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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한 A씨의 사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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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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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더벅머리 2001-02-13

3

엄마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여기까지 영신을 안내해 준 간호사가 들어가 보라고 눈짓을 했다. 병실 안에는 여자의사가 누워있는 엄마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사가 고개를 들어 영신쪽을 쳐다보았다. 간호사가 ‘보호자분이세요’ 한마디 했다.
영신은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비에 온통 젖은 머리며 옷에서 물방울이 흩어졌다. 추위에, 충격에 아무리 숨을 깊게 들이쉬어봐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 문에서 침대까지 얼마되지 않는 그 짧은 거리가 땅끝처럼 멀게 느껴졌다. 휘청하고 중심을 잃을 듯하자 뒤에 서 있던 간호사가 얼른 팔을 잡아 부축을 해주었다. 영신은 그렇게 손에 닿는 뭐든 의지하며 천천히, 천천히 엄마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천만다행이세요. 꽤 큰 사고였다고 들었는데..... 뒷자리에 타셔서 그나마 충격을 좀 덜 받으셨나봐요. 운전석은 완전히....“
여자의사는 문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멈추고 영신의 표정을 살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 재빨리 말을 받아 이었다.

“이제 의식도 돌아오실 거예요. 조금 전에 맥박도 돌아오고 호흡도 편해보이세요.”

인턴이나 레지던트처럼 보이는 여자 의사는 그러고도 뭐라고 더 말을 붙일 듯 했으나 넋나간 듯 아무 반응없는 영신을 좀 길다싶게 쳐다보고는 간호사를 이끌고 병실을 나갔다.
영신은 아무도 없게 되자 ‘띠,띠....’, 엄마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주는 기계음만 남은 병실 안에서 팔이며 다리에 온통 붕대로 감긴 엄마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는 닦아냈겠지만 흥건했을 핏자국이 역력했다. 영신쪽에서 보이는 오른쪽 뺨과 이어지는 목에는 유리파편이 박혔던 자국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 거즈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의식을 잃고 있는 중이라는 엄마의 얼굴은 짐짓 잠든 듯 평안해 보였다.

영신은 드디어는 무너져 내리듯, 쓰러지듯 그렇게 병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으로 조금 기어 침대 곁으로 바싹 다가붙었다. 침대 시트 위로 올라와 있는 엄마의 성한 오른손을 잡았다. 엄마 손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그저 언제나처럼 그렇게 따뜻했다. 영신은 엄마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눈꺼풀까지 내려온 엄마의 머리칼을 조금 위로 쓸어올려 주었다. 그래도 엄마는 기척이 없었지만 분명 따뜻한 숨기운을 조용히 내뿜고 있었다.

“엄마..... 고마워.....정말, 고마워.....살아줘서......”

울컥 치미는 울음을 삼키려 영신은 얼굴에 갖다댔던 엄마의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엄마.....그이....그인 지금.....수술실에 있대. 괜찮겠지? 그 사람.....최서방도 괜찮겠지? 엄마....응.......?”

엄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성국을 아들처럼 사랑해주던 엄마였다. 성국의 집에서 영신을 그렇게 내몰아도, 성국의 부모님과 성국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엄마였다.

-최서방 보약해 먹여라. 이번 달엔 시집가는 새댁들이 셋이나 왔었어.
부잣집으로 간대길래 조금 값을 쳐서 받았다. 그럼 안돼는데도 이돈이면 우리 최서방 보약이 나온다 싶으니까 고만 욕심나드라. 나도 이젠 늙었나 부다....

그 조그만 동네 이불집 가게로 부잣집 새댁들이 혼수감 장만하러 올 리도 없고, 이 집 저 집 돌며 그 무거운 솜 걷어다가 밤새 틀고 또 틀어 장만한, 그런 보약인지 영신은 다 알고 있었다. 말을 굳이 옮기지 않아도 성국도 다 알아 주었다. 그래서 성국은 보약을 지어다 먹었다 거짓말하고 대신 엄마 앞으로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계절 바뀔 때마다 이렇게 올라오는 보약 지을 돈도 모으면 꽤 될거야.

