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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유수진 2001-02-15

'썩~
처얼썩~'

아득히, 밤바다가 사납게 밀어내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맛있게 피운다. 야..."

인희는 '피식'웃으며, 폐부 깊숙히 담배연기를 들이 마셨다.

보람의 눈에,
강파른 인희의 얼굴이 유유한 새벽 공기와 어우러져, 민낯에도 불구하고, 꽤 지적으로 보였다.

"마마보이 였다면서...
그게 이혼 사유가 되니?"

인희는 약한 술을 두어병 비워 낸데다, 담배연기까지 마셔 댔더니, 온통 뱅글 뱅글 도는게, 말까지 거침 없이 나왔다.

"하하하하하...
해리가 정보통이었겠구나!"

인희가 고개를 과장되게 한번 까딱 거렸다.

보람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담배를 한개비 스윽 뺐다가 도로 집어 넣는다.

인희는 라이타 불을 켰다.

"아니~
니가 하도 맛나게 빨아 대길래...
끊었다. 야.
'역시~ 이혼녀니까 담배 피우는 구나' 생각하는 인간들 때문에...
그리구, 우리 미림이 고년도 한몫 했고..."

"이혼녀 되면, 그렇게 난삽해 지는거니?"

"정신 바짝 차려야지!
수 틀리믄 탕녀로 인생 태질처지는거 종이 한장 차이고,
얼바람둥이 유부남, 어중이 떠중이 달겨들어도,
'이혼녀니까 개골낸다'는 소리 안들으려면, 언죽 번죽 말받아 장사해 먹어야 되고....

굳셈과 부드러움으로 중무장하고,
가재미눈 여편네들 광어회 상추쌈, 볼 터지도록 집어 넣어주며 옴살 거리고,
이혼 노래 부르는 거 카운셀러 해 줘가며, 그래도 남편 울타리가 행복이라는 안도 엥기면서...."

인희는 녹록한 보람의 모습 위로, 학창시절 걸쭉한 입담의 그녀가 겹쳐졌다.

수학시간에 'WE ARE THE WOULD' 팝송 가사를 연습장에 배껴서 외우다가, 선생님께 들통나 엉덩이에 몽둥이 찜질을 당했던 그녀, 장보람.

어렴풋 하지만, 대학도 안가는데 엑스트라도 아니고, 하고 싶은거 하게 해 줄 수 없냐고, 이렇게라도 안하면 책상에 고꾸라질거 같다고, 했던거 같다.

"풋-
장보고!
잘났다. 야...
어디 무서워서 이혼 하겠니!

나도, 그 가재미눈 여편네들 중 하나구나.
상추쌈 싸줘. 아~~"

보람은 어금니의 금니 4개가 다 보일 정도로 웃으며, 광어회 한뭉텅이와 토실 토실한 마늘 두어쪽을 고추장에 푹 찍어 인희의 입속에 꾸역 꾸역 집어 넣었다.

"하도 많이 씨부려 대서 아주 외운다. 외워!"

인희는 보람의 거센 입담이 싫지 않았다.
아니, 삼척에 펼쳐진 장대한 수평선을 마주한것 처럼 시원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이혼 한 시누에, 평생을 무능하게 탕일하며 살아온 시아버지.

어머니 한테는 장남이 남편 이었고, 아들이었고, 인생 그 자체였어.

현철 아빠도 하늘이 내린다는 장남 자리에 걸맞게 엄마 말이라면 벌벌 기는, 정말 내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효자였지.

자식때문에 청춘 다 보냈다고 고생한 보상을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하는 어머니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얼마나 사시겠나 싶어 살날 더 남은 내가 참아야지, 같은 여자로써 연민이 느껴지더라.
우리 엄마 생각도 나고...

황금같은 신혼의 억울함 곰삭여 가며,
애정표현 같은거 꿈도 못꾸고, 생떼같은 자식 떼어놓고 친정에 얹혀사는 시누 눈치 보여, 현철이 미림이 돌, 백일도 쉬쉬하며 그렇게 생활했다.

결혼 기념일날 외식하고 들어 오다가 '시누 저러고 있는데 눈치껏 좀 하라'는 시어머니 꾸중에 먹은거 소화도 안되고....

