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햇살은 제법 따갑다. 산과 들은 제법 녹음이 욱어지고
들판의 보리밭에 보리는 허리춤까지 자라, 이삭들이 패이기
시작하고 있다. 받두렁에 매어놓은 소가 길게 하품을 하고 있다.
계절적으로 농부들이 그리 바쁘지 않은 철이다.
가끔 벼 묘판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잡풀을 뽑아내는 농부만
몇명 보일뿐, 참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사람은 흙에서 태여나 흙과 더불어 살다가 흙속으로 돌아가는것이
자연의 이치 인데, 사람이 살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간에
흙을 떠나서 회색의 도심속에서 개딱지 마냥 붙어서
각박하게 살아가야 할때도 있으니, 인간의 본성인 착하고
어진 마음은 어데로가고, 서로 미워하고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인생이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이 평화로운 농촌에도 해마다 이만 때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보릿 고개다. 대부분의 농가들은 이때쯤이면
양식이 떨어진다. 왼만한 부자집이 아니면 양식이
남아 있는집이 거의 없다. 들에나가 나물 뜯어다가 쌀 조금넣고
죽을 쒀 먹는 집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없는집은 끼니를
건너 뛰는 것도 보통이다. 그래도 집집마다 자식들은 너댓명씩
딸려 있으니 이 보리고개를 넘는 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보리를 타작 할때 까지는 다들 배?樗?춘궁기를 넘어야한다.
괴산댁내도 마찬가지다. 농사지은 곡식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겨우내 파 먹었으니 양식이 남어 있을리 없다.
더군다나 지난 겨울에 큰아이 계집에가 아파서
쌀말이나 팔아서 약값으로 충당했기에 양식은 더욱
부족하게 되었다. 덕배가 자주 드나 들면서 보았으니
그 형편을 모를리 없다. 이제는 괴산댁과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가까워 ??으니, 그 사정이야 더 잘알고 있다.
덕배의 마음속에는 이미 괴산댁이 자리잡고 있었다.
덕배는 안채로 들어가 주인 박영감을 만났다.
" 영감님 어려우시지만 저의 세경( 머슴이 일년동안 일해주고 받는 폼??
대부분 머슴 등급에 따라 쌀로 주는데, 상 머슴은 일년에 쌀
10가마 정도 준다)
주시는 양에서 우선 쌀 댓말만 주셔유~~"
" 쌀은 뭐 하게? "
원체 부잣집이라 항상 쌀이야 여유가 있지마는, 의외라는듯
덕배에게 묻는다.
덕배는 등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적 거리드니,
" 저건너 괴산댁내 좀 갔다 줄려구유
그집 양식이 떨어 졌구먼유~"
" 괴산댁 양식 떨어 진거하고 네놈하고는 무슨 상관인디?"
박영감도 귀먹어리 아닌 이상에야 그동안 소문을 들어서
덕배놈이 괴산댁을 좋와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괴산댁하고 잘만 되면, 그집 삼년상 치루고 난후에
둘을 붙여줘야 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덕배가 지금까지
데리고 있던 어떤 머슴놈 보다도 착하고 일도 잘해주니
여러해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시침이 딱 떼고 물어본 것이다.
"지는 괴산댁을 좋와하고 있구만유,그여자도 지를 좋와 하는것
같어유, 그집 삼년상 치루면 합칠까 하는디유~"
덕배는 마음에 있는 말을 박영감에게 다 해버렸다.
"네놈은 총각이고 그여자는 애가 둘이나 딸린 과분디
니가 손해아녀?~~"
" 손해구 말구 어디 있어유, 지는 뭐 가진거 있나유, 달랑
몸뚱아리 하나 뿐인 걸유, 같이 열심히 살고 싶구먼유"
어떻든 박영감은 덕배가 맘에들어, 선뜻 쌀 닷말을
내주었다, 거기에다 보리쌀 두말을 자기가 공짜로 보태준다며
인심까지 쓴다. 덕배는 고맙다는 말을 박영감에게 수도 없이
하고는 괴산댁으로 향하였다.
