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은 방문을 열었다.
겨우내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방안으로 한꺼번에 봄기운이 밀려들었다. 춘향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춘향은 면경을 열어 머리를 만졌다. 볼그스레 복숭아 빛이 돌던 얼굴엔 핏기가 없이 하얗기만 했고, 눈도 쾡해진듯 했고, 숱이 많고 풍성했던 머리에 윤기도 없었다. 춘향은 머리를 빗고 쪽을 지려다 비녀를 보고는 울컥 설음이 쏟아졌다.
비녀를 잡은 손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렇게 힘들게 보낸 열여섯의 겨울이였다. 춘향은 마음 다져먹은듯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입을 앙다물고 쪽을 지었다.
그리고 향단을 불렀다. 춘향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향단이 몸단장을 한 춘향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이자 다 나아셨소잉"
"내가 언자는 아펐냐? 그냥 힘이 쪼까 없었던 것이제. 이제 괜찮은께 퍼득 이불이나 개키더라고. 나는 엄니 방에나 가봐야 쓰것다."
향단은 춘향의 달라진 모습에 절로 흥이 났다. 춘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걸레를 빨아다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춘향은 중문을 지나 월매가 있는 안채로 들어섰다.
이제 막 돗아나기 시작한 개복숭아가지의 샛눈들이 어여뻣다.
춘향은 한숨을 흘렸다.
작년 이몽룡이 춘향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때 개복숭아의 빨간꽃이 한창 마당뜰을 장식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 어색했던 이몽룡이 춘향에게 멋없이 던진 말이 떠올랐다.
"저 자그마하고 빨갛게 피어있는 꽃이름이 뭐냐?"
"개복숭아꽃이고만요."
"빨간 것이 보기 좋다. 그런데 니 입술 색깔이 더 곱다."
그 한마디에 춘향은 수줍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몽룡에 대한 사랑의 물고를 터트렸다.
참으로 설레는 봄의 끝자락과 여름, 가을을 보냈다.
춘향은 개복숭아의 샛눈을 만지면서 이몽룡과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춘향의 희디흰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이몽룡이 떠나기 전날 밤이 악몽처럼 다시 춘향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슬금슬금 땅이 얼어가기 시작할 무렵 춘향은 고을 사또의 한양이관소문을 들었다.
춘향은 조금씩 설레이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벗어나보지 못했던 남원을 떠날수 있다는 설레임과 말로만 듣던 한양에서 살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린 춘향을 달뜨게 했다.
춘향은 괜시레 부산해졌다. 장농을 뒤져서 이옷 저옷 입어보고는 옷정리를 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한양으로 떠날 사람처럼 보따리를 챙겨놓는가 하면,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을 한지에 고이 싸놓기도 하며, 설빔을 받아놓고 설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라했다. 괜시래 향단이까지 좋아라 춘향을 따라 부산을 떨었다.
그런 춘향을 보며 월매는 아무말 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소문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젠 고을 전체가 사또 이관준비로 부산스러워 졌다. 춘향은 잠도 자지 못하고 설레였다.
잠자리에서도 전에 없이 애교도 부리고 살갑게 굴었다.
"서방님은 한양에 왔응께 한양으로 가는것이 지처럼 좋지는 않은갑소?"
이몽룡은 팔베게를 해주었던 손을 빼고 돌아누웠다.
"왜그런다요? 팔 절린갑소?"
이몽룡은 말이 없었다.
"걱정 마시쇼. 지도 서방님 집에 들어갈 욕심은 없응께. 그냥 서방님댁 가까이에 집하나 얻어서 살면 안쓰것소?"
이몽룡은 춘향을 향해 돌아 누웠다.
"춘향아! 나 내일 한양간다."
"아적 사또나리 이관 날짜는 몇일 남은걸로 알고 있는디...?"
"어머님과 식솔들은 언제 떠나기로 하였다."
춘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산스레 옷을 찾았다
"왜 고것이 이제서야 말해 준다요? 지도 떠날 차비 차릴라면 시간이 필요한디.... 몇시에 떠난나요? 서둘러야 것소."
이몽룡을 서둘러 옷을 입는 춘향의 팔을 잡았다
"춘향아! 너는 낼 못가."
"머라고 하셨소 시방?"
춘향은 잠시 멍한 얼굴로 이몽룡을 바라보다가는 이내
"그럼 지는 사또어른 행차할실때 그때 가야하는 갑소?"
이몽룡은 도릿짓을 했다
"아니 아니 넌 한양에 안가 못가!"
"무슨 말씀이다요 고것이."
"널 데려갈 수 없어."
"그라면 서방님도 안가신다요?"
"난 내일 어머님과 함께 떠난다지 않는냐?"
"그라면 절 데릴러 언제 다시 오신다요? 달포면 오시것소?"
이도령은 고갯짓을 했다
"한달이면 돌아오신다요?"
