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버스가 흔들거리며 달리고 있고, 사람들 틈에 끼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지쳐 있는 봉순인, 멀치감치 매달린 손잡이를 손가락 두개로 간신히 잡고 매달려, 공중에 떠있듯 사람들 틈에 꼭 껴 있었다. 손잡이 쪽으로 다가서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써 보지만 겨우 까치발로 서있는 것도 힘에 겨운지라 , 빽빽하게 사람들이 꽉 차 있는 버스 안에서 봉순인 기진맥진 할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끼익- 차가 섰고 학생들이 우르르 쏱아져 내린다.
휴 우~
차속으로 비집고 밀어대며 꾸겨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봉순 인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옛날 학교 때의 너무 눌리다 못해 자신이 쥐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했던 빽빽
한 그 버스 안으로 다시 돌아 간 듯한 느낌에 혼자 웃는다. "참, 오랫만이군 이 느낌. . ."
마침 빈자리가 나서 봉순 인 핸드백을 무릎위로 놓고 치마를 한 손으로 쓸며 자리에 걸터앉
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가로수들이 붉고 노랗게 예쁘게 물들었다 특히 노란 은행나무
들은 더욱 예뻤다. 학교 다닐 적엔 미순이와 함께 남산으로 올라가 바닥에 노랗게 깔린 저
은행잎 위를 맨 발로 사뿐 거리며 걷기도 했었는데. . . .
정류장 앞에서 내려선 봉순이는 노란 은행잎을 굽이 높은 힐로 밟으며 길옆의 빌딩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베이지 색 원피스에 밤색 스카프를 두르고, 작고 앙증맞은 검은 핸드백을 어
깨에 걸친 채 단발의 머리가 상큼한 봉순의 모습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탓일까?
40의 나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젊었다. "안녕하세요? " 경비 아저씨께 반가운 인사를 하
자 "오늘도 일찍 나오셨군요. 그런데 오늘은 차를 안 가지고 오셨나요?" "네. 지금 정비소에
서 정비중이예요." 미소로 답하고 봉순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을 열쇠로 열고 사무실 문을 연 봉순은 문 옆에 스위치를
올린다. 불이 켜지자 자신의 책상으로 가 서랍을 열고 핸드백을 넣은 뒤 사무실 안을 돌아
보았다. 늘 이곳은 따듯하고 포근했다. 자신이 사는 것을 늘 확인시켜 주는 이곳, 봉순은 여
기가 좋았다. 창가에 새어드는 햇볕을 받기 위해 브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연 뒤, 들국화에
물을 주고 난 봉순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오늘의 일정표를 체크 한다. 그때, 어제 목포로
출장을 떠났던 김 대리가 문을 열었고, 연이어 동료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제일 먼저 출근 하셨네요 사장님!"
"김 대리님은 어제 출장 다녀오시느라 꺼칠해 보여요. 수고하셨죠?"
"김 대리 꺼칠한 것이 어제 오늘 일 입니까 요즘 신혼이라 늘 꺼칠 하드만, 어제는 신부하
고 떨어져서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구만"
박 과장이 한마디 거들자 김 대리가 쑥스러운 듯
"에이~ 과장님 왜 그러십니까? 다 아시면서 "
"알긴 뭘 알아 이 사람아!"
싱겁게 웃는 김 대리를 향해 각자 한마디씩 농담을 던진다.
'" 그나저나 오늘 커피 서비스는 ?" 김대리가 묻자
"이 대리님 수고 좀 하시죠?"
미스 홍이 자리에 앉아 책상 서랍을 열며 이 대리를 향해 활짝 웃는다.
"그러지요."
웃으며 이 대리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기 위해 미스 홍이 내미는 조그마한 소쿠리에서 동
전을 집어들었고, 잠시후 각자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향이좋은 커피 한잔씩이 놓
여졌다. 돌아가면서 직원들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커피를 뽑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그마한 회의 탁자에 둘러앉은 직원들이 봉순 을 향해 시선을 모았고, 봉순은 직원들 각자
의 스케줄을 확인하며 오늘의 일정을 체크한다.