그러면서 성국은 영신보다 더 좋아라 했었다. 어른들 몰래 좋은 일 꾸며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하는 어린애처럼 성국은 영신 때문에 다시 안본다 고개돌린 자신의 부모대신 어느새 영신의 엄마에게 정말 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

“엄마....엄마, 미안해.....나, 사고났단 전화받고 여기까지 오면서 엄마 생각.....나, 별로
안했다? 나, 그 사람만 생각했어.....진짜야......엄마, 나 못됐지?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무사한 게.....진짜....진짜 다행이야. 정말.....“

영신은 어떻게든 울음을 삼켰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눈물을 쏟아버리면 계속 울고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는 성국이 수술을 마치고, 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보고 되려 ‘걱정했지?’ 할 때도 울고만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참았다가 참았다가 성국이 완전히 다 나으면, 그 때, 그 때는 정말 하도 좋아서 마음놓고 울어 버릴 것이다.
그 때 울자. 그 때.
영신은 그렇게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수술실 앞 긴 의자에 앉아있는 영신은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병원 바닥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간호사의 하얀 샌들이 병원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는 통에 시선을 옮긴 영신은 자신의 한 쪽 신발끈이 풀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성국의 운동화였다. 정신없이 달려나오느라 손에 집히는 대로 무작정 발에 끼우고 나왔지만 그게 성국의 신발인 것이 지금은 아주 위안이 되었다.

-나, 네가 사달라는 건 다 사줄거야. 그치만 신발만큼은 사달라고 하지 마.
평생 나한테서 신발 선물받는 일은 없을 거니까.
신발사주면 그 신발 신고 여자가 도망간대. 하긴 너 도망가도 별 수 없이 내가 찾아내겠지만....어쨌든 신발은 니 돈주고 사 신는 거다?

성국은 정말로 하얀 면바탕에 곤색 끈이 산뜻한 운동화를 보고 조르는 영신을 끝내 물리치고 자기만 한 벌을 사서 신었다. 성국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영신에게 ‘사라져 주는 게 성국 앞길 보전하는 거’라고 몰아붙이던 날, 너무 울어 퉁퉁 부은 얼굴을 감출 수 없어 그대로 성국에게 들켜버리고 성국은 무조건 영신의 손을 끌고 별이 총총한 밤거리를 걷자 했었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도 몇 개나 지나치면서 성국은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었다. 하늘의 별만 따 달라는 거 아니면 뭐든지 해주마 했다. 결국 7000원짜리 면운동화 한 벌도 사 주지 않을 거면서.

영신은 그 면운동화를 한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쩐지 저만치, 한참 저만치 멀게만 느껴지는 성국의 존재가 다시금 바로 옆에, 근처에, 바싹 당겨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영신은 허리를 구부려 신발끈을 조였다. 될 수 있는대로 바싹,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겼다. 덕분에 여분이 길다랗게 남은 끈을 동그랗게 오므려 리본을 만들었다.
빗길에 내달리느라 비록 하얀 면운동화는 진흙탕에 엉망이 되긴 했지만 영신은 그 위로 뒤틀림 하나 없이 반듯한, 예쁜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다른 신발끈도 다시 풀어 똑같은 모양, 크기의 리본을 또 만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두 발을 붙여 모았다. 정성을 다한 만큼 신발의 리본 모양은 똑같이 닮아 있었다. 그걸 또, 영신은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언제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원래 암흑을 안고 닫겨만 있었을 것 같던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고개만 그쪽으로 돌렸을 뿐 영신은 일어설 수 없었다. 온 몸의 모든 신경은 모두 정지된 듯, 멈추어 버린 듯 그렇게 도통 영신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굳어서 앉아 있는 영신에게로 수술복을 그대로 입은 의사가 다가들었다. 영신의 눈에 수술복에 튄 듯한 핏자국이 보였다. 영신은 그 자국에서 애써 눈을 떼고 의사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이 부셔 그 의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조금 아래로 향한 채 영신은 의자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최선을 다했지만.....이미 출혈이 너무 진행된 상태라.....”

의사는 확실하지 않은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영신은 바르르 경련이 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의사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눈이 부셔 따가울 정도여서 영신은 양 미간을 찡그려야 했지만 의사의 눈을 똑바로,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다. 무슨 지독한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의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무섭게, 아주 무섭게 엄포라도 놓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사망......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행히 영신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의사의 입이 달싹거려지는 것만 보았을 뿐 영신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눈부심이 병원 복도로 하얗게, 온통 하얗게, 그렇게 퍼지면서 영신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