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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아직 정운의 곁에서 떠나질 못하게 되었다.
박람회 준비로 바쁘게 뛰어 다니는 그와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얘기할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결국 바쁜 회사 일로 그녀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 스튜디오 일이 덜 끝난 소희 한테서 시현이 아주 흡족해 하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와도 끝이었다. 다시는 그를 보게 되는 일도, 이렇게 마음아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운의 바쁜 일정이 좀 안정되면 회사는 그만둘 생각이었다.
더 이상 일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수가 없었고 어정쩡한 관계로 정운을 대하는것도 어려웠다.
오늘은 그에게 반지를 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을 때 정운과 소희가 동시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오늘 김 시현씨가 집들이에 우리 회사 식구들 모두를 초대 했거든요. 저녁에 약속있는 사람 미리미리 취소 해주세요 ]
소희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정운이 언뜻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지만 모른척 했다.
[ 난 좀 바쁜데... 에이, 잠깐만 들러도 괜찮겠지? 오랜만에 회식이 되겠네 ]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이런게 필요하겠냐는 둥 의견이 많았지만 그래도 집들이 필수 선물인 휴지, 세제 등을 가지고 그의 집에 들어섰다.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고 곧이어 그녀에 대한 찬사가 쑥쓰럽게 만들었다.
정운이 대표격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출장요리사를 불렀는지 우아하게 셋팅된 뷔페식 상차림 앞에서 그의 입주를 축하하는 건배를 하고 여기 저기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적인 농담들이 흘러 나왔다.
그는 오늘 아주 기분이 최고인 듯 했다.
들어설때부터 연신 웃어대고 있으니.
집들이에는 스튜디오를 여는 그의 친구외엔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아마 오늘은 우리 팀만을 위해 준비 한 듯 싶었다.
소희는 그 사람과 진지한 듯 보이면서도 가끔씩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얘기중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그녀는 점점 우울한 분위기가 되어 와인잔만 비워대고 있었다.
[ 그렇게 마시다 또 잠들면 어쩌려구 ]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그가 웃으며 그녀가 앉아 있는 쇼파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 고마워, 이런집을 갖게 해줘서... 많이 힘들었지? ]
[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요 뭘... 짐정리는 다 된거예요? ]
[ 글쎄 좀 도와준대도 짐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네요 ]
어느새 다가왔는지 소희가 한마디 거들었다.
[ 침실안에 그 박스 아직도 정리 안했죠? 흉하니까 빨리 정리하래두 ]
그녀의 재잘거림을 바라보며 웃음짓는 시현의 친구 모습에서 뭔가 상큼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사랑에 빠진 소년같은 해맑은 미소에 그 행복감이 그녀에게 전염된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게 했다.
그들이 떠나자 시현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 뭔가 있는거 같네요... 저 두사람 ]
[ 그런거야? ... 어쩐지 요즘 저녀석이 실실 쪼개고 다니더라니까. 거기다 소희씨 말엔 꼼짝도 못하고 ...다른 사람일엔 참 눈치가 빠르군 ]
그의 뒷말에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또 웃는다.
[ ...저기 ...이따가 ]
그때 정운이 다가와 바빠서 그만 가야겠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
사장이 일어나서 인지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그녀도 함께 합류하려 하자 그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소리 쳤다.
[ 저는 이 진이씨한테 인사할게 좀 남았는데 괜찮겠죠? ]
그녀의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에 의미 있는 웃음을 보이며 정운과 동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예요? ... 그냥 사람들 앞에서 고맙다고 하면 끝날걸 가지고 일부러 남게 하다니...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
[ 진이야! ... 다시 시작하자... 우리 ]
정신이 아득해지려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긴 하는데 무슨뜻인지 알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가 다가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