"이 대리님. 오늘 호주 행 비행기로 떠나시는 손님 분들 일정에 착오 없으시겠죠?"
"예, 스물 두분 비행기표 예약 끝났고 호텔도 예약 끝났습니다. 현지 안내원과는 호주 공항
에서 만나기로 했구요."
"손님들을 모시는데는 손님입장에서 항상 생각하시고, 다른 문제들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셔
야 겠지만, 특히 식사 문제는 신경을 쓰셔야 할겁니다. 각 나라 고유의 문화는 먹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니, 각 나라 고유의 음식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배려하는 동시에, 우리나
라 음식문화에 길들여 있는 손님들의 입맛에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하시구요."
봉순은 자신의 수첩에 메모되어 있는 글들을 되 집듯 다시 읽어보며 빨간 볼펜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하나 하나 체크해 나갔다.
"참, 손님들 중에 이번엔 고령의 노인 두 분이 있으시던데, 현지 안내원에게 각별히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 좀 해주세요. 그리고, 일본하고 동남아시아 쪽 손님 분들도 별 문제 없으시
죠?"
"예!"
"박과장님, 다음 패키지 기획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요?"
"예. 곧 다가올 겨울 방학을 대비해서 각 나라별 배낭여행을 주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코스
는 작년과 같은 곳입니다만 숙식문제가 좋지 않았던 곳은 다른 장소로 바꾸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집은 어떤 식으로 합니까?"
"신문과 각종 여성 잡지, 그리고 각 대학 동아리별 안내문 발송을 하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저렴한 비행으로 여행 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각 나라와 협의를 잘 해 보세요.
그리고 민간인이 운영하는 민박집도 알아 보시구요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학
생들이 많이 이용 할 테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사장님, 다음주 떠나실 손님들 여권 서류 다 되었는데요."
"고마워요, 자! 모두들 오늘 하루도 수고 하시구요. 이따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십시오.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모두들 구호를 외치고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봉순 은 미스 홍
이 정리해 놓은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따르릉"
"감사합니다. 신나는 여행사입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장님, 댁에서 1번 전환데요."
봉순 이 전화수화기를 집어든다.
"여보세요."
"엄마? "
"40이나 된 사람이 직원 들 앞에서 그렇게 불러도 돼냐?"
"엄마두 참, 오십엔 엄마라고 하면 누가 때린데요?"
"그래두~, 너, 오늘 집에 좀 들러라."
"오늘 큰 올케 생일 이라서요?"
"알고 있었네? 하긴 네가 잊을 리가 없지."
"그럼요, 우리 엄마 지극 정성으로 봉양해 주는 올케 생일인데 잊을 리가 있어요. 그렇잖아
도 퇴근하고 가려고 했어요. 근데 엄마, 올케 혹시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 뭔지 알고 계세
요?"
"글세, 올케야 너 시집간다고 하면 제일 큰 선물 일 거다 아마,"
"엄~마!, 자꾸 그러면 나 안가는 수가 있어요."
"알았다. 이따 보자꾸나."
"네. 이따 뵈요"
수화기를 놓고 봉순 인 올케 얼굴을 떠올린다.
수더분하니 말수가 적고 불평이 없이 늘 큰 동생을 따라주는 고마운 이,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속이 깊어 어쩐지 기대고 의논이라도 하면 받아 줄 것 같은 넉넉한 이. . 동생의
옆에 그 사람이 있음을 봉순은 늘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 셋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그 가정 속에서 행복해하는 식구들과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은, 봉순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가
슴 든든한 의지처가 됐다. 봉순과는 나이 차가 많아서 절대로 자신과는 대화가 될지 않을것
같았던 동생들이, 이제는 자신과 의논 상대도 되줄만큼 든든한 버팀목으로 커 있음을 대견
해 하며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아직도 결혼을 안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그들 앞에 당
당하게 살아보이려, 아픈마음을 감추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