 맞선을 보기로 한 남자가 맞선을 팽개치고 잠들어 있는 여관까지 찾아 간
여자는 세상천지에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까지 나왔다.
지숙의 자존심은 휴지처럼 구겨졌고 당장이라도 정태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다.
정태 부모님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정태의 친구가 알려준 여관을 들어섰고 지숙과 부모님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밖에서 기다렸다.

"참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구나. 허허 참!"

아버지는 믿어지지 않은 상황을 헛웃음으로 위로하고 있는데 여관방으로 들어갔던 정태
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정태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조심스럽게 방을 들어서자 정태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태 아버님의 말씀인즉, 짓 굿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정태가 폭탄주을 마셨다는
것이다. 지숙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가라앉히고 정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진과 실제 모습은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술에 취해 잠든 남자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정태에 대한 동정심이 꿈틀거렸고 술에 약한 정태에게 술을
먹인 친구들이 미웠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놈이 이렇게 변변치 못한 놈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지요."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염려한 정태 부모님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면서 지숙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 지숙은 정태가 부모님만큼은 잘 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숙과 정태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지숙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정태가 잠에서 깬 후에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 정태씨가 깨어나면 제가 다시 만나야겠어요."
"그래?"
"아이고 따님한테 미안해서 어쩌지요? 맘도 참 넓네요."

지숙의 단호한 결심에 양가 부모님은 안도를 하며 쾌히 승낙을 하였고 그날 오후 늦은
시간, 지숙은 정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미안한 표정으로 나타난 정태는 샤워를 하였는지 기분 좋은 비누 향이 지숙의
코끝을 스쳐갔다.

"초면에 큰 실례를 하였습니다. 박정태라고 합니다."
"............!"
"여관까지 다녀가셨다면서요?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네. 잘못을 알긴 아는군요! 화가 나서 도저히 그냥은 못 가겠더군요."
"용서하십시오. 모든 일이 저의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간단명료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정태에게서 지숙은 외교관다운
면모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정태는 핵심적인 질문과 명쾌한 답변 그리고 감초 같은 위트로 화가 나있던 지숙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우려했던 정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어느 겨울, 지숙은 정태를 하늘에서 내려준 인연으로 생각하고
화촉을 밝혔다. 그리고 20여 년을 함께 살았다.
정태는 지숙의 오기가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지숙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망각되어 버릴
남자였다.
지숙이 자존심이 구겨지는 부끄러운 마음까지 내 던지면서 까지 정태를 만나야겠다는
무모한 용기는 어디서 생겼을까?
그것은 평소 지숙에게서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당돌함이었으며 오기였음이 분명했다.
그 당돌함과 오기로 인해 둘은 심연에 흐르는 인연의 강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제2부 이별을 위한 외출]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