춘향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이몽룡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떨구었다.
"그라면 반년이면 오시것소? 그라면 그라면 일년 지나 오시것소?"
춘향의 목소리는 거의 절규로 변했다.
"그라면 나랑 버리고 간신단 말씀이시요 시방"
"언제라고 장담은 못한다만 내가 꼭 다시 오마."
이몽룡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다 소용없소! 난 갈것이요. 서방님이 안 데꼬가면 지혼자서라도 갈것이란 말이요."
"춘향아 왜이리 어린처럼 이러느냐?"
"내가 어린애지 그럼 어른이다요? 나는 가고 말것인께 그리 알랑게요."
춘향은 거의 이성을 잃은듯 때를 ?㎢? 이몽룡은 안타까운듯 춘향을 가슴에 안았다
"춘향아! 나도 니가 첫정인데 너를 두고 가는 내맘이야 오죽하겠는냐? 그러나 데려갈 수 없는걸 어쩌겠는냐? 니가 좀만 참고 기다리거라?"
춘향은 매몰차게 이몽룡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리고 원망섞인듯 이몽룡을 쏘아보았다.
"거짓말 마시쇼. 내가 시방 그말을 믿을거 같소? 이제 두고 가만 그만이랑께요. 울엄니만 봐도 알것소. 아직도 저녁밥 먹고나도 따뜻한 밥 한주발씩 이불밑에 넣두지만 여짓껏 아버지라고 얼굴한번 본적 없소. 내일 서방님 못 ?아가면 다시는 못본단걸 내가 모르줄안당가요?"
이몽룡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었다.
춘향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이게 머요? 나랑 첫날밤 치룰때 머라 그려셨소? 사또어른께 말씀드려서 곧 혼례치른다고 하지않았소?. 고약조가 벌써 반년이 넘었소. 그래도 서방님인께 여지껏 믿고 기다렸는디 이제 나랑 버리고 갔것다 그말이요 시방?"
춘향은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나는 기생아니요. 그렁께 갈려거든 날 데리고 가든가 아님면 죽이고 가시쇼. 절대 이대로 난 서방님 못 보낸께..."
"그럼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사또어른께 지랑 가겄다고 아뢰면 쓸것 아니요?"
이몽룡은 탄식같은 한숨을 흘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혼인도 치루지 않은 내가 어찌 첩부터 둔단 말이냐?"
춘향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머라고 하셨소 시방? 첩이라고 하셨소? 나가 첩이다요?"
"그럼 내 정실부인이라도 되겠단 말이냐?"
춘향은 넉이 나간 사람처럼 이몽룡을 바라다 보았다.
"신분이란건 모르는 사람처럼 어찌 이러느냐? 아직도 넌 니 위치를 몰라서 하는 소리냐?"
"첫날밤엔 그리 말 안하셨당께요. 지를 부인삼는 다고 안 하셨소?"
"왜 이리 바보 같이 구는냐? 그건 내가 널 부인처럼 생각하고 아껴주겠다는 말이지...."
"그랑께 서방님 야그는 나가 천기의 딸인께 잠시 데리고 놀다 버리고 가면 그만이다 그야그당가요?"
이몽룡은 입을 다물었다.
"참말 그야그당가요?"
춘향이 확인하듯 물었다.
"내 다시 온다지 않는냐?"
"다 필요없소. 나 데꾸 한양가지 않으면 나가 가만 있을거 같소?. 한양이 아니라 평양까지라도 쫓아가서 아니 거그까지 갈것도 없소 낼 당장 사또 어른께 달려가서 여름가을내 글공부는 안하고 계집질만 일삼고 다닌 위인이 거그라고 다 야그 할라요?"
춘향의 얼굴에 순간 불이 번쩍 튄건 그때였다.
"방자한 계집같으니라고. 니가 감히 지금 감히 날 협박하는게야?"
춘향은 하도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이몽룡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 볼뿐이였다.
이몽령은 서둘러 옷을 챙겨입었다.
"얼굴 반반하여 귀여워 해 주었더니 감히 니가 어느 안전이라고.."
이몽룡의 얼굴은 금세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변하더니 그대로 방문을 차고 나가버렸다.
춘향은 한동안 울지도 못한채 이몽룡에게 맞은 빰에 손만 댄채로 앉아있었다.
그렇게 헤어진것이 이몽룡과의 마지막이였다.
그다음날 한양으로 떠나면서 자꾸 춘향의 집쪽을 돌아보더라고 방자에게 전해들을뿐이였다.
물론 춘향 또한 이몽룡이 떠나는날과 사또행렬이 한양으로 떠나는날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며 울는것을 월매와 향단이 겨우 말려서 진정시켰다.
그렇게 몇날몇일을 춘향은 월매와 향단과 싸움을 해대다가는 그래도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버린게 지난 겨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