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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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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아이들의 짐을 정리하여 집으로 옮기기 위해 미순의 집을 찿은 봉순은, 작은 책상 서랍 속에서 낡은 앨범을 꺼내 들었다. 자신들의 초등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보고싶은 얼굴들을 찿아 보려니 책갈피 속에 끼워둔 몇 장의 편지가 보였다. 미순이가 남편에게 써둔 글들이었다. 봉순은 망설이다가 편지의 첫장을 펼쳐들었다. 정갈한 글씨채로 또박 또박 적힌 글들위로 눈물이 번져 슬퍼 보이는 편지. . .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고 몸이 고단할 땐 당신께 기대리라 생각하면서 행복했는데. . .나의
든든한 울타리라 믿었던 당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날 울리고 있군요.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서 난 그저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 했었죠. 당신이 끝까지 나를 지켜줄 사람이라 믿었으니까요.

우리의 사랑으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아빠기 되기 위해 우린 더욱
더 사랑하게 되리라 믿었어요.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보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분명 올바르
게 자라나고 행복해 지리라 생각했기에 신앙처럼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당신을 향한 믿음이
있었을 땐 전 늘 행복했지요. 그 어떤 이유도 나의 행복을 뺏지는 못했지요. 든든한 나의 울
타리, 언제나 나의 편이 되줄 당신이 있었기에. .

그러나 투명했던 당신에게 비밀이 생기면서부터 당신이 옆자리에 누워 있어도 전 늘 혼자
라는 느낌을 이겨낼 수가 없었죠. 부부간의 믿음은 거울과 같아서 한 번 깨지자 깨진 조각
들을 아무리 맞춰봐도 어긋나기만 할 뿐, 예전처럼 되지가 않더군요. 온실처럼 포근했던 나
의 보금자리가 갑자기 지옥처럼 느껴지고, 당신과 아이들만 바라봐 오던 나의 시간들이 갑
자기 죽음처럼 공허함으로 내게 남았죠.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점점 많아져도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나눠 쓸 때보다 행복하진 않았어
요.

당신이 이미 벌어진 상황들을 애써 변명하고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은 차라리 내겐 고문이었
어요. 차라리 정직하게 고백하고 나의 이해를 바랬다면 나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며 모든 책임을 내게로 돌리는 비겁함을 보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나를 구박하는 당신을 보는 것이 차라리 낳았다고 생각하지만 모두 다 내
게는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어요. 나도 내 아픔을 위로해주고 감싸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날
위로해줄 단 한 명의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는데 당신은 삐뚤어진 당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만 급급해서 더욱 삐뚤어지기만 했어요.  위로 받지 못했다는 것 보다는 그 모습을 지켜
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은 아마 모를거예요.

그래도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리라 생각했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는데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어요. 허지만 최소한 아이들에게 엄마는 내 가정과 사랑을 지키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잘 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엄마와 아빠,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진
심으로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들 역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이해 하게 되었죠. 그
래서 이젠 당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부모가 늘 서로를 미워하며 사는 모습을
보며 자라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혼을 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는 말을 듣는 편이 오히려
좋은 환경이 되줄 거예요. 정상적으로 사랑하며 책임지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참다운 가
정생활을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을 위해서 내 사랑은 버려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당신은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아마도 당신이 나의 짝이 되리란
걸 알았던가 봐요. 그 때 당신은 진실한 사랑을 내게 줄 사람처럼 보였어요. 가정이라는 꿈
나무를 당신과 함께 가꿔 나가면 내가 늙어 허리가 구부러져도, 이가 다 빠져서 틀니를 해
도 커다랗게 자라난 그 꿈나무 그늘 밑에서 나의 등을 토닥거리며 내게 행복한 미소를 보여
줄거라 생각했는데. . . 나도 이빨이 다 빠져서 틀니를 하고 허리가 구부정해져 걸음도 제대
로 못 걷는 당신을 언제나 사랑해 줄 수 있었는데. . .
어쨌든 미안해요. 아이들에게 당신의 좋은 모습 남았을 때 당신 곁에서 떠나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만큼만 당신을 사랑해서요.  정말 미안해요.

언제 써두었던 것일까. . .

봉순은 남편의 장례를 자신에게 부탁하던 미순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원복을 입은 초췌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면서  미순은 남편과 우희를 함께 묻어주
라고 했던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그럴 수 없다고 수없이 말렸지만 미순은 요지부동이었었다. 혼자
서는 외로울 꺼라고. . .우희라는 여자도 알고 보면 불쌍한 여자라면서. . .저승에 가서는 둘
다 진실된 사랑을 하면서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결국, 미순의 바램대로 둘은 함께 묻혔지만  장례를 잘 치뤘다는 말을 전해 듣던 미순은 
아무말도 못한채 주루룩 뺨으로 눈물을 떨구어 냈었다. 그런 미순의 모습에서 봉순은 자신
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여자와 묻어 줄 만큼 깊은 사랑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너무나 아
파야하는 고통속에 서 있는 미순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 .그런데. . . 오늘 또 이 편지를 읽으면서, 봉순은 또 다시 미순의 깊은 사랑과 처
절한 사랑의 메아리를 가슴으로 다시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