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쁜 색깔의 꽃들 속을 나비와 벌들이 날아
다니고 있었다.그런데, 왜 그렇게 화면들이 빨리 지나가는 지를 묻
고 싶어서 눈을 떴다.
눈만 떴을 뿐, 팔다리도, 입도, 내 모든 육체는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는가 싶었는데, 다시 나비가 날아왔다.
이번엔 더 빠른 속도로 꽃들까지 휙휙 스쳐지나 갔다.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좀 천천히 움직였으면 좋겠어요...! 아...어지러
워......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병원이었다.
민규를 찾으려고 일어서려니, 몸이 꿈쩍도 않는다.
"움직일 수 없어요! 여긴 중환자실이구요, 정신 드시면 잠깐 보호
자는 만날 수 있어요."
방학하자마자 민규를 꼬시기 시작했다.
"아직 괜찮아. 바지 입으면 티두 안나구,스케이트는 고등학교때
실컷 타서 싫단 말야. 용평 한번만 갔다오자.내년엔 애 엄마 되잖
아."
"엄마가 안된대."
"어른들은 다 그래. 그니깐 몰래 가면 돼잖아."
"...난, 안갔으면 좋겠는데..."
"그럼, 넌 집에 있어. 나 혼자 가지뭐. 난 오늘 꼭 가구 싶단 말
야.대신 너네 엄마한테 비밀이다."
"넌, 한번 하구 싶은게 있음 참지를 못하냐? 그래 가자!"
그렇게 해서 스키장으로 가던 중에 생긴 교통사고 였다.
운전이 서툴러서 싫다는 민규를 괜찮다고, 고속버스는 싫다고 우긴
것도 나였고,추월하자고 부축인 것도.....나...였다....
다행히 민규는 발목뼈를 다쳐 깁스를 했는데, 난, 다리의 고관절에
금이 가서 온몸에 깁스를 해야했고, 아기에 관한 얘기는.....
차츰 발길이 뜸해지시면서, 나를 대하시는 민규 어머님의 반응이
이상해서 민규를 다그쳤다.
아기는, 철없던 엄마의 부주의로, 환한 세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세상을 버려야했고, 그 댓가로, 대책없이 날뛰던 난,다시는 천사
같은 아기를, 더이상 몸속에 키울수 없는 벌을 받아야 했다.
'할아버지, 미사가 뭐 잘못 했는데요? 아빠 말씀 안 들어서요?
아빠 말씀 들을 수 없었던거, 할아버지 아시잖아요... 내 아기,
할아버지가 지켜 주실꺼죠?....'
슬픔이 너무 크면,그 크기가 실감이 되질 않나부다.
울지조차 못하던 나는, 어른들 눈엔, 그냥 한없이 철없는 아이로만
보이셨다.
퇴원을 하고, 내가 갈곳은, 당연히 민규와 함께 살던 아파트 였다.
일찌감치 발길을 끊으신 민규의 어머님은 그렇다 치고, 깁스를 풀
고 물리치료를 받을 때부터 뜸하던 민규도, 모두 내가 웃음을 거두
고,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내서 불편해서 그런 줄만 알고 있
었다. 그런데....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더 이상 민규의 흔적은 없었다.
내 앞으로 명의가 변경된 아파트 문서와, 민규가 갖고 있던 열쇠와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 있는 통장과, 내 이름이 새겨진 도장만이
식탁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모든게 정리 됐다.
민규어머님 한테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며느린, 필요 없
는 존재 였다.
울지 않을 꺼야.
난, 슬픔이나, 불행 따위하고 가깝게 지내면서 청승떨며 살고 싶지
않아.
사람들이 날 보고 잘 웃는다고 하잖아, 웃는 얼굴이 이쁘다고 하잖
아, 그래. 그렇게 살꺼야....
민규야,
너한테 미안해. 우린 처음부터 아니였기 땜에, 이렇게 된거...당연
한거야. 착한 널 택했기 땜에 이렇게 큰 벌을 받는건지도 몰라.
너의 엄마 말씀대로 날 떠난거, 너, 잘한거야. 절대로 나한테 미안
해 하지마.
아파트 문을 잠그며,
손잡이에 느껴지는 민규의 감촉을 느끼며, 민규에게 작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