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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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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BY noma 2000-11-09

7
시간의 흐름이란 사람의 마음까지 무기력하게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동안 품어왔던 중오심과 갈등,굴욕적인 순간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대신 알 수 없는 그리움과 허전함이 그녀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기 시작하자 이제는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한 시간들과 싸워야 했다.
이제 그녀의 생활은 다른 평범한 주부들처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를것이 없었다.
있다면 사랑없는 결혼이 주는 긴장감, 행복한 부부들이 갖는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수강을 마치고 나오던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나온 다른 수강생들을 보며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에 부러운 웃음을 보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겸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에 이것저것 수강신청을 해놓고 배우러
다니는 중이었다.
이제 12월에 접어들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서인지 백화점은 들뜬 분위기에 사람들도 꽤 많이 붐볐다. 엘리베이터 타기를 포기하고 구경이나 하면서 승강기를 찾아가려는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 나연이 맞구나! ]
어느새 그녀앞에 다가와 반가운 웃음을 짓는 여자앞에 나연은 난감해졌다.
[ 나, 기억 안날수도 있을꺼야. 전에 너랑 같은 화실 다니던 은이야. 정 은이. ]
여자의 말에 생각을 더듬던 나연은 얼핏,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그래, 이름이 은이였구나.
[ 응, 그래 기억나 ]
[ 많이 변했구나. 어떻게 지내니? ]
[ 응, 그냥 ...] 꽤 어색한 대화였다.
[ 우리 어디 가서 차 한잔 마실래? 이 근처에 내가 일하는 화실이 있거든. 그리 가자. 오늘
학생하나가 생일이라 애들은 파티 한다고 나가서 아마 지금쯤 비어 있을꺼야 ]
뭐라 거절할 새도없이 그녀는 나연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백화점을 나와 근처 상가 건물에 있는 그녀의 화실에 얼떨결에 따라들어온 나연은 오랜만에 맡아보는 물감냄새에 코끝이 찡해왔다.
그녀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건네며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 나, 니가 많이 궁금했어.] 그녀가 나연의 마주편으로 의자를 끌어내어 앉으며 말을 꺼냈다.
[ 왜? ]
[ ...그때 너, 선생님 많이 좋아 했었잖아 ...]
별로 잘 알고 지내지도 않았던 아이 앞에서 그당시의 얘기가 나오자 나연은 얼굴이 빨개졌다.
[ 기분 상하니? ... 난 니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하는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말 진심이구나 알아서 많이 걱정 했었어. 니가 들어오기 전부터 선생님이랑 니친구 서로 좋아했었거든. ... 근데두 너한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니친구 일부러 너 나중에 상처입히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
그랬구나,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친구는 그녀에게 상처입힐 생각을 하고 친하지도 않았던 아이는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기분이 말할수없이 묘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들어도 화가 난다거나 슬픈 기분이 들지않는걸까, 오히려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을 생각해 줄 것 같은 친구를 만난것같아 기쁜 마음이 들었다.
[ 나, 결혼했어. ]
[뭐! 정말! ... 누구랑?]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 남자랑 ] 둘은 소리내어 웃었다. 나연에겐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웃음소리였다.
[ 잘됐구나, 어떤 사람이야 ? 웬지 아주 멋있을 것 같애. ]
[ 응. 멋있어. 아주 키가 크고, 날렵한 몸에... 달리기를 좋아하고 ... 샤워하고 나왔을 때 젖은 머리가 이마위로 헝클어져 내려오면 ... 얼마나 상큼하다구 ] 그녀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하자 그녀의 친구가 깔깔댔다.
[ 남편을 무슨 영화 주인공처럼 설명하냐 ...그렇게 좋아? ]
[ 응... ... 사랑해 ]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오랜만에 좋은친구를 만났다는 기분은 그녀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 주었다.
여자친구와의 수다가 얼마나 즐거운것이었나를 잊고 지냈던 그녀는 결국 시간가는 줄도 모르다가 바쁘게 저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그는 집에서 그녀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따뜻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대하던 차가운 말투나 눈빛은 이제 거의 없었고 가끔씩은 유쾌한 대화도 오고갔다. 아무래도 결혼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덜받기위한 결정인 듯 싶었다.
요리에 서투른 그녀가 부엌을 잔뜩 어질러놓고 기를 쓰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가 놀라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씽크대문을 열어놓은걸 깜빡하고 몸을 돌리는 바람에 문끝이 그녀의 눈 언저리를 찢어 놓았다. 그녀는 눈가를 손으로 누른채 뛰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 왜그래? ]
그는 들어서며 그녀의 모습에 놀라 눈가에 대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 씽크대에 찧었어요 ]
[ 뭐야 ? 어떻게 했길래 ... 흉지겠잖아 ] 화가 난 듯 그가 소리쳤다.
그는 나연을 쇼파위에 앉히고 방으로 들어가 연고와 반창고를 찾아와 그녀의 눈위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 도대체 뭘 하다가? ]
그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 운동하고 왔어요?... 어떡하지, 아직 저녁을 다 못했는데 ] 그의 운동복 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가 말하며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 괜찮아 .... .... 세상에 이게뭐야? 누가와? ]그가 그녀를 따라 부엌에 들어서다 기겁을 했다
[ 오늘 나갔다 늦게 들어와서 저녁준비가 좀 늦어서 그래요 ]
[ 그럼 요리할땐 늘 이렇게 해놓고 하는거야? 내가 갑자기 굉장한걸 먹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둬요 ]그가 웃으며 늘어져 있는 것을 치우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말했다.
[ 됐어, 같이해 ...어딜 갔다 왔길래 이렇게 당신의 약점을 잡힌거야 ?]
[ 친구, 옛날 친구를 만났어요? 오랜만에 수다떨다가 ...]
[ 재밌었겠네 ]
[ 응 ] 그녀가 찌개를 끓이던 손을 잠시 놓으며 생각에 잠겨 미소짓자 그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 남자친구? ] 그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눈을 흘겼다.
[ 아니예요 ]
그녀가 시선을 피해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그의 시선이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자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그의 입술이 점점 다가오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유혹적인 키스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내려가자 그녀는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그의목에 팔을 두르고 끝날것같지 않은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 세상에 너무들 하는구나, 아무리 신혼이래지만 ]
갑작스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사람은 소리가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어머니! ]
그의 외침에 나연이 비틀거리자 그가 재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