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서있기만 하는 날 준석이는 중창팀에 억지로 끼워넣었다.
"연습하다 늦게 끝나면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걱정말고!"
연습하느라 고생한다고 먹거리를 사들고 들어왔던 선배들이 한마디씩 했다.
"준석이임마! 우진이만 그렇게 챙겨주는 것 보니 좀 수상하다!"
"너무 그러면 다른 동기 여자애들이 섭섭하지~~~~"
장난스레 말을 던지는 것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난 그런 선배들과 동기들의 오해를 아무 말없이 받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맘속에는 이미 누군가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중창을 하는 애들은 이미 연습이 상당히 진행이 된 상태여서 난 그저 악보를 받고 파트만 정하면 된다고 현숙이가 말했다.
현숙이는 나랑 같은 과였다.
"우진아! 니가 내 말을 통 안들어서 내가 준석이에게 전화하라고 했어. 이번 행사조차 빠지면 넌 정말 제명 된다니까. 니가 제명 대상자 일순위라고 내가 얘기했지?
아무리 힘들어도 이번만큼은 조금 참가하는 척이라도 해라, 제발!"
그랬다.
현숙이는 내가 동아리에서 제명될까봐 나보다 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않아도 소극적인 내가 집과 강의실만 왔다갔다 할까봐 못내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참! 너 연락받았니? 근로 아르바이트 신청했던 사람들 과사무실로 한번 와보라고 하던데, 너 저번에 신청했지? 조금 있다가 잠깐 갔다오자. 나도 아직이거든."
그 때, 그가 다가왔다.
아마도 중창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시작할 때 잠깐 보고 첨이지?
애들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첫인상처럼 그렇게 차갑진 않나보네.앞으로 잘 지내보자. 나도 노래는 못하는데 마땅히 잘하는 것도 없고 해서 노래 부르는 시늉이라도 내보려고......누구처럼 제명 대상자에 이름이 올라가면 안되니까."
웃으며 얘기하는 그가 밉지않게 보였다.
잠깐 연습을 하고 현숙이랑 과사무실로 향했다.
캠퍼스에 뒹굴던 그 많던 낙엽도 이젠 자취를 감추고,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차가운 겨울을 느끼게 해주는 듯 했다.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 내게
"우진아! 저기 걸어가는 사람이 명호선배 아니니?"
손짓까지 해가며 호들갑스레 얘기했다.
명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슬며시 얼굴을 돌려버렸다.
검정빛 하프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명호선배의 어깨가 너무 슬퍼보였다.
명호선배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처럼......
현숙이는 날 뒤로 한 채 명호선배를 부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 현숙이구나. 방학인데 왠일로 학교에 왔니?"
"선배님은 왠일이세요? 저희는 과사무실에 가는 중이에요. 아르바이트 신청한 사람들 오라고 해서요."
저희라는 말에 명호선배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진이도 같이 있었구나! 그럼, 나중에 또 보자.난 약속이 있어서......"
말끝을 흐리며 돌아서는 선배가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래도 얼굴이라고 본 것이 마냥 좋았다.
"우진아! 명호선배 어떻니? 이상하게 무언가 비밀스런 냄새가 나지 않니? 그래서 신비감마저 느껴진다니까."
"신비감은 무슨......얼른 가기나 하자."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현숙이를 잡아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과사무실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학생들이 와있었다.
조교언니가 우리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면서 아는 선배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얘들아! 내일이 명호 생일이란다......"
그 뒤의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생일"이라는 소리만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언어연구소에서 방학동안 일하라는 조교언니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어느새 새벽3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구나 다 한번쯤 경험해봤음직할 짝사랑의 아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