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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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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BY 아나스타샤 2001-10-06


어느때는 모든것이 뿌우연 안개속일 때가 있다.
애써서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을때는 뇌 속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부풀려서 각기의 저장하고 있는 기억으로 수천겹씩 나를 휘감아 괴롭혔었고,또 어느때는 안개속에 있는것이 느껴져 무언가를 떠올려 보려고 마음껏 집중하여 팔을 첨벙거려 보아도 헛손질만 일 뿐, 한자락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한자리에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지만, 너무 먼 길을 돌아 나왔다. 나의 기억은....

하나의 빗장이 풀어지자 서둘러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기억들이 우리가 앉은 부둣가의 적막속을 뚫고 튕겨져 나왔다.
모두 다....
나무에 새기는 유치한 맹세를 할 즈음에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철부지 였다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 철부지들이 너무나 먼길을 돌아 파도 벗하고 앉아 되새김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바보스러운 되새김질을.

"나 그동안 많은 곳을 헤메었다"
내 기억의 자락이 숱한 주름속의 나래를 헤메고 다니느라 진하의 말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응?"
아아... 그러느냐고 그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았다.
희끗한 윤곽이 정면으로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볼 살은 패어있고, 단아한 미간에 진하의 오년간의 원망이 새겨진것 같은 착각이 일순 들 정도로 눈빛이 시름에 잠겨있다.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어느곳에 머물던 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어느곳에서든 너의 존재만을 희망했어.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랬고, 그렇게 떠난 너의 알지 못하는 사정도 다 이해했다. 그러면서 이 땅의 많은곳을 밟았지"
"왜 대학에 가지 않았어?"
"별 의미가 없었어. 처음의 실패는 위경련이었지만, 그것은 그날 우연의 일치가 아닌 내 온몸을 먹어갔다. 그때의 나는 의지가 없었어."
"나는 진하 네가 곧 평탄해 질줄 알았어. 미안해...."
아무리 미안하다고 하여도 미안하다고 마음 먹는 만큼 정말 미안한 효과를 되돌려나 줄 것인가. 우리를 가로지른 세월만큼이나 미안하다는 말 역시 공허한 메아리였다.
"얼마전 그 소나무에 가 보았다"
"이제와서 무슨...."
잡은 손에 힘이 주어졌다. 진하가 화를 내고 있나보다.
그러나, 나는 냉정을 찾아야 한다.
지난 회억을 되짚다 설사 그 회억에 깊이 빠지는 잠깐의 착각에서 현실의 눈을 뜨게끔 냉정을 찾아주어야 하는것이 내 몫이었다.
"희미하지만 남아 있었어. 우리의 이름은 지워졌지만 하트는 있더라"
"진하야..."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줄은 모르지만 이제 잡은 손을 그만 놓아야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진하를 위할 수 없는 추억놀음에 나또한 빠져들까 겁이났다.
"모두 지난일이야, 나무에 새겨놓은 그날의 맹세처럼 영원한것은 없는거야"
"내가 그 나무를 보면서 너와 지키지 못한 약속에 마음이 아팠다"
"약속?"
우리는 구태여 약속을 정하지 않을정도로 두 몸을 가진 한 마음이었었는데 약속?
"우리 성인이 되면 같이 여행 가기로 했었잖아. 둘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그랬었지.
버석거리는 검불을 헤치며 카시오페아를 보던 그 밤에도 몇달이 지나 성인이 되면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었지.
그러나,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이 어찌 그것 뿐이겠어.
그 소나무를 정원에 옮기자는 약속부터 시작하여, 너와 나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아침을 열자는 약속까지 지키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이 지나왔어.
아니, 네가 아니라 나였지. 거친 숨소리로 차마 힘들다고 말하지도 못할만큼의 먼길을 재촉한 원인은 나였지.
네가 아니지.

"내일 가자...."
말없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여행이 아니라 내일 만나는 것 조차도 아니야, 진하야 이런건 아니야.....

"가자 현지야, 나의 약속이기도 해. 내가 오년간 숱한 산과 바다를 밟고 다니면서도 아껴둔 한 곳이 있어. 그 곳에 내일 가자. 아무생각도 하지말고"
"진하야, 싫다."
내 대답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진하는.
"내일 여행을 가고 그 다음일은 다음날 생각하자. 하루가 해결되면 또 하루의 결정만 하자. 그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지 않어?"

가고싶다, 나도....
혼자서 차표를 끊어 어디로 간다는 것은 이제 두렵다.
진하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고 싶다.
어느곳이든, 남들이 다 차지하고 남은 끄트머리 일지라도 혹여 운 좋으면 희망같은 쪼가리 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가려고 하지 마. 현지야, 너에게 다른 큰 바램은 없어. 정말이야"
"......"
더 이상 싫다고 말한다면 오늘이 지나 내게 밀려올 후회에 닥칠 자신이 없었다.
정말 가고싶었다.
이 즈음에선 한번쯤은 바람에 몸을 실어야 했다.
지친 육신은 진하라는 돌파구를 영악하게도 부여잡아 말문을 막히게 했다.

"푹 쉬어.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올께. 아무것도 준비 할것은 없어. 간단히 입은 옷 만으로 가보자."

토닥거려주는 진하의 손의 여운이 작은 골방에 누운 내 온몸에 전해져,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일찍 오는 부둣가의 내 창문으로 부우연 태양이 물들자 벌떡 일어났다.
그래, 가자.
오늘은 가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자.
나는 결코 진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일의 어떠한 결정이 기다릴지라도 오년의 세월을 잊은채 행복에 취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