정말 미치고 환장하고 팔딱 뛰겠더라. 야.

급기야, 신경 정신과에서 불안증인지 나발인지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말대꾸를 시작했다.
뭐 한마디로 울화병에 걸린거야.

옴씰하니 대꾸 했던게, 결혼 생활 5년정도 되니까, 관록이 붙어서 간댕이 배밖으로 나올 정도가 된거고.

자연히 남편과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어.

나 하나 입다물지 않아서,
나 하나 희생하지 않아서,
바람 잘 날이 없었지."

"왜, 남편한테 분가 하자고 안그랬니?"

"야, 내가 안했겠냐.
그 남자, 어머니 거역 못해.
죽으면 죽었지."

"모든 남자들한테 마더 컴플렉스는 다 있는거 아니니.
얼마나 심한가, 정도에 따라
마마보이가 되느냐, 효자가 되느냐, 갈리는 거겠지.
오죽했으면, 남자들은 죽을때, 아내 새끼들도 아닌 '어머니'를 부르며 죽는다잖니."

인희는 그정도를 가지고 이혼한 보람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보람은 인희의 말에 아랑곳 없이, 한풀이 하듯 쏟아냈다.

"그렇게, 한마리 고기가 물을 흐린다는 듯한 시집의 따가운 눈총속에서, 밤낮 바뀐 핏덩이하고 씨름 하다, 미림이 자는 틈에 기저귀 박박 빨아대고 있을 때였다.
빨래판 위로 시누가 밉살머리스럽게 속옷 한무덩이를 털어 내는 거야.

현철이 때도 을밋을밋하다 소처럼 지나갔고, 미림이 때도 산후조리, 언감생신 생각도 못하고 있던터라, 손목이 시큰거려 못빨겠으니 자기 속옷은 자기가 빨아 입으라고 했지."

"후후...
잘했다!
그래서?"

"그러다 시어머니와 셋이 붙은거야.
퇴근하던 현철 아빠 우리들 모양새에
와닥닥 밖으로 뛰쳐 나가 버리더라."

보람은 술잔에 비친 자신의 나부죽한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보기 싫다는 듯 '홀짝' 들이켰다.

인희는 재빨리 술잔을 채웠다.

"그냥, 이골이 난 일상사 였어.
나 장보람한테는....

그날....
미림이가 울어대는 신새벽에 술취한 현철 아빠랑 또 붙었지.

현철 아빠가 나불대더라.

'여자는 이쁘건 못나건 다 똑같은 족속' 들이라구.
그런줄 진즉 알았으면 너 따위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나.

후후후후후....

현철 아빠는 엄마와 누나의 하녀역할 할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거였어.

집안 시끄럽지 않게 숨죽여 지내주면 그만이었고,
애나 낳아주면 더 바랄게 없었던 거야.

그래서 나 장보람을 택했던 거였어.

키작고, 뚱뚱하고, 가방끈 짧아 내세울거 없는....

지 인생 희생시켜 가며, 효자노릇하는 인생들도 불쌍한 인생이지.

하지만,
현철 아빠는 너무 멀리까지 와서 깨달은 거야.

여자는 잘났건 못났건 간에 그냥 '여자'라는 것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현철이는?"

질펀하게 웃어대던 보람이,
마치 비극의 여주인공같은 표정이 되었다.

"현철이...

그때 시누 기분이 이랬겠지.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늘 한구석이 아리고, 허전하고...
어느순간, 보고싶어 미쳐 나가 버릴것 같은게...

우리 현철이...
이제 학교 갈 나이구나.

난....
너무 무기력 했다.
쥐뿔 가진거 없고, 배운기술도 없지.
게다가 애까지 딸린 이혼녀...
그들이 정신과 이력을 들추면서 현철이를 데려간게 아니고,
솔직히 내가 자신이 없었어.

그들이 원한건 오직 불알달린 남자였고,
우리 미림이는 대한민국 남아선호 나부랭이의 희생양이 된거고."

잔을 비우며 보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림이라도 내 주는걸 고마워 하라며,
선심쓰듯 애 업은 내 등을 떠밀었어!"

투박하고 거친 보람의 손등을 인희가 꼬옥 감싸 쥐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