마침 괴산댁은 마당에서 빨래줄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덕배가 무었인가 한짐을 지고 올라 오는것을 보고
궁굼하게 생각하며 처다보고 있다.
덕배는 괴산댁 마당 안으로 들어 오더니 지게를 받처 놓고는
빙긋이 웃으면서....
"아줌니 양식 떨어 졌지유? 지가 쌀 댓말하고 보리쌀 좀
가저 왔구먼유"
덕배는 괴산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쌀자루와 보리쌀자루를
마루위에 올려 놓는다.
양식이 떨어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쌀말이라도 들어 왔으니
반가운거야 사실이지만, 염치도 없고,동내 여편내들이
자기내 집으로 들어오는 덕배를 보았으니 또 얼마나
입방아를 찌어댈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자식들하고 안 굶고 살려면
체면이고 입방아고 가릴때가 아니었다.
"뭐~ 이런걸 다 가지고 오셔유,지만 어려운가유 다들 어려운디...
염치가 없구먼유, 가저 오신거니까 받기는 받는데유
가을에 갚어 드릴깨유,..."
괴산댁은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때 맞추어 양식을
가저온 덕배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속에도 이미 그사람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지가 이것을 가을에 도루 받을거면 아예 안가저 오지유,
염려 하시지 말구, 아이들 하고 잘 끓여 잡수셔유~"
덕배는 마루에 걸터않아 담배를 한모금 들이 키더니
연기를 길게 내 뿜는다.
"여러번 오셨어두 밥 한끼 대접 못했는디, 오늘은 점심을
잡숫고 가셔유"
"아이구 괜찮어유, 건너가면 밥은 얼마든지 있구먼유"
"그러나 그냥 가시면 지가 서운하지유, 잠시만 기다리셔유
따뜻한 점심 해서 올릴께유"
괴산댁은 죽은 서방이 온것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생긋이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마치 마누라한테 점심을
받어 먹는것 처럼 덕배는 마음이 흐뭇하다.
한참후에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나왔다, 보리가 약간 섞인
큰 밥사발에 된장찌게와 몇가지의 반찬이 올려저 있다.
마루위에 밥상을 내려놓고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사발을 떠다 놓는다.
"찬은 별로 없지만 많이 잡수셔유"
"별 말씀을유~ 지가 괜히 패를 끼치는 것 같구먼유, 잘 먹겠시유"
덕배는 참으로 오랫만에 여인의 따뜻한 정이 들어있는
밥상을 받은 것이다, 오늘 부터라도 이 여인과 같이 살았으면
하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솟구처 오르는 것을 느낀다.
밥 한사발을 갯바람에 게눈 감추듯 뚝닥 해치우고는
물 한사발을 들이 키더니 일어선다."
"참 잘 먹었시유,지는 이제 그만 가 보겠시유"
덕배는 이말을 하고는 잠시 머뭇머뭇 하더니, 말하기가 좀
어렵다는 표정으로 겨우 다시 말을 꺼낸다.
"저~~~ 저녁 잡숫고 시간좀 있남유?
여기는 사람들 눈이 많아서 그런디유, 꼭~ 조용히 말씀드릴게
있는디유~~~" 다시 잠시 말을 멈추고는,
"요 위에 산등성이 김서방내 보리밭 옆에서 오늘밤에 만날수 있을까유?"
덕배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는듯 가벼운 한숨을
내 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인의 얼굴 표정을 살핀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남정내의 말에 여인은 어찌할바를
모르는 표정이다. 그러나 시집와서 나이 삼십이 넘어
이것저것 다 겪은 여자가 그뜻을 모를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런 처지에 못나간다고 거절할수도 없는 입장이다.
"예~~~ 그러지유"
"그러면 지가 와 있다는 신호로 뻐꾸기 소리를 세번
낼테니까 그때 올라 오셔유~"
덕배는 이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쑥스럽다는 듯이
지게를 지고 황급하게 건너가 버렸다.
( 5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