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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할머니를 만나고 온날 또다시 그녀를 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엊그제 아이의 외할머니가 집으로 전화를 해 그녀가 아무말없이 현수에게 수화기를 내밀자
수화기 저쪽에서 우는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씁쓸한 기분과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추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다음날 현수는 아이를 외할머니집에 데려다 주었다.
하룻밤을 지내게하고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시무룩했고 현수는 낮이라 다시 출근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 방문을 열었다.
[ 민우야! ... 도대체 왜 맨날 할머니 집에만 갔다오면 이러는거야?... 그동안 엄마한테 잘했잖아. 자꾸 이러면 엄마가 힘들어 ]
아이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곤 책상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 왜그래? ... 아직도 내가 민우 맘에 안드는거야? ... 엄마 생각이 나서 그래? ]
[ ... 아니야 ... 엄마가 ...좋은데 ... 할머니가 자꾸 ...엄마가 아빠한테 잘보이려구 ...지금은 날 좋아하는척 하는거래... 좀 있으면 날 아주 미워 할거래 ]
울먹이느라 말을 겨우 마친 아이는 서럽게 다시 흐느꼈다.
그녀는 아이앞에서 자신의 분노가 폭발할까봐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책상위에 엎드려 가느다랗게 떨리는 아이의 여린어깨를 돌려세워 그녀는 힘주어 가슴에 안았다.
[ 됐어. 울지마...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엄마한테 진작 얘기했어야지.... 엄마가 민우 얼마나 사랑하는지 맨날 얘기하는데도 아직도 몰라... 엄마 얘기만 믿어. 다른 사람이 뭐라 그러는건 그냥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는거야. ...그리구 혼자 생각하지 말구 엄마한테 다 얘기하구... 알았지? ]
[ ...응... 나... 할머니 집에 가기 싫어. 맨날 나만 보면 울구...나쁜얘기만 하구 ]
[ 그래... 아빠한테 엄마가 얘기할게 ]
민우는 이제 안심을 했는지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꼭 끌어 안았다.
저녁에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고 들어온 그녀는 마침 씯고 나오는 현수와 마주쳤다.
[ 일찍 들어오네 ]
[ 응, 민우는? ]
[후후... 자... 이제 아주 민우는?이 입에 붙었구나 ]
[ 할얘기가 있어]
그가 쇼파에 앉는걸 보며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 이제 민우 외할머니 집에 안 보낼거야. ]
[ 재이야! ]
[ 지금 민우도 혼란스러워 한단 말야. ...꼭 보내야 한다면 좀더 커서 아이가 이런 관계를 이해할수 있을때쯤 보내는게 낫지 않아? ]
[ ... 민우 엄마 죽고 나서 그 아이라도 보고 싶다는데 그걸 어떻게 무슨 수로 막으라는거야? ...니가 이해해 줄줄 알았어 ]
[ 이해하려구 했어. ...하지만 그쪽에서 아이를 힘들게 한단 말야 ]
[ 무슨 말이야? ]
차마 외할머니가 민우에게 하는 말을 옮길수는 없어 그녀는 머뭇거렷다.
[ 날 위해서... 민우와 내가 좀더 신뢰할수 있게 될 때까지 조금만 봐 주면 안돼? ]
[ 너,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항상 고마워 하구 있어 ]
[ 고맙다는말 이젠 지겨워.... 내가 그런 말 들으려구 하는게 아니잖아. ...내가 조금도 가까이 갈수 있는 자리가 없는거야? ... 사랑받고 싶은거지 고맙다는 보상따위 받으려고 결혼한거 아냐... 기다리려구 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져... 여기 없는 사람과 이런 기분으로 싸워야 한다는거 얼마나 비참한건지 모를꺼야. ]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 ...내가 잘못 생각한거 같다. ... 널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되는거였는데... 애초에 내가 얘기했잖아 ] 그의 목소리가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 그래. 사랑따윈 기대 말라구 얘기 했어. ...그치만 그게 안되는데 어떡해. 내가 사랑하는만큼 나도 원하구 다른 사람 생각하는거 싫은데 어떡해? ]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 ... 동윤이를 택하는게 나을뻔 했어... 난 결국 이런 놈이야,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질 못하지]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온 동윤이라는 말에 놀라 그가 자책하는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 동윤 오빠 얘길 어떻게 알아? ]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 ... 날 찾아왔었어 ... 너의 선택을 받아 들이지 말아 달라면서 널 멀리 해달라구 부탁하더군 ... 참 한심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부담스럽고 괴로운 존재가 되버린게... 비참한 기분에 널 찾아갔었지.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는지 몰라. 그런데 다음날 ...재원이의 경멸하는 눈빛을 보는 순간 오기가 생기더군... 재원이 우리가 그날 무슨일이 있었던걸로 오해하고 있었지만 그걸 풀어 주고 싶지 않았어. 내가 상처 받은 만큼 모두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었어 ]
그의 긴 얘기를 듣는동안 그녀는 충격으로 온 몸이 굳어졌다. 오기로 나와 결혼했다고.
그건 사랑이 없는 결혼보다 더 최악의 얘기였다.
[ 우리 오빠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구? ...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꼬일수가 있지? 나 여태껏 우리오빠에게 나 하고싶은 데로만 하느라 속 많이 썩혔어. 하지만 ... 부끄러운 동생은 아니었다구. 그런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오빠가 얼마나 날 보며 힘들어했겠어. 결혼할 때까지 내 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구... 나한테 얼마나 실망했으면...]
이제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 ... 미안하다. 날 용서하라구 할 면목도 없어 ... 힘들었어...널 보면 항상 죄책감이 먼저 앞서서...너무도 민우와 날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날 계속해서 나쁜 놈으로 몰아가고 있었어...네가 원하는 만큼 해줄수 없는 내 자신이 싫었어]
[...내가 원하는 만큼...] 그가 한 말을 조용히 되뇌이며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 가슴속에서 사라져감을 느꼈다.
결국 날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저 아내라는 자리를 선물로 주고 의무감으로 그녀를 안으면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그를 생각하니 오히려 그녀가 미안해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하지? ]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향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 니가 원하는대로 ... 동윤이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은데 ... ]
[ 그래서? ]
[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
그의 냉소적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뺨위에서 철썩 하는소리가 울려퍼졌다.
[ 비겁해 ]
잠시 두사람의 시선이 서로 노려보다 그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코트를 들고 나와 거칠게 현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그녀는 넋이 나간 듯 그